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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50주년맞이 연속기획_낚시춘추와 나 낚시춘추는 미지의 붕어를 만나게 해준 보물지도였다
2020년 07월 165 13413

창간 50주년맞이 연속기획
낚시춘추와 나

 

낚시춘추는 미지의 붕어를
만나게 해준 보물지도였다

 

차종환 붕어연구소장

 

 

1960년대 중반의 코흘리개 초등학교 시절, 경기도 화전(지금의 수색)에서 살던 나는 사촌 형의 손에 이끌려 낚시터를 찾은 후 수수깡찌의 찌올림의 신비로움을 알게 됐다. 당시 화전엔 둠벙이 많았고 대나무 낚싯대에 수수깡찌를 달아 붕어를 낚았다.
중학교 학창시절엔 출조 거리가 더 길어졌다. 한강에서 붕어와 끄리를 잡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특히 장마 후에 폭발적으로 고기 쏟아졌고 그 짜릿했던 기억이 평생 낚싯대를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낚시에 빠진 나의 가슴에 누님(차봉연)이 불을 당겨주었다. 중학교 2학년 내 생일에 글라스파이버 낚싯대와 낚시춘추를 선물해준 것이다. 당시에는 풍작, 한작 등 대나무 낚싯대를 주로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누님이 선물해준 오리엔탈 글라스파이버 낚싯대를 받아 쥐고는 뛸 듯이 기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낚시춘추는 그동안 내가 알고 싶었던 낚시 지식들을 모아놓은 낚시 교과서였다. 학교 교과서는 밀쳐 두었다. 낚시춘추를 탐독했고 돈이 좀 모이면 서점을 들러 낚시춘추를 구입하곤 했다. 지면에 소개된 화성 화랑농장수로, 안양 물왕리지, 수원 방농장지 등을 찾아 다녔다. 서울 시내의 웬만한 낚시터는 튼튼한 두 다리로 걸어서 다녔다. 한번은 서울 독산동에서 팔당댐까지 온종일 걸어서 간 적이 있었는데 친구들이 지금도 무모했던 당시 조행을 이야기하곤 한다. 

 

 

 

▲2018년 제천 오미지에 낚은 44cm 붕어를 들어 보이는 필자.

 


생일선물로 받은 글라스파이버 낚싯대와 낚시춘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수도권의 낚시터는 성이 차지 않았다. 충남 서천 배다리지를 가고 싶었는데 가는 교통편이 열악해서 고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통행금지가 있었던 당시에 고등학생이 하루 만에 충남 서천을 다녀오기란 쉽지 않았다. 새벽 첫 시내버스를 타고 시외버스를 갈아탄 뒤 천리행군을 하듯 걸어서 원정낚시를 다녀왔다. 이 모습을 본 부모님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낚싯대와 낚시춘추를 모두 불태워 버리셨다.
대학 진학을 걱정하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지금은 이해하지만, 당시 낚시용품을 몽땅 잃어버린 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한동안 낙담했다. 낚시 생각은 더욱 간절해졌다. 학교수업을 받으면서도 온통 낚시 생각뿐이었다. 다시 낚시를 가기 위해 1년을 준비했다. 명절 때 받은 세뱃돈과 용돈을 틈틈이 모아 낚시 도구를 샀고 헌책방에서 낚시춘추를 찾아 다녔다. 부모님의 걱정과 달리 낚시를 열심히 다니면서도 학업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했고 대학에 진학했다.
그 뒤 낚시는 나에게 더 특별하게 자리 잡았지만 예전처럼 낚시춘추를 찾아보지는 못했다. 아니 그럴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다. 군 제대 후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의 나이에 이르는 80년대는 격정의 시대였다. 힘들 때마다 나에게 안식처를 제공해준 것은 낚시였다.
30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을 했다.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이 나던 90년대 초엔 1년 중 300일 이상을 낚시를 다녔다. 강원도의 깊숙한 댐 골자리부터 남도의 작은 소류지까지 가리지 않았다.       

 

 

 

▲94년 12월호에 실린 필자의 사진. 소양호 큰산막골에서 붕어를 끌어내고 있는 모습을 낚시춘추의 고 양명윤 기자가 카메라에 담았다.

▲낚시춘추에 처음 실린 필자의 원고. 95년 1월호로서 겨울 지렁이 활용술에 대해 썼다.

