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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 고고학-빙하기의 종식과 낚싯바늘의 탄생
2018년 03월 568 11542

낚시 고고학

 

 

빙하기의 종식과 낚싯바늘의 탄생


 

인류가 남긴 삶의 흔적을 찾아내는 특수한 학문으로서의 고고학에 의하면, 적어도 구석기시대에는 인간이 낚시를 하지 않았다. 낚싯바늘과 같은 도구가 이 시기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두뇌가 발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런 도구를 개발할 필요가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서동인 역사연구가

 

빙하기가 지나가기까지 환경은 가혹했다. 그 당시에는 돌도끼나 돌칼, 사냥돌 등을 사용하여 주로 큰 짐승을 잡아야 했다. 구석기인들은 주로 뛰어다니면서 짐승을 잡고, 채집을 하고 살았다. 좀 더 따뜻한 곳이라면 그것도 여름 한철 짧은 기간에만 강이나 시내, 못이나 웅덩이에 있는 물고기를 돌로 때려잡거나 손으로 움켜내는 정도의 채집을 하였을 것이다. 구석기인들은 돌도끼, 찍개, 돌칼, 돌창, 밀개, 첨두기(찌르개), 조각기(새기개), 망치, 사냥돌, 톱니날석기와 같은 도구를 돌로 만들어 썼으며 후기구석기 시대로 내려오면 크기가 작은 세석기를 만들어 썼다. 그러나 후기구석기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인류는 낚싯바늘을 창안해내지 못하였다. 세석기를 사용한 후기 구석기시대에도 어로와 관련된 도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인류가 겪은 네 번째의 마지막 빙하기는 지금부터 대략 3만~3만5천 년 전 시작되어 1만 년 전에야 완전히 물러갔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낚시를 몰랐다. 빙하기에 해수면은 크게 낮아지고, 해안선은 지금의 우리가 보는 해안선으로부터 아주 멀리까지 물러나 있었다. 그리하여 서해는 대부분 육지로서 중국 대륙과 이어져 있었고, 남해는 대마도와 제주도가 일본과 육지로 이어져 있었다. 또한 동해는 거대한 호수로 남아 있었다. 이 마지막 빙하기의 구석기시대에는 해수면이 낮아져서 물고기를 채집할 수 있는 조건도 못되었다.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선사유적지에서 출토된 결합식 낚싯바늘.

 

 

낚시는 빙하기 후 따뜻해진 기후변화의 산물 
인간이 경험한 빙하기는 견디기 힘든 환경이었으나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의 지혜를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환경에 급격한 변화가 왔다. 얼음이 녹으면서 해안선은 육지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어 왔다. 빙하기가 끝나고 식물과 동물의 번식은 왕성해졌으며, 대략 지금과 같은 해안선이 형성되었다. 극심한 빙하기의 구석기시대와 달리 따뜻해진 날씨로 말미암아 동식물이 대단히 번성하였다. 수만 년 동안 혹독한 빙하기를 겪은 동식물에게 새로운 기후변화는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안락하고 편안한 기후와 환경이 형성되자 구석기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던 다양한 식물이 그 모습을 드러냈고, 동물의 종류와 양 또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덩치가 큰 들짐승뿐만 아니라 작은 짐승들도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따라서 돌창이나 돌도끼, 찍개 또는 사냥돌을 만들어 가지고 들과 산을 뛰어다니며 사냥하던 방식에도 서서히 변화가 왔다. 대략 8천 년 전까지, 우리는 이 시기를 중석기(Mesolithic) 시대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인간에게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다. 후기구석기시대까지만 해도 일정 지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사냥과 채집활동을 하였으나 이제 인간의 활동을 크게 제약하는 가장 강력한 기후환경이 개선되었으니 사람들은 드디어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렇게 인구가 분산되어 각자 다른 환경에 적응하였고, 흩어진 사람들의 환경과 경험이 다르다 보니 그들이 생산한 문화에도 지역차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다양한 식물이 번성하고, 인간의 필요에 따라 식량이 되는 자원이 큰 폭으로 다양해졌다. 보리나 콩, 기장과 같은 탄수화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곡류(穀類)의 채집은 물론, 큰 짐승 위주로 사냥하던 패턴에도 변화가 왔다. 작은 포유동물이나 새, 물고기 등을 사냥하게 되었고, 조개나 갑각류, 연체동물 등을 채집하여 식량에 보탰다. 이에 따라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는 좀 더 작아지고, 도구의 종류는 좀 더 복잡하게 분화하였다. 식물을 채집하는 데 쓰기 위한 돌칼이나 돌낫은 규모는 작아졌어도 그 날카로움은 크게 향상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출토 사례가 없으나 외국에서는 바로 이 중석기시대에 여러 종류의 골각기가 나타난다. 역시 외국의 사례이지만, 중석기시대 후기에 비로소 활과 화살 그리고 낚싯바늘이 보고된 사례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외국의 일부 사례일 뿐 낚싯바늘이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신석기시대로의 전환기이자 후기구석기와 신석기의 사이에 해당하는 중석기 시대,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도구들을 만들어냈다. 후기구석기 시대는 석기의 크기가 작은 세석기 위주로 다양한 도구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중석기시대 사람들조차도 물고기를 잡는 어구(漁具)나 낚싯바늘과 같은 도구는 없었다.

