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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弔_ 새서울낚시 창업주 원로낚시인 오장규 회장 타계
2020년 12월 232 13884

謹弔

 

새서울낚시 창업주
 
원로낚시인 오장규 회장 타계

 

서성모 편집장

 

서울 건국대병원 장례식장에 안치된 오장규 회장의 영정.


새서울낚시 창업주인 원로 낚시인 오장규(吳章圭) 회장이 지난 10월 21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새서울낚시는 우리나라를 대표한 낚시유통업체로서 오장규 회장은 낚시업계의 조직화와 낚시문화 정착에 앞장선 분이다. 1981년 전국낚시판매자협회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1986년 창립한 한국낚시진흥회의 61명의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해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대나무낚싯대 제조로 업계에 첫발
오장규 회장의 고향은 충남 보령 웅천이다. 아버지를 일찍 떠나보낸 집안은 넉넉하지 못했다고 한다. 6형제 중 막내인 오 회장은 머리가 명석해 형들이 학비를 대주며 끝까지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서울 중앙대에 입학했지만 재학시절 6.25 전쟁이 터지면서 학업의 꿈은 접어야 했다. 고향 웅천으로 내려간 오 회장은 그곳에서 대나무낚싯대를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손재주가 좋은 오 회장은 수년간의 독학만으로 수준 높은 대나무낚싯대를 만들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장남 오종현(현 배스랜드 대표, 한국배스프로협회 회장) 씨의 말이다. 
“아버지는 대나무낚싯대를 매우 아끼셨습니다. 80년대 말일 겁니다.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분이었는데 200년 장인가문의 일본의 명품 대나무낚싯대인 동작(東作)을 여러 점 들고 와서 감정을 의뢰했는데, 아버지는 몇 대손 작품인지, 어느 부위에서 수리를 했는지 정확히 짚어내시더군요. 나중에 아버지가 고향 웅천에서 주작(走作)의 장인인 주정기 씨와 함께 대무낚싯대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됐죠.”
가내수공업 수준의 주작 대나무낚싯대는 1958년 서울의 부호 윤덕기 씨에게 투자를 받으면서 본격 양산 체재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해서 설립된 회사가 동작조구사다. 주정기 씨는 병사로 세상을 떠난 후의 일이다. 동작조구사에서 오 회장이 만든 주작 대나무낚싯대는 70년 일본 오사카 엑스포에 출품돼 금상을 수상할 정도로 기술력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대나무낚싯대의 시대는 글라스로드의 출현으로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새로운 활로를 찾던 오 회장은 74년 오리엔탈상사란 상호의 낚시점을 서울 종로 안국동에 차렸고 이때부터 낚시도매업을 시작했다. 오랜 기간 낚싯대 제조 현장에서 쌓은 경험들이 도매업에서 빛을 발했다. 장비에 대한 높은 안목을 보고 거래를 맡긴 업체들이 늘어났다. 4년 뒤 사세를 확장해 서울 종로3가 피카디리극장 맞은편 대로변으로 낚시점을 옮겼고 상호를 새서울낚시로 바꿨다.

 

낚시산업의 조직화, 낚시문화 발전에 공헌
80년대는 낚시유통업체의 시대였다. 아무리 큰 메이커도 도매점을 통해야 소매점까지 판로가 열렸다. 거래처는 계속 늘어갔고 사업은 번창했다. 제조업체가 서울에서 물건을 팔려면  종로3가 새서울낚시를 거쳐야 했다. 유통하는 품목이 늘어갈수록 만나는 사람도 늘어났다. 오장규 회장은 낚시판매업자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단체 조직에 앞장섰다.  
1981년 창립한 전국낚시판매업자협회의 초대회장을 맡았다. 낚시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생산업자와 판매업자의 긴밀한 유대 관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오 회장은 83년엔 전국조구생산업협회와 전국낚시판매업자협회의 제1회 단합대회를 성사시킨다. 이 행사의 대회장을 오 회장이 맡았다.
오장규 회장 주변엔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배경엔 국내 최대 낚시도매업체란 사업적 관계도 있지만, 사람들의 어려움을 먼저 알고 챙기는 인품의 영향도 컸다. 어렸을 때부터 낚시점에서 아버지를 지켜봐온 오종현 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아버지에겐 규모가 큰 거래처가 많았지만 결제를 할 때는 영세한 납품업자 분들을 먼저 챙기셨습니다. 명절이 되면 은행에서 현금 신권을 찾아와 먼저 전화를 하셨죠. 돈을 준비했으니 받으러 오라고. 영세한 사업장의 형편을 당신도 경험해봐서 너무 잘 알기에 명절 때만큼은 직원들이 기분좋게 월급을 받게 하고싶어 하신 거죠. 저에게는 늘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남에게 베려하며 장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1986년은 우리나라의 낚시정책에 있어 대정부 창구를 맡은 한국낚시진흥회가 창립된 해다. 오 회장은 창립 당시 61명의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해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한국낚시진흥회에서 펼치는 정책과 사업과 관련해 협회와 업계를 잇는 창구 역할을 했으며 지원이 필요할 때엔 재원을 마련했다. 
1978년 문을 연 종로3가의 새서울낚시는 2011년 대로변에서 나와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당시 오 회장은 췌담도암 판정을 받고 큰 수술을 받았다. 규모나 구색에 있어 낚시사랑방으로 줄어든 새서울낚시였지만 오 회장은 이곳에서 시간 보내기를 즐겼다. 좋아하는 서예를 하고 손자를 위해 한문책을 쓰기 시작했다. 수술 휴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된 2015년 고인의 분신과도 같은 새서울낚시의 간판을 내리고 가게를 정리했다. 아들 오종현은 입관할 때 가장 아꼈던 대나무낚싯대를 아버지곁에 두었다고 한다. 남겨진 유족으로는 부인 김예경(金禮經) 여사와 장남 종현 씨, 장녀 현숙, 차녀 현욱 씨를 두었다.   

 

71년 말 낚시춘추 초청 좌담회에서. 좌측이 오장규 회장, 우측이 낚시춘추 창간인 한형주 박사.

80년대 말 서울 종로3가 대로변의 새서울낚시

75년 서울 안국동 오리엔탈공장 직매장 앞. 낚시춘추 애독자사진콘테스트에 협찬한 상품인 오리엔탈 낚싯대를 전달하고 있는 오장규 회장.

원로 낚시인 최운권(좌) 선생과 함께. 낚시춘추가 주최한 학생낚시대회에 내빈으로 참석한 오장규 회장

낚시춘추 87년 2월호에 실린 오장규 회장 인터뷰 기사. 새서울낚시 대표가 아니라 대나무낚싯대  전문가의 면면이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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