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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특집-행장 낚시인구 700만 시대의 초석을 놓은 ‘낚시 대부’ 한형주 박사
2019년 01월 749 12134

추모특집

 

행장

 

낚시인구 700만 시대의 초석을 놓은

 

 

‘낚시 대부’ 한형주 박사

 

 

허만갑 기자

 

1928년 함경남도 신창 출생
1952년 서울의대 졸업, 군의관으로 6.25 참전
1960년 서울 신설동에 ‘한형주의원’ 개원
1968년 제주도에 ‘서울대학교 풍토병연구소’ 설립
1971년 『낚시춘추』 창간
1980년 『한국낚시펜클럽(APC)』 설립
1986년 『한국낚시진흥회』 창립 
2018년 11월 17일 향년 91세로 타계

 

해양수산부는 2016년에 우리나라 낚시인구가 767만 명이라고 발표했다. 작년에는 세종대 관광산업연구소와 컨슈머 인사이트 공동조사 결과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해보고 싶은 레저로 낚시가 등산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가을이면 수도권의 서해바다는 주꾸미, 갑오징어, 삼치를 낚으러 온 낚싯배와 가족낚시인들로 장관을 이룬다. 낚시예능 프로그램 ‘도시어부’가 동시간대 TV 시청률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낚시 전성시대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1960년대 말쯤으로 가면, 우리나라의 낚시인구는 채 30만 명도 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1년 예산이 200억원에 불과했던 시절이다. 낚싯대 공장이 서울과 부산에 처음 생기고 대다수 낚시인들이 승용차가 없어 낚시회 버스 출조에만 의지하던 그때, 우리나라 최초의 낚시잡지인 ‘낚시춘추’가 창간되었다. 발행인은 출판 쪽에 아무 연고도 없는 40대 초반의 의사였다.
‘낚시춘추’는 한국 낚시 태동기에 낚시문화의 터미널 역할을 했다. 경향각지의 낚시터 정보가 교류되고 외국의 선진낚시기술이 소개되었다. 낚시춘추 필진으로 활약한 문인, 학자, 의사들은 낚시정책 자문과 낚시인 권익보호를 위해 ‘한국낚시펜클럽’과 ‘한국낚시진흥회’를 발족시켰다. 이러한 제반활동에 구심점 역할을 한 사람이 낚시춘추 창간인이자 한국낚시진흥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원파(圓波) 한형주(韓炯周) 박사다.

 

낚시춘추 창간, 한국낚시진흥회 창립 등의 업적을 통하여 우리나라 낚시의 기틀을 다진 고 한형주 박사.

지난 11월 17일 성남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한형주 박사의 빈소.

낚시춘추 창간 초기의 편집회의.  맨 왼쪽이 이재학 전 국회의장, 맨 오른쪽이 발행인 한형주 박사이며

  그 왼쪽은 신영보 평화낚시회 회장이다.  

1967년 예당지에서 열린 한양낚시회 춘계대회에 부인 김명희 씨와 딸 한유미 양과 함께한 한형주 박사.

1964년 서울대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

1971년 1월 17일 낚시춘추 창간호 표지 촬영을 위해 찾은 전주 삼례 주교지의 무넘기통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한형주 박사.

1974년 4월 14일 화성 방농장지에서 열린 낚시춘추 제4회 낚시잔치에 참가한 필진들. 뒷줄 가운데가 한형주 박사이고 그 왼쪽으로

  임창수씨, 김창락 화백, 소설가 서기원씨의 모습이 보인다. 맨 오른쪽은 '붕어낚시교실'의 저자 송소석 선생, 그 왼쪽이 낚시춘추 김인숙

  업무국장이다.

1989년 10월 26일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실에서 열린 한국낚시진흥회 주최 제1회 공청회. 낚시터 환경문제에 대한 낚시인의 역할과

  올바른 정부 대책을 토론하였다.

1983년 4월 27일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새로 통일된 낚시용어집 출간 기념연’에서. 왼쪽부터 낚시춘추 정효섭 대표(2대 발행인),

  춘천교대 최태호 학장, 한국낚시펜클럽 한형주 회장, 부산낚시연합회 박영덕 회장.