 

8천년 전 나타난 결합식 낚싯바늘
이 한반도 땅에서 사람들이 낚싯바늘이란 특수한 도구를 만들어낸 것은 대략 8~9천 년 전으로 보고 있다. 물론 최근까지의 발굴과 고고학 성과로 알아낸 것이지만, 8천 년 전이란 시기는 중석기에서 신석기로 이행하는 단계이니 간단히 말해서 이 시기가 신석기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처음으로 창안해낸 낚싯바늘의 모양은 지금의 낚싯바늘과는 다르다. 바늘허리와 바늘굽이로부터 바늘 끝에 이르는 부분을 따로 만들어 필요할 때 끈으로 묶어 쓰는 것이었다. 이런 형태는 모양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금속을 발견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겪게 된 소재의 제한 때문이다. 대신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돌이나 먹고 버린 짐승의 뼈를 소재로 사용하면서 그 형태에서 많은 제약을 받게 된 결과이다.
이런 형태의 낚싯바늘을 이른바 결합형(結合形) 낚싯바늘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조합형(組合形) 낚싯바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낚싯바늘에 결합 또는 조합이란 말을 붙이게 된 것은 이 바늘의 특이한 구조와 생김새에 있다. 돌을 갈아서 만든 이 바늘은 ①바늘허리(Shank)와 ②턱굽이(Bend)로부터 바늘끝(Point)에 이르는 부분을 따로 만든 것이므로 현장에서 사용할 때는 ‘두 조각을 결합하여’ 끈으로 묶어서 쓰게끔 되어 있다.
현재까지 발굴한 신석기시대 초기의 결합식 낚싯바늘로서 가장 오래 된 것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유적에서 나온 것이며, 그 다음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 양양 오산리 유적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신석기시대 초?중기의 낚싯바늘은 거의 모두가 동해안과 부산~여수에 이르는 남해안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남해안에서는 주로 경상도 지역이 중심이며, 서쪽으로 여수권의 해안과 몇몇 섬에서도 결합식 낚싯바늘이 나왔다. 그러나 서해안에서는 전북 군산 지역의 한 섬에서 나온 사례 외에는 없다.
이와 같은 결합식 낚싯바늘은 우리나라 동해안 및 남해안에서 마주보는 일본 해안과 섬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일본 조합식 낚싯바늘의 원류는 바로 이 한반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본의 낚시원류도 이 땅에 있는 것이다.

 

