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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弔 낚시를 사랑한 지조의 정치인 예춘호 선생 타계
2020년 09월 373 13591

謹弔

 

낚시를 사랑한 
지조의 정치인 예춘호 선생 타계

 

서성모 편집장

 

▲우리나라 정치 발전과 민주화에 헌신한 예춘호 선생. 2011년 2월, 낚시춘추 창간 40주년 기념 인터뷰 당시의 모습이다.

3선 국회의원을 지낸 목촌(牧村) 예춘호(芮春浩) 선생이 지난 7월 22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1927년 부산 영도에서 태어난 선생은 6대, 7대, 10대 국회의원으로 격동기의 정치사 중심에서 유신정권과 군부정권에 맞섰고 한국의 정치 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앞장섰다. 69년 유신정권의 3선 개헌을 반대해 공화당에서 제명되었고 80년 신군부가 조작한 내란음모죄로 인해 2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84년엔 민주화추진협회의 부의장을 맡아 민주 진영의 대선 승리를 위해 힘썼다.
예춘호 선생은 故 이재학 국회부의장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낚시를 사랑한 정치인이다. 고난과 좌절의 정치 행로 속에서도 손에서 낚싯대를 놓지 않았다. 60년대 공화당 시절엔 우리나라 낚시의 정신적 지주 이재학 국회부의장과 함께 낚시를 즐겼다. 80년대 군부정권 하에선 낚시가 마음의 안식처가 돼주었다. 즐거웠던 낚시를 떠올리며 참혹한 폭압을 버텼다. 80년대 말 정계를 떠나서는 평소 하고 싶던 낚시를 즐기며 낚시인과 어울렸다. 낚시서적을 여러 권 내고 낚시춘추에 기고를 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낚시인을 만날 때엔 격의가 없고 소탈했으며 낚시에 있어서는 겸손하고 열정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따르고 마음의 스승으로 모셨다.              

 

 

▲71년 11월 8일, 제주 차귀도에서 7.5kg짜리 혹돔을 낚은 이재학 국회부의장(좌)과 예춘호 선생. 

▲64년 박정희 대통령의 각 부서 연도순시 현장. 예춘호 선생(사진 중앙)이 공화당 사무총장으로 있을 때다.

 

유신정권 3선 개헌 반대로 공화당에서 제명
부산 동아대 경제학과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대학원을 수료하고 1962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예춘호 선생은 63년 부산에서 출마하여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공화당 원내 부총무와 사무총장, 상공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올곧은 성격의 선생은 장기 독재는 부패로 이어질 것이라는 소신 아래 대통령 연임금지 조항을 없애려던 3선 개헌을 앞장서서 반대하다 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당시 정치적 동료이자 친구인 김영삼 총재는 신민당 입당을 간곡히 권유했다. 하지만 선생은 ‘비록 제명되었어도 철새처럼 당적을 바꿀 순 없다’며 고사하였고, 대신 재야인사들의 모임인 국민연합에 가입함으로써 국민연합의 김대중 의장을 돕게 된다. 그로 인해 선생은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많은 지지층을 잃었다.
79년과 80년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격동의 파고가 가장 높았던 시기다.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되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노태우 등 육사 내의 영남 출신 모임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12월 12일 군을 장악했다. 신군부는 임시국회가 개회되는 5월 20일 전에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5.17 쿠데타)를 결정했다. 예상되는 학생 시위에 진압부대를 투입할 계획을 세우고 5월 초부터 20사단 등 군을 서울과 광주, 대전으로 이동시켰다.
80년 봄 신군부의 집권 야심을 눈치 챈 정치권과 학생 운동권에선 5월 초부터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이어갔는데 그 중심에 예춘호 선생이 있었다.


80년 군사정권과 맞서다 내란음모죄로 투옥  
당시 예춘호 선생은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 등과 함께 민주인사들의 서명을 받고 5월 7일 민주 진영의 뜻을 모아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자는 5·7 선언을 이끌어냈다. 이를 계기로 5월 10일엔 서울역 광장에 10만명의 학생들이 모여 전두환 퇴진을 외치는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5월 18일 새벽 국회를 점령한 신군부는 그에 앞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가택연금하고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등 24명을 체포 구금해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바로 김대중 내란음모조작사건으로, 김대중을 북한의 사주를 받아 5·18 광주민화운동을 일으킨 주모자로 지목하고 예춘호 선생 등 재야인사들에게 내란음모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낚시춘추 창간 40주년 인터뷰에서 선생이 들려준 당시 상황은 참혹하기만 하다.
“17일 밤 11시 부산행 막차를 타고 새벽에 부산역에 내렸는데 평소 같으면 마중을 나와야 할 사람들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때 낯선 장정 20여 명이 일제히 달려들어 나를 자동차에 끌어다 넣었어요. 비행기를 탄 뒤에야 그곳이 김해비행장임을 알았고 서울에 닿자 눈이 가려진 채 어떤 건물로 끌려 들어갔어요. 눈을 떠보니 창문 하나 없는 흰색 방이었는데 잠시 후 키가 자그마한 녀석이 들어오더니 ‘이 새끼 옷을 벗겨서 꿇어앉혀’하고 소리를 쳐요. 내가 고함을 치고 옷을 벗지 않으려고 버티자 의자에 앉은 내 얼굴을 발로 걷어차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그때부터 묵비권을 행사하며 식음을 거절하다 탈진해버렸습니다. 그때서야 그놈들도 몹시 당황하는 것 같았어요. 연행된 지 20일쯤 조서와 진술서를 끝내더니 나머지 30여 일을 의견서 작성에 시간을 보냅디다. 보니까 김대중, 문익환, 이문영과 나를 내란음모 괴수로 정해 서류를 꾸미는데, 각자의 진술이 다르니까 때리고 위협해서 끼워 맞추는 거예요. 20여 명의 말을 맞추어 꾸며대자니 그들 조사관도 할 짓이 아닌 듯 그들 입에서도 나중에는 불평과 욕설이 터져 나오고 있었어요. 30일간 공소장을 수없이 고쳐 쓰는데 온갖 고문을 당하며 억지장단을 맞춰준다는 건 정말 사람으로선 못 견딜 일이었지. 오죽하면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치우고 빨리 끝내달라고 했을까.”