 

 

1971년 낚시춘추 창간
지난 11월 17일 한국 낚시의 대부 한형주 박사가 타계하였다. 향년 91세. 고인은 1928년 함경남도 신창에서 태어나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서울 동대문구에 개인병원을 개설, 내과와 신경과 전문의로 명성을 떨쳤다. 1968년엔 제주도 서귀포에 ‘풍토병연구소’를 지어 기생충과 풍토병 박멸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연구소는 나중에 ‘서울대학교 풍토병 연구소 분원’으로 이름을 바꿔 모교인 서울대학교에 기증했다.
한 박사의 부친 한병만(韓秉萬)은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과대학의 전신)를 나온 의사였고 조부도 한의사여서 대대로 의사 집안이었다. 한형주는 함남중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18세에 함흥 신흥정공립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광복을 맞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단신 월남한 뒤 분단을 맞아 북에 있는 가족과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1·4후퇴 때 피란지 부산에서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 중위로 임관하였고, 역시 피란 도중 부산에서 숙명여대를 졸업한 부인 김명희(金明姬)씨를 만나 결혼하였다. 결혼 후 양수리 육군병원 군의관 대위로 근무할 때부터 잡게 된 낚싯대는 어릴 때 신고산에서 할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익힌 낚시의 열정을 되살려 줬고, 이후 평생을 낚시라는 취미와 더불어 살았다.      
당시 한형주 박사는 서울의 명문낚시클럽인 한양낚시회 회장을 맡고 있었고, 교유한 조우(釣友)들이 전 국회의장 이재학, 만화가 김경언, 소설가 서기원, 광주의대 손철 박사, 부산 MBC 김종한 전무 등이었으며 그들이 낚시춘추 창간을 적극적으로 부추겼다. 70년대 당시 정계와 의료계, 문단에는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형주 박사는 피천득 선생의 애제자로 수필집을 여러 권 발간한 문사이기도 했기에 많은 문인들이 낚시에세이, 낚시소설, 낚시만화 등에 적극 참가하였다.
“전후 경제가 복구되고 국민의 여가활동이 늘어나면서 낚시인구도 빠르게 늘고 있는데, 언제 어디로 가서 무슨 낚시를 해야 할지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황이라 온 국민이 함께 볼 수 있는 낚시정보지가 꼭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출판에 대한 아무 경험도 없이 시작하게 되었다”는 한 박사는 “내 평생에 가장 잘한 일 하나만 꼽는다면 낚시춘추 창간이다. 그 후 나는 전국 낚시터 어디를 가나 칙사 대접을 받았으니까”라고 말했다.
당시 낚시춘추의 인기는 실로 대단하여 서울의 모든 낚시회들이 낚시춘추에 매월 소개되는 낚시터들을 보고 찾아갈 정도였다. 그러나 낚시산업이 발전하기 전이라서 광고 수입이 거의 없었다. 병원 수입으로 6년 넘게 잡지를 운영해오다가 1977년 대학 후배인 정효섭(鄭孝燮) 다락원 대표에게 낚시춘추를 물려주었다. 이후 낚시춘추는 우리나라 최대 낚시잡지로 성장하였고, 현재까지 통권 570호를 발간하며 47년간 매월 전국의 낚시인들에게 발송되고 있다.

 