▲95년 초 난생처음 받은 낚시춘추 원고료. 1만5천원 우체국 소액환으로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94년, 고 양명윤 기자와의 만남으로 다시 시작된 인연
그러던 중 1994년 10월 낚시춘추와 다시 인연을 맺게 된다. 이번엔 독자가 아닌 필자로 만났다. 소양호 큰산막골에서 장박 대물낚시를 하던 중 지금은 작고한 낚시춘추의 양명윤 기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양명윤 기자가 나의 파이팅 모습을 촬영했고 그 사진이 낚시춘추 1994년 12월호에 실렸다.
한 달 뒤 1995년 1월호엔 양 기자의 청탁으로 원고를 기고했다. ‘검붉은색의 힘 좋은 지렁이 환대 옆을 허리꿰기로 꿴다’라는 제목의 겨울 지렁이 활용술에 대한 원고였는데 낚시춘추에서 1만5천원의 원고료를 우체국 소액환으로 보내주었다. 내가 필자로서 처음으로 받은 원고료로 지금도 그 우체국 소액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필진으로 이어진 낚시춘추와의 인연은 나에게 낚시에 대한 학구열을 불러 일으켰다. 좀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낚시를 공부하고 싶어 한국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의 육수학(陸水學)과 기상학 교재를 구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이어질 것 같던 필자의 인연은 양명윤 기자가 타 부서로 옮기면서 끊기게 됐다. 내 일상에도 변화가 있었다. 스카이다이빙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고도 1만2천피트(3.6km)에서 떨어질 때 느끼는 극도의 스피드가 나의 마음을 앗아갔다. 스카이다이빙은 그 뒤 낚시와 함께 나와 떼래야 뗄 수 없는 취미가 되었고 나중엔 직업으로 삼기도 했다.     

 

2002년부터 연재 통해 대물 붕어낚시 이론 확립 
나는 2002년 7월호부터 2005년 12월호까지 ‘차종환의 4짜 산지 탐험’, ‘차종환의 실전 붕어 대물낚시’, ‘차종환의 붕어 탐구’라는 제목으로 3년 넘게 낚시춘추에 연재를 했다. 연재를 통해 베일에 가려 있던 대물 붕어의 실체를 밝히는 데 온힘을 쏟았다.
연재를 시작하기 전 2000년 3월에 국내에선 처음으로 붕어연구소를 개설했다. 이렇듯 붕어와 붕어낚시 연구에 매진한 이유는 붕어낚시인으로서 붕어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을 확립하고 싶은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열심히 낚시를 다니고 또 공부한 시기였다. 
나는 96년부터 충북 음성 원남지에서 새우낚시를 즐겼다. 당시 원남지는 떡밥낚시터로 알려져 있었다. 경북 지역에서 배운 새우낚시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실제로 시도해 4짜 붕어를 낚고는, 붕어와 붕어낚시에 대해 연구해야 할 것이 많구나 생각했다. 이때 인연을 맺은 낚시인들이 나중에 낚시 연구에 큰 힘이 되었다. 바로 2000년에 결성한 전국대물실사팀원들로서 그들이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조황 정보와 붕어의 생태, 탐사낚시 결과가 고스란히 내 연재 원고에 실렸고 이를 통해 붕어 대물낚시 이론의 틀과 체계를 잡을 수 있었다.
전국을 무대로 삼삼오오 나뉘어 시도한 팀원들의 개척낚시는 적지에 침투하는 특수요원을 능가할 정도의 정신력과 체력을 요구했다. 눈보라 속에서 일궈낸 신안 하의도의 월척 사태, 무안 선도 매계지의 겨울 떼 4짜 출현, 해남 산수지의 4짜 후반 대물 확인 등 이들과 보낸 시간이 행복하기만 했다. 그 기록이 낚시춘추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02년 출간한 「실전! 대물 붕어낚시」

 

 

「실전! 대물 붕어낚시」 출간
2002년은 내 인생에서 특별한 한 해였다. 낚시춘추의 제안을 받고 쓰기 시작한 붕어 대물낚시 원고가 책으로 엮이어 출간됐기 때문이다. 「실전! 대물 붕어낚시」가 그것이다. 나는 낚시춘추 편집부로터 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고는 머리를 깎고 연구소에 칩거하며 3개월간 원고만 썼다. 낚시춘추 원고 연재와 편집부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평소 연구해보고 싶었던 붕어의 생태나 시도해보고 싶었던 낚시 방법은 낚시춘추 연재를 통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고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이 책엔 나의 대물낚시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대물낚시는 자연과의 싸움이고 그 때문에 밑밥을 사용하지 않는 1대1의 승부여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자연이나 다른 낚시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승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연을 상태로 깔끔하고 정정당당한 승부인 것이다. 요행이 아니라 대물 붕어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습성과 현장 상황의 함수 관계를 찾아내는 차별화된 낚시를 추구하는 나의 낚시 철학이 녹아 있다. 기존의 어느 책보다도 현장 경험을 충실히 반영했다고 자부하는데 그 토대엔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대물실사팀이 있었다.
지면을 통해 당시 활동했던 전국대물실사팀원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작고하신 황광인 고문님을 비롯해 강신문, 오성근, 성낙희, 권태일, 안해운, 김석현, 한기석, 배종환, 김재영, 김대환, 장기영, 박명중, 강상우, 박준섭, 윤성진, 정의석, 임현종, 김진우, 홍경필, 김석원, 강병오, 김길호, 김기용, 김기태, 김석연, 김태욱 씨이다. 