 

 

▲69년 3선 개헌안 토론 종결일 당시 신민당 김영삼 원내총무와 숙의 중인 예춘호 선생.

▲97년 강릉 북동계곡에서 무지개송어를 낚은 예춘호 선생.

▲07년 임진강 견지낚시 중 물가에서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예춘호 선생.


이재학 국회부의장과 낚시
선생은 12년형을 선고 받았지만 2년 만에 옥에서 나오게 된다. 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을 결성하고 부의장이 된 선생은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통해 민주진영의 대선 승리를 이루려 분투했으나, 결국 양김의 결별로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좌절과 배신이 함께한 순간이었다. 87년엔 조순형, 제정구 의원과 함께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하고 상임대표를 맡았으나 그해 4월에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지도부가 낙선하는 등 원내교두보 확보에 실패하자 정계를 떠났다.
이러한 격동의 정치사 속에서도 예춘호 선생이 손에 놓지 않은 것은 낚싯대였다. 본격적인 낚시와의 인연은 이재학 국회부의장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됐다.
“고향이 영도라서 어릴 때부터 바다낚시를 했지요. 옷을 벗어 머리에 묶고 헤엄을 쳐서 영도 동쪽 긴 방파제까지 건너가면 해조류 사이에서 노래미가 많이 낚였어요. 그때는 부산 앞바다에 고기가 참 많았어요. 그러나 본격적으로 낚시를 시작한 것은 돌아가신 동은(東恩) 이재학(李在學) 국회부의장을 만나고부터이지요. 국회에 들어오기 전 이영언 의원의 권유로 부산지역사회개발위원장을 맡게 되었을 때 이재학 선생을 처음 뵈었는데, 선생은 어렵고 짜증스런 세상사 잊는 데는 낚시만한 것이 없다며 내게 낚시를 권하셨어요. 그래서 선생을 따라 태종대 앞바다에 배낚시를 따라나섰지요. 그 후 선생과 함께 제주도로 돌돔도 낚으러 가고, 소양강(소양호가 생기기 전이었다)에 쏘가리낚시도 갔어요. 선생은 특히 바다낚시를 즐겨서 바다낚시구락부라는 단체도 만들었고 우리나라에도 일본낚시진흥회처럼 명망 있는 낚시인들이 모인 낚시단체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우리나라 낚시계를 위해 큰일을 하셨을 텐데….”    
정치무대에서 은퇴한 뒤 예춘호 선생은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이사장, 재단법인 영도육영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평소 즐기고 싶었던 낚시를 마음껏 다녔다. 선생은 평소 낚시에는 등급이 없고 자신이 흥미를 느낄 수 있다면 고루 즐기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낚시를 즐기는 데 있어 바다낚시, 붕어낚시, 계류낚시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또 하고 싶은 낚시가 있으면 배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견지낚시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선생은 지인을 통해 전문가를 만나 배우기를 청했는데 그렇게 해서 만난 낚시인이 한국견지낚시협회 조상훈 전 회장이다. 조상훈 씨와 매년 전국의 여울을 찾았다.        