망향의 한, 낚시로 달래
잡지에서 손을 놓고도 낚시에 대한 한 박사의 애정은 식지 않았다. 1982년부터 83년까지 낚시문필가들의 모임인 ‘한국낚시펜클럽’의 회장으로서 전국낚시연합회, 부산낚시연합회, 낚시춘추와 공동으로 ‘통일된 낚시용어 제정’ 사업을 벌였고, 1986년엔 낚시터 환경보호와 낚시인 권익보호, 건전한 낚시문화 계몽을 취지로 ‘한국낚시진흥회’를 설립하였다. 전국의 낚시명사 61명의 발기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창립총회가 열렸고 2년5개월 후에 체육부 산하 사단법인체로 등록하였다. (사)한국낚시진흥회는 1996년 한강환경관리청과 낚시터 환경오염 합동단속을 벌인 바 있고 97년엔 낚시면허제 실시에 대한 반대의사를 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작고하기 7년 전, 낚시춘추 창간 40주년 인터뷰에서 한형주 박사는 평생 낚시전도사로 살아온 소회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낚시로 인해서 행복이 뭔지를 알았다. 나에겐 북녘 고향에 부모형제를 두고 열여덟에 삼팔선을 넘어온 뒤로 60년 넘게 망향에 사무친 아픈 세월이 있었지만 낚시가 있었기에 고비마다 별 탈 없이 살아왔다. 내 삶의 버팀목이 되어준 낚시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유년의 꿈이 서린 신고산 시절
일제강점기인 1928년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 의사 한병만(韓秉萬)과 이시돌(李時突)의 3남2녀 중 2남으로 한형주가 태어났다. 함경도 공의(公醫)였던 아버지는 자주 전근을 다녔고 한형주는 신고산, 차호를 거쳐 함흥으로 전학했다. 연극과 미술, 음악을 사랑한 활달한 소년 한형주는 함흥 금정소학교 6학년 때 전교생을 망라한 아동극의 주인공을 맡았다. 그러나 함흥의 도시아이들 속에서 난생 처음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도시에서는 학과의 진도가 시골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더구나 도시 아이들은 까지고 어수룩한 데가 없고 냉랭하여 친근감이 전혀 가지 않아서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다.”
한형주의 인성을 길러준 곳은 함흥이 아니라 차호와 신고산이었다.     
“나의 낚시는 유치원 다니던 시절인 신고산(新高山)에서 시작되었다. 낚시를 즐기시던 할아버지 꽁무니에 매달려 신고산 들판에 널려 있는 개울이나 저수지 또는 웅덩이를 누비고 다녔다. 그 시절, 봄날의 낚시터에서 듣던 종달새 노래 소리,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흰구름, 개울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가까스로 잡았던 고무신 속의 송사리 한 마리, 낚시 가던 길가에서 반겨주던 이름 모를 들꽃들,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나의 신고산 시절의 정서의 교본들이다.” 
한형주는 3·1 만세운동 때 대학생으로 군중행렬을 이끌다 옥고를 치른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민족의식이 남달랐다. 함남공립중학교(咸興高普) 3학년 때인 1943년 전쟁물자 마련을 위한 근로 사역에 동원된 선덕비행장에서 학우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쳐 주고 그 일로 함흥도청 고등계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한 박사는 이 사건을 ‘내 인생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공포였다’고 회고했다.) 함흥공의로 있던 부친이 손을 써서 불구가 되는 것은 간신히 막았으나 이후 고등계 형사의 감시에 시달리며 중국으로 도피할 생각마저 했다.  
18세 되던 1945년 3월에 함남중학교 4학년을 졸업한 한형주는 4월에 함흥 신흥정공립소학교의 촉탁교사로 취직하고 8월 15일 해방의 감격을 맞이했다. 그리고 가업을 이어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학교에 사표를 낸 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중학교 동기 두 명과 함께 큰 짐보따리를 하나씩 메고 삼팔선을 넘었다. 부모형제들과 가까운 시일 내에 서울에서 상봉하기로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194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예과에 입학하고 48년에 의과대학 학부에 진학했다. 가정교사, 자취, 하숙생활을 전전하는 고학생이었지만 타고난 끼를 주체할 수 없어서 연극부원이 되어 대학연극대회에 <베니스의 상인>의 밧사니오 역으로 시민회관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때 서울대 연극부 감독이 후일 영화 <하녀>, <현해탄은 알고 있다>를 제작한 김기영이었다. 

 