화살촉과 낚싯바늘은 선사시대의 첨단 발명품
화살촉이 나타난 것은 1만 년 전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중기 이후이며 청동기시대 후에 중요한 살상도구가 되었다. 반면 낚싯바늘은 8천 년 전 무렵에 만들었으니 화살과 낚싯바늘은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것이다. 이것은 구석기시대 육중한 몸을 가진 동물의 사냥에서 벗어나 작은 사냥감이 부쩍 늘어난 환경에서 비롯된 사냥법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구석기시대가 끝나기까지 사람들은 사냥을 위해 뛰어다녀야 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은 중석기시대에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칡 줄기와 같은 질기고 강한 줄의 양쪽에 사냥돌을 매달아 빙빙 돌리다가 사냥감을 겨냥하여 던져서 다리를 못 쓰게 묶어버리는 식으로 사냥을 하거나, 돌창·돌칼을 막대기 끝에 묶어서 짐승을 쫓아가 찔러서 잡는 식의 사냥은 많은 에너지와 막강한 체력이 받쳐주어야 가능하다. 큼직한 돌을 깨어서 각종 도구를 만든 구석기인들의 완력과 악력(握力)이 얼마나 되었을까? 누구도 알 수는 없지만, 대략 3톤 정도의 힘을 썼을 것으로 짐작하는 이들이 있다. 돌을 깨어 석기를 만든 것을 감안할 때 성인 남자는 누구든 그만한 완력을 가졌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힘을 유지하려면 상당한 양의 지방 및 단백질을 섭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곡물을 재배하여 먹기 시작한 3~4천 년 전의 신석기 후기시대 사람들과 구석기인들 사이에는 아마도 체격과 체력의 차이가 컸을 것이다.
하여튼, 인간은 신석기시대로 들어오면서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면서 좀 더 교활해졌고, 힘을 덜 들이면서 사냥감과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지혜를 짜냈다. 돌아보면 화살촉과 낚싯바늘의 발명은, 적어도 인간이 체력을 아끼고 대상물을 손쉽게 잡기 위한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돌창이나 찌르개와 같은 것들은 직선형의 도구이다. 이런 것은 사람이 들고 뛰어가서 사냥감을 찌르거나 던져서 잡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낚싯바늘은, 비록 그것이 초기의 결합식 낚싯바늘이라 하더라도 전체적인 윤곽은 V자형 또는 U자형이다. 한쪽은 낚싯줄을 묶기 위한 바늘귀에 해당하고, 나머지 한쪽은 물고기를 꿰기 위한 바늘끝이다. 이것을 구석기시대의 창과 비교해보면 바늘끝이 대상물을 낚고자 하는 사람에게로 향해 있다. 그 바늘 끝에 미끼를 얹으면 대상물이 스스로 찾아와 걸리게 되어 있는 구조이다. 따라서 형태상으로는 창을 U자형으로 구부려서 마이크로(Micro)화한 것이 낚싯바늘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직선과 곡선, 그러니까 화살촉과 낚싯바늘의 발명으로 인간은 이제 피곤하게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고, 힘을 아낄 수 있게 되었다. 대신 어느 정도의 인내심과 시간을 투자하면 힘이 약한 어린이나 여인네들도 사냥감을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도구야말로 인간이 자연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고 관리할 수 있게 된 문명의 새로운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찍이 인간이 개발한 여러 가지 도구(=석기)들을 제쳐두고, 낚싯바늘 하나만으로 보면,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새로운 문명의 첨단제품은 낚싯바늘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결합식 낚싯바늘과 함께 발견되는 어망추로 보아 그물과 낚싯바늘은 인간의 식생활에 크나큰 전환점을 마련해준 혁명적인 도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선사시대 첨단의 문명은 그물과 낚싯바늘, 그리고 활과 화살촉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고, 이들 도구와 더불어 낚싯바늘이 선사시대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 아이디어와 쓰임새로 보아 대단히 가치 있었다. 그 구체적인 사례들이 바로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결합식 낚싯바늘이다.

 

결합식 낚싯바늘의 각부명칭

 

 