 

낚시후학 교육과 집필에도 힘써
예춘호 선생은 낚시후학에 대한 교육과 집필에도 애정을 쏟았다. 93년부터 95년까지 낚시춘추에 ‘예춘호 낚시학당’을 장기 연재하였고, <낚시하는 마음>, <바람을 잡고 고기를 낚고>,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 등과 같은 낚시수상집을 저술했다.
예춘호 선생은 가난하고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우리나라 정치 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다. 격동기에서 힘든 고비마다 낚시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풍상이 따르기 마련이죠. 이런 저런 곤욕을 치르다 울적할 땐 훌쩍 나서던 낚시가 지금은 유일한 취미가 되었습니다. 내가 육군교도소에서 긴 고문의 후유증으로 통증에 시달리고 한 치 앞도 점칠 수 없는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지난 즐거웠던 낚시를 추상하면 얼마간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공판이 시작되고부터는 차입이 가능해졌는데 그때 내가 넣어달라고 당부한 것이 낚시춘추와 낚시수상집이었어요. 다른 글은 읽어나가다가도 어느 사이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자리해버리곤 했는데 낚시 책만은 그저 부담 없이 즐겁게 읽는 시간을 이어주었습니다. 생지옥 같은 고문과 죽음이 절박해 있는 정적 속에서 내가 꼭 살아서 나가야 할 낙원을 떠올리자 그게 낚시터였어요.”
예춘호 선생이 가장 좋아하는 낚시터는 섬진강이라고 한다. 조상훈 씨는 3년 전 차에 선생을 태우고 여울을 둘러봤는데 그게 선생 생전의 마지막 섬진강 조행이 됐다. 선생의 유족으로 부인 황치애 씨와 예종석(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한양대 명예교수), 예종홍(국민대 교수), 예종영(전 가톨릭대 연구교수), 딸 예종옥, 예지숙 씨 3남 2녀가 있다. 

 


추모사

 

선생님
그곳에선 ‘큰 낚시’  원 없이 하소서

 

조상훈 한국견지낚시협회 전 회장

 

 

▲90년대 중반 한강 팔당의 견짓배에 예춘호 선생님을 모시고.

 

89년 봄, 한강 팔당에서 예춘호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떠오릅니다. 언어문화사 이동명 대표가 여울견지를 배우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시다며 소개해주신 분이 선생님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지조와 신의를 지키며 격동기의 정치사를 이끌었던 선생님을 평소 존경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분을 직접 뵙다니, 더군다나 낚시를 좋아하신다니.
정치인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요? 한편으론 어려워하는 저를 선생님은 격의 없이 대해주셨습니다. 소탈하시고 겸손하신 성품을 접하고는 더한 흠모의 마음을 품게 됐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해습니다. ‘이 분을 인생의 스승이자 어르신으로 모시고 평생 함께해야겠다’고. 그렇게 해서 시작된 조행이 30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선생님은 낚시에 대해서는 언제나 배우려는 학구열이 넘쳐나셨고 낚시인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선 스스럼 없이 어울리셨습니다. 첫 여울견지를 했던 홍천강에서 누치를 낚고 어린아이처럼 맑은 미소를 띤 선생님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많은 낚시터를 다녔습니다. 아니 선생님은 많은 낚시를 즐기셨습니다. 선생님은 평소 낚시에 등급을 매기지 않고 자신이 흥미를 느낄 수 있다면 고루 즐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충주호에서 붕어를 낚으며 밤을 새웠고 강릉 북동계곡에선 송어를 쫓으며 계곡을 오르내리셨습니다.
여울에 수장대 박아 놓고 둘러앉은 강변에선 참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부산이 고향이신 선생님은 막장대 하나에 지렁이 한 통만 들고 가면 실컷 바닷고기를 낚을 수 있었던 영도 앞바다 얘기부터 삽교호에서 떼 붕어 만난 사연, 그리고 전 국회부의장이자 평생 조우였던 고 이재학 선생과 떠났던 관탈도 돌돔낚시까지. 관탈도에서 이재학 선생이 뜰채를 잘못 대 돌돔을 놓친 대목에서 한숨을 쉬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는 ‘천생 낚시꾼이시구나’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은 낚시 장비에 대한 안목도 높으셨습니다. 어떤 낚시건 그 낚시에 깊이 빠져들수록 더 섬세한 기법을 알게 되고 그 기법을 구사할 수 있게 도와주는 고급 낚시도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고 말씀하셨죠. 낚시 장비 애기를 하다 보니 견지낚싯대를 만들기 위해 손수 재료를 구해오셨던 일이 떠오릅니다. 견짓대 재료로는 최고로 쳐주는 탱크 안테나 100개를 직접 사오셨었죠. 그것을 일일이 껍질을 벗기고 칠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그 열성에 놀라고 말았습니다. 
몸이 불편하신 선생님을 섬진강으로 모시고 갔을 때가 3년 전이었습니다. 낚시를 직접 하지는 못하지만 낚시를 하는 것만 봐도 좋을 것 같다고 하시기에, 얼른 몸을 회복하셔서 함께 여울로 들어가자고 위로해 드렸었는데 그것이 선생님과의 마지막 낚시 여정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선생님은 지난날의 조행 중 물고기를 많이 낚은 날의 낚시를 ‘큰 낚시’라고 표현하시곤 했습니다. 군부정권의 폭압 아래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통을 참았는데 그게 바로 낚시였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가슴이 아렸습니다. 정치를 하지 말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 걸 그랬다는 소회 앞에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예춘호 선생님, 그곳에선 마음 가는 대로 낚시 떠나시며 큰 낚시 원 없이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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