전쟁과 사랑
의대 3학년 때인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한형주는 가정교사를 하던 집의 식구를 따라 양수리 근방 섬으로 피난 갔다가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가는 서울대학병원을 따라 새로 창설된 36육군병원의 하사관으로 입대했다. 군에서 숙식을 하며 나머지 의과대학 과정을 이수한 뒤 52년 4월 서울의대 학부를 졸업하고 9월에 육군 군위관 중위로 임관되었다. 
6.25는 한민족 모두의 고난이었지만 가족도 없는 고아와도 같았던 한형주에겐 더욱 혹독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꽃피었다. 피란지 부산에서 역시 피란을 내려온 일생의 반려자 김명희(金明姬)씨를 만나게 된다.
“그때 나는 전시연합대학 가교사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임관되었고 아내도 그곳에서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부산 남성여고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에 내 중학교 동기생이 결혼을 해서 내가 신랑의 들러리를 서게 됐는데 그때 신부의 들러리를 서게 된 것이 아내였다. 그렇게 만나 부산에서 연애를 하다가 12월에 중공군과 대치 중인 중부전선 6사단에 전속 명령을 받았다. 부산역에서 헤어지고 전선으로 향하는데 그 서글픈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형주가 배치된 강원도 금성·김화지구 6사단은 매일 밤 백병전이 벌어지는 최전방이었다. “내가 겪었던 전쟁은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엄청난 충격이어서 나는 나의 수필에서도 아직 다루지 못했다”고 한형주 박사는 회고했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 있던 그에게 뜻밖의 구원이 찾아왔다.
“전방 사단 연대의 의무대장으로 매일 밤 야습해오는 중공군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갑자기 서울의 수도육군병원으로 전속명령을 받았다. 그곳에 신설된 정신신경과 교육대에 입대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지원도 하지 않았는데 내 전공과는 상관도 없는 정신신경과 교육대라니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대학 은사인 유석진 선생님께서 나를 포탄이 떨어지는 곳에서 빼내고자 배려해주신 것이었다. 나는 피를 보는 것이 지겨워서 외과의가 되는 것을 포기했는데 그처럼 생각지도 않은 계기로 신경과 전문의가 되어 수많은 환자를 치료했으니 참으로 운이 좋았다.” 

 