 

 

 

▲09년 1월 낚시춘추 창간 38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시도한 플래그점프. 09년 3월호 표지를 장식했다.

 

 

낚시춘추 38주년 축하 플래그점프를 뛰다
책을 출간하고 나서 더욱 붕어와 붕어낚시 연구에 더 매진하게 됐다. 2004년 9월 충주 탄금호변에 붕어연구소 부설 붕어생태시험장을 개설했다. 갈수록 붕어 자원이 줄어들고 있어 늦기 전에 혈통이 좋은 우리 토종붕어들을 골라서 키우겠다는 포부였다. 붕어생태시험장에서 진행된 연구 결과들이 당시 낚시춘추에 연재했던 ‘차종환의 붕어 탐구’에 소개됐다.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다(2005년 1월호)’를 통해 같은 생육 조건이라도 더 크게 자라는 붕어 종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겨울 붕어, 알만 들어 있을까(2005년 3월호)?’에선 비대한 남녘 붕어의 몸체엔 알보다 비계가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해부를 통해 보여주기도 했다. 또 ‘조기 산란처일수록 대물 많다(2005년 4월호)’를 통해 일찍 산란에 들어가는 붕어일수록 대물 확률이 높다는 것을 실제 사례를 수집해 보여주었다.
연재 기사를 통해 토종붕어를 연구하고 지키려는 나의 노력을 지지해주는 분들이 많았다. 나를 붕어 대물낚시 전문가에서 붕어 전문가로도 인정해주었다. 낚시춘추 필자이자 어류 전문가로 자주 연락했던 명정구 박사님도 그 중 한 분이었다. 
나는 낚시춘추를 통해 이루려고 했던 붕어 대물낚시와 붕어 연구의 뜻을 어느 정도 이루었다. 그 보답으로 낚시춘추가 창간 38주년을 맞는 2009년 3월호을 맞아 따로 준비한 게 있었다. 낚시춘추 창간 38주년을 기념하여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플래그점프가 그것이다. ‘낚시춘추 38’이 새겨진 플래카드를 들고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것이다. 2천만원을 들여 호주로 해외전지훈련을 나가 항공기를 전세로 계약하고 플래그점프를 시도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하늘에서 낚시춘추를 알리고 싶었던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플래그점프는 상당히 위험하다. 만에 하나 조금만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스카이다이빙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특수부대원을 제외하고는 금지할 정도이다. 당시의 플래그점프 사진이 낚시춘추 표지를 장식했다. 낚시춘추 고 정효섭 사장님이 이 표지 사진을 보고 크게 감동하셨다는 얘기도 들었다.

 

 

 

▲필자가 낚시춘추 편집실에서 붕어를 감정하기 위해 해부와 검시를 하고 있다.

 

 

필자로 활동한 매체는 낚시춘추뿐  
나는 현재 충남 보령에 거주하고 있다. 2011년 국토해양부 주최 국제레저항공전에서 고공낙하 시범을 보이다가 낙하산 기능 이상으로 추락하는 큰 사고를 당했는데 팔다리는 물론 척추, 어깨, 가슴까지 부서져 네 차례의 대수술을 받고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났다. 그 뒤로 오랜 기간 재활을 거쳐 지금은 스카이다이빙 학교를 직접 운영하며 틈틈이 낚시를 즐길 정도로 회복된 상태다.    
몸을 크게 다친 후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붕어연구소장이라는 직함은 여전히 갖고 있고 간간이 낚시춘추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기고를 하고 있다. 하늘이 나에게 낚시를 계속 다니라고 보살펴준 덕이다.
얼마 전 후배들이 모여서 자발적으로 대물실사팀을 조직해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흐뭇했다. 남녘으로 내려가 만난 후배들이 간혹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한다. 후배들은 나를 대장님이라고 부른다. “대장님은 낚시춘추에만 등장하셨는데 방송 활동을 하셨으면 더 유명해졌을 텐데요.”
나는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극히 꺼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매체에 몇 번 얼굴을 비치긴 했지만 원고를 쓰고 카메라에 모습을 드러낸 활자매체는 낚시춘추뿐이다. 나에게 낚시춘추는 닮은 데가 많다. 내년에 창간 50주년을 맞는 낚시춘추는 낚시 미디어 중 최고다. 나는 항상 최고가 되고 싶어 했다. 흔들리지 않고 반백년을 걸어온 뚝심도 내가 으뜸으로 치는 덕목이다. 
나는 믿음을 주고 마음을 준 사람에게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야인으로 평생 살아왔다. 수수깡찌의 찌올림이 마냥 좋았던 중학생 시절, 내 마음을 앗아간 낚시춘추는 미지의 붕어를 만나게 해주는 보물지도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매달 낚시춘추가 발간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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