바이칼호에서 연해주→한반도→일본으로 전파
동물 뼈를 사용한 낚싯바늘 소재의 제한은 그로부터 5~6천 년 이상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해결되기 시작하였다. 중국 요하(遼河) 지역에서는 기원전 29~30세기에 청동기 문명이 시작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고, 황하 중류의 문화권에서는 기원전 20세기가 되어서야 청동기 문명이 싹텄지만, 낚싯바늘이 청동으로 대체된 것은 아마도 그로부터 다시 많은 시간이 지난 뒤였을 것이다. 즉, 두 조각으로 된 결합식 낚싯바늘이 지금과 같은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은 청동이라는 금속의 출현과 시기를 같이한다.
지금까지 낚싯바늘이 나온 유적은 남북한을 모두 합쳐 대략 1,000여 개가 된다. 그 중에서 결합식 낚싯바늘이 출토된 신석기시대 유적은 불과 30군데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지역은 아무래도 동해안과 남해안이다. 북한에서는 함경북도 웅기 서포항(西浦項) 유적을 대표적인 곳으로 들 수 있으며 고성·양양·강릉·동해시·울진·울산·부산·통영·여수·신안 등지에 이르는 여러 유적에서 결합식 낚싯바늘이 많이 나왔다.
지금까지 낚싯바늘이 출토된 유적은 전국적으로 수백 군데가 된다. 우선 신석기시대 유적 가운데 함경북도 웅기 서포항(西浦項) 유적·양양 오산리 유적·고성 문암리 유적·강릉 초당동·동해 망상동 노봉유적·울산 세죽리 유적·울산 우봉리·울산 서생 신암리·울산 신암리3지구·부산 동삼동 패총·부산 범방동 패총·부산 범방동유적·통영 연대도 연곡리패총·사천 구평리패총·상노대도 상리패총·욕지도 패총·여수 대경도·여수 농소리패총·여수 돌산 송도패총·여수 안도패총·군산 노래섬패총·군산 가도패총·춘천 교동 동굴유적 등 30여 군데이며, 이들 여러 유적에서 지금까지 발굴에 의해 확인된 결합식 낚싯바늘은 300개 가까이 된다.
결합식 낚싯바늘은 그 형태상 직침이 아니라 곡침이다. 바늘굽이에서 바늘 끝에 이르는 부분과 바늘허리(Shank)를 따로 만들어서 서로 이어서 쓰도록 만든 것이어서 결합식 낚싯바늘이란 이름 외에도 이음낚시 또는 이음식 낚싯바늘이라고도 부른다. 북한에서는 묶음낚시 또는 묶음식 낚시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어 북한과 남한 그리고 일본 사이에 용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결합식 낚싯바늘은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아주 오랜 동안 사용된 낚시용 바늘인데, 이런 종류의 낚싯바늘이 출토된 곳은 고성 문암리로부터 강릉을 거쳐 부산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과 부산에서 여수에 이르는 남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결합식 낚싯바늘이라든가 신석기시대 어로 문화는 시베리아 바이칼호 주변에서 연해주를 거쳐 우리나라 동해안과 남해안 및 일본 규슈 지역으로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과 북미 인디언에도 전파된 결합식 낚싯바늘
지금까지 발굴에 의해 확인된 것을 바탕으로 보면, 일본의 결합식 낚싯바늘은 그 원류가 한반도에 있다. 다만, 일본의 결합식 낚싯바늘은 99% 이상이 모두 사슴이나 기타 동물의 뼈와 뿔로 만든 골제품이다. 돌로 만든 일본의 조합식 낚싯바늘은 1992년 규슈(九州)의 구마모토현(熊本縣) 대시유적(大矢遺蹟)에서 출토된 것 한 점이 있을 뿐이다.
일본에서는 결합식 낚싯바늘을 組みせ合式釣針(조합식조침)이라고 하는데, 이런 형태의 낚싯바늘은 신석기시대인 조몽(繩文)시대 후기로 내려가면 일본 전역으로 확산된다. 규슈 지역으로부터 북부지방인 홋카이도(北海島)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해안 지역에서 모두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크기와 형태도 다양하다. 그 중에는 L자형 바늘허리에 둥근 바늘굽이와 바늘끝이 있는 바늘부를 이어서 쓰도록 만든 것도 있고, V자 형으로 묶어서 쓰게 만든 것도 있다.
미늘도 바늘 끝의 안쪽에 달린 것, 바깥에 달린 것, 그리고 미늘의 개수도 톱니처럼 안쪽에 두 개가 있는 것과 바깥에 두 개가 있는 것이 있다. 바늘머리에 낚싯줄을 묶는 부분도 마치 나사의 톱니처럼 만든 것도 있고, 바늘허리와 바늘부의 연결부(이음부)도 톱니처럼 되어 있는 낚싯바늘도 있다.
한편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철기시대의 늦은 시기까지도 결합식 낚싯바늘을 사용한 사례가 있다. 북미의 인디언들은 삼나무(Cedar)의 속껍질을 벗겨내어 꼰 끈이나 사슴 가죽을 얇게 잘라서 만든 가죽끈 또는 기타 노끈과 같은 것으로 이음부와 바늘허리 전체를 감아서 만든 J자형 낚싯바늘을 사용한 사례가 있다. 따라서 전 세계적으로 보면 결합식 낚싯바늘은 불과 1~2천 년 전까지도 사용된 지역이 있다. 낚싯바늘의 형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것은 소재에 있었다. 낚싯바늘의 소재가 다루기 어려운 돌로부터 다루기 훨씬 편한 동물의 뼈로 옮겨가면서 그 형태에도 새로운 변화가 왔다. 직침과 곡침(曲針)의 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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