낚시꾼 한 대위와 한양낚시회 시절
전쟁은 끝났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상처만 남은 땅에서 사람들은 다시 삶을 시작했고, 한형주는 결혼을 했다. 마침내 남한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든 것이다. 이후 논산훈련소, 양수리 후송병원, 원주 1군사령부에서 복무한 10년 동안 한형주는 신혼의 행복을 누리고 오래도록 잊고 있던 낚시의 열정에 빠져들게 된다. 특히 북한강을 낀 양수리 육군병원 군의관 시절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낚시에 심취한 기간이었다. 병원 일과가 끝나면 선배 군의관과 함께 용못으로 가서 해가 질 때까지 낚시를 즐기고, 집에 돌아와 자고(그때는 밤에는 붕어가 안 낚이는 것으로 알았다.) 다음날 새벽 또 낚시를 하고 출근하였다. 그때만 해도 외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용못에서 월척을 하도 많이 낚아 양수리 주민들은 ‘낚시꾼 한 대위’라고 불렀다. 그때 양수리 철다리못에서 만난 서울 한양낚시회 회원 양석모씨의 권유로 한양낚시회의 주말출조에 참가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23년간 한양낚시회에서 ‘낚시 황금기’를 보내게 되었다.
1960년 2월 육군에서 제대한 한형주 박사는 10월에 서울 신설동에 개인병원을 개업했다. 내과와 신경과를 함께 진료한 한 박사는 타고난 다정다감과 신실함으로 환자들을 치료했다. ‘한형주의원’은 곧 환자들이 줄을 잇는 병원이 되었다. 그렇게 10년간 병원을 운영하며 얻은 경제적 여유를 토대로 한양낚시회 회장직을 의욕적으로 수행하고 나아가 월간 낚시춘추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나의 영원한 보람, 낚시춘추 6년 6개월” 
“70년 겨울에, 그때는 얼음낚시를 모르던 시절이라 맘에도 내키지 않는 사냥에 손을 대고 있는데 평화낚시회 신영보 회장이 홍순일이라는 20대의 젊은 기자와 함께 찾아와서 낚시월간지 발행을 권유했다. 너무 갑작스런 이야기여서 일단 거절했지만 사실 한양낚시회 회장을 맡고 있던 나로서도 낚시터에 대한 정보가 늘 목말랐다. 누가 어디 가서 많이 낚았다더라 허풍을 떨면 그 말만 믿고 갔다가 허탕치고 맥 풀리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나의 마음속에는 ‘우리나라에 낚시터지도가 있으면 얼마나 편리할까’ 하는 막연한 소망 같은 것이 있었다.”
낚시잡지 창간 제의를 받았다고 주변에 이야기하자 주변 조우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결국 71년 3월 낚시춘추가 창간했다. 편집실은 한 박사의 병원 3층이었다.
그해 1월 창간호 첫 취재를 나갔다. 당시 용산낚시회장으로 있던 지도계의 원로 박종하(朴鐘夏) 선생, 홍순일 편집부장, 한양낚시회 총무였던 송소석 선생, 김동운 사진기자가 한형주 박사의 승용차를 타고 무작정 호남으로 갔다. 가다가 전주 삼례에 있는 주교저수지가 좋아 보여 낚싯대를 폈고 무넘기 너머 ‘목간통’에서 자잘한 붕어 수십 마리를 낚아서 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낚시춘추 창간호 표지에 나온 붕어들이다.
낚시춘추가 발행되면서 충청 이남의 낚시터들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그 전까지 서울꾼들의 출조지는 경기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수원까지 가는데도 비포장길로 2~3시간 걸리던 시절이다. 소래지, 청계지, 물왕리지 등이 주로 찾는 낚시터였고 반월지, 신갈지, 고삼지는 원거리 코스였다. 그런 상황에서 갓 개통된 경부·호남고속도로를 따라 발굴 게재한 낚시터 기사는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전국낚시터 일람표가 경기도편을 위시하여 매월 각 도별로 소개되면서 낚시회마다 남쪽지방 원정이 시작되었다.
지상 낚시교실에서는 붕어낚시, 바다낚시, 루어낚시, 견지낚시 등 모든 종류의 낚시에 관한 기법, 장비, 낚시터 등이 토론되고 소개되었다. 낚시에세이, 낚시소설, 낚시만화 등 낚시문화면에서 낚시춘추의 업적은 더욱 눈부셨다. 낚시논설은 낚시인을 대변하여 가슴에 맺혔던 낚시에 관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시원스레 토로할 수 있었다.
또한 낚시춘추는 창간과 동시에 특종을 터뜨렸으니 바로 한 박사가 직접 현장취재하고 기사로 쓴 ‘경기도 고양수로의 붕어 얼음낚시’였다. 그 전에는 얼음 밑에서는 붕어가 낚이지 않는 줄 알고 11월이면 낚싯대를 접었다. 각 낚시회마다 늦가을에 여는 납회는 그 시절 비롯된 풍속이다. 얼음낚시 외에도 밤낚시를 최초로 보도하여 붕어낚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보트낚시, 수초낚시 같은 신기법의 보급에 앞장섰고 바다낚시터까지 개척했다.
그러나 낚시춘추는 좀체 흑자가 나지 않았다. 낚시인구가 아직 많지 않았고 광고 수입도 거의 없었다. 창간부터 6년 6개월간 줄곧 적자운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낚시춘추에서 손을 떼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다가왔다. 세무당국이 낚시춘추사에 세금을 부과하면서 광고수입만 따로 병원 수입에 합산시켜 종합소득세로 부과한 것이었다.
“낚시인들을 위한 문화사업이라 생각하고 적자도 감수해온 나의 순수한 의지를 전혀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낚시춘추가 문제가 아니라 병원 운영이 위협을 받겠다 싶어서 주변에 인수자가 나서면 넘겨야겠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던 차에 정효섭씨가 나를 찾아왔다. 첫인상이 맘에 들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니 믿음이 갔다. 말을 나눠보니까 이 사람이면 낚시춘추를 살리겠다 싶어서 그 자리에서 잡지를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1977년 한형주 박사로부터 낚시춘추를 인계받은 정효섭 다락원 회장은 대한일보 기자 출신으로 독서신문 편집장을 지낸 출판전문인이었다. 새 발행인을 만난 낚시춘추는 지면이 정비되고 광고와 영업도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잡지 판매량이 증가하면서 수 년 내에 흑자로 돌아섰다. 이후 낚시춘추는 한국 낚시중흥기인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최대의 낚시잡지로 성장하였다. 

 

새로운 소명, 낚시단체의 설립
낚시잡지 운영의 부담을 덜어낸 한형주 박사는 낚시인들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그것은 낚시인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낚시인의 권익을 보호할 낚시단체의 창설이었다.
그 출발점은 전국에 있는 낚시춘추 필진들의 친목모임이었다. 1980년 2월 4일 한 박사를 구심점으로 모인 29명의 낚시문필가들은 ‘한국낚시펜클럽(KAPC)’을 창립하고 1982년 7월부터 83년 2월까지 전국낚시연합회, 부산낚시연합회, 낚시춘추와 공동으로 큰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것은 ‘통일된 낚시용어 제정’이었다. 우리나라는 36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은 후 일본어가 일상적 생활용어처럼 사용되고 있었고, 낚시용어도 상당부분 일본어가 차용되고 있었다. 그밖에도 영어, 비속어, 사투리 등의 용어가 낚시에 사용되고 있던 것을 국어순화 측면에서 제정 또는 통일하는 작업을 벌여 330개의 낚시용어를 확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330개 낚시용어는 한글학회 허웅 이사장을 통해 국어대사전에 수록되었다. 지금 우리가 표준말로 쓰고 있는 ‘낚싯바늘’ ‘씨알’ ‘찌낚시’ ‘초릿대’ ‘받침대’ 등은 이때 만들어지거나 확정된 용어들이다.
그러나 KAPC는 어디까지나 친목단체였다. 한형주 박사는 80년대 들어 낚시인구가 급증하면서 정부가 보호수면 확대, 낚시면허제 등을 거론하며 낚시를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대정부 교섭 창구로서의 범낚시계 단체 결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86년 9월에 한국낚시펜클럽 멤버를 주축으로 전국 낚시명사 61명을 발기인으로 하여 ‘한국낚시진흥회’를 창립하였다. 한국낚시진흥회 창립총회에서 선출된 임원은 모두 우리나라 낚시계를 대표하는 인물들로서 그 면면은 다음과 같다. 회장:한형주, 부회장:김시철 김인선 안강태, 자문위원:최태호 최신해 최기철 박연희 김한 김사룡 손철 백만기 홍일해 서기원, 이사:곽인송 김근희 김찬식 박영덕 박현재 송소석 심동섭 이일섭 장윤석 장종록 정기조 정태성 정효섭 최운권 추연근 홍성유, 감사:김창락 손팔주.
한국낚시진흥회는 2년 5개월 후 체육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하였고, 한 박사는 법인체 운영기금 5천만원 중 상당액을 사비로 희사하였다. 그리고 1년 후 회장직을 사임하고 본업인 의료와 취미로서의 낚시에만 열중하였다. 한국낚시진흥회는 1987년 정부 관련 부처에 ‘낚시전담부서 신설에 관한 건의문’을 제출하였고, 1989년에는 공청회를 열어 환경 문제에 대한 낚시인의 역할과 올바른 정부 대책을 촉구하고 정부가 추진하려던 낚시면허제에 대한 반대의사를 전달했다.
한형주 박사는 삶의 가장 큰 열정과 돈과 시간을 낚시와 낚시인들을 위해서 썼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부모형제를 두고 온 외로운 실향민이었다. 다들 고향을 찾아가는 추석 명절이면 아산호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달을 보며 망향의 한을 달랬다. 죽기 전에 고향에 가서 낚시를 해보고 싶다던 바람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고인은 늘 “낚시가 있어서 건강과 행복을 놓치지 않았고”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소망을 가질 것을 명심하며 그 희망에서 사는 보람을 느낀다”고 하였다.
한형주 박사가 -나의 낚시관을 대신하여-라는 부제로 쓴 수필 ‘어신을 기다리며’의 한 구절로 행장을 끝맺음한다.
“만약 나에게 낚시가 없었다면 지나온 세월이 삭막하고 지루했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건강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낚시 속에는 무궁한 재미와 즐거움이 있다. 인간 본래의 포획본능을 충족시키는 재미가 있고, 마음속에서 은근히 갈망하는 방랑과 현실도피를 해결하는 즐거움이 있다. 낚시에는 행동의 구속이나 제약을 강요하는 규범 따위가 없어 마음이 편하다. 또 낭비나 사치가 없으니 주위로부터 질시나 배척을 당하는 괴로움도 없고 가책도 느껴지지 않아서 좋다. 더욱이 낚시가 지니는 가장 값진 자산은 대자연과의 만남이고 그 품에 안기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낚시는 곧 우리들이 흠모하고 추구하는 대자연 속에 담긴 맑고 순수한 정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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