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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춘추 창간 40주년 특별 인터뷰-『붕어낚시연구』의 저자 최운권 선생
2011년 05월 4368 1929

 

 

우리나라 최초의 붕어낚시교본, 『붕어낚시연구』의 저자  최운권 선생

 

 

‘낚시의 과학화’에 평생 매진 한국낚시 여명기에 횃불 밝혀


 

ㅣ허만갑 기자ㅣ

 

1971년은 우리나라 낚시간행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로 기록된다. 그 해 2월, 우리나라 최초의 낚시월간지인 「낚시춘추」가 창간했다. 낚시춘추의 창간으로 우리나라는 낚시전문가들이 결집되고 낚시정보 교류의 물길이 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보다 한 달 앞서 또 한 권의 역사적 저작이 탄생했다. 71년 1월에 발간된 국내 최초의 붕어낚시 기법서 「붕어낚시연구」다. 저자는 <월간영어사> 발행인 최운권(崔雲權)씨였다.


 

▲“잘 좀 찍어줘요. 젊어 보이게.” 마음은 언제나 청춘인 최운권 선생은 지금도 낭만 가득한 로맨스 그레이다. 선생이 1971년에 출간한 최초의 붕어낚시 기법서 '붕어낚시연구'는 붕어의 생태와 붕어낚시채비의 과학적 메커니즘을 정립하였다.

 

▲최운권 선생이 저술한 책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낚시춘추」와 「붕어낚시연구」는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 먼저 알아차린 쪽은 낚시춘추를 창간한 한형주 박사였다. 한 박사는 「붕어낚시연구」를 뒤늦게 보고 깜짝 놀라 저자를 수소문했다. 그렇게 해서 71년 초여름, 낚시춘추 편집실에서 한형주, 김경언, 박현재, 최운권, 송소석 등이 만났다. 당대의 낚시계를 주도해나갈 1세대 필진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때까지 각방에서 활동하던 전문 낚시인들이 비로소 한자리에 모이게 됐죠. 비록 그 수는 적었어도 이것이 낚시인 회합의 시초였습니다. 서로 존재조차 모르고 살던 낚시인들이 낚시춘추를 매개체로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최운권 선생은 ‘그때 그 필진들의 만남이 한국 낚시문화 출발의 시금석이었다’고 말했다.
“낚시춘추 창간의 가장 큰 의미는 비로소 낚시인들의 사랑방, 토론장, 터미널, 휴게소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내용이 도출되고 어떤 글들이 잡지에 실렸는지는 부차적 의미지요. 낚시인들이 모여서 생각을 나누고 뜻을 발표할 장을 마련하였다는 게 중요한 것이며, 그로 인해 낚시춘추는 70년대 이후 우리나라 낚시의 구심점이 됩니다. 낚시산업의 발전, 낚시문화의 발전은 그때부터 출발하였어요.”

 

‘왜’ ‘어떻게’를 늘 낚시의 화두로 삼아

4월 4일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에 있는 최운권 선생의 자택을 방문했다. 네 자녀는 모두 결혼 후 분가해 있고 선생은 부인 정금순(丁錦順) 여사와 단둘이 생활하고 있었다. 최운권 선생이 「붕어낚시연구」의 71년 초판본을 들고 나와 보여주었다. 감개가 무량하다. 이 책은 70~80년대에 낚시에 입문한 이들에게 바이블이었다.
최운권 선생은 낚시춘추의 역대 필자 중 최장 최다 기고자이기도 하다. 71년부터 97년까지 27년간 70여 편의 글을 실었다. 그 많은 기사와 저술, 강의를 통해 선생이 일관되게 추구한 바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낚시의 과학화’다. 선생은 낚시를 단순한 취미가 아닌 학문으로 접근했다. 서울대 농과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최운권 선생은 그 외에도 어류학, 물리학, 호소학(湖沼學), 수중미생물학 등 낚시와 관련된 모든 학문을 탐구했다. 영어와 일본어에 능한 선생은 영미와 일본의 낚시관련 자료들을 탐독하여 그것을 우리나라의 붕어낚시에 접목시켰다.

 

- 저도 고등학생 때 선생님이 쓴 「붕어낚시연구」를 읽으며 낚시를 배웠습니다. 낚시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가 거의 없던 당시에 어떻게 그런 책을 쓸 수 있었으며 어떤 동기에서 그 책의 집필을 시작하였습니까?
“나는 늘 붕어가 안 낚이면 왜 낚이지 않는가? 또 붕어가 낚이면 왜 낚이는가? 대체 어떻게 해야 낚이는가? 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냥 많이 낚이면 즐겁고 안 낚이면 한숨짓는 것으로 끝나는 낚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내가 꿈꾼 것은 낚시의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낚시의 과학화였어요. 의문의 제기 없이 경험에만 의존하던 당시의 낚시문화를 바꾸고 싶었던 겁니다. 그것이 「붕어낚시연구」를 출간한 동기였지요.”

생각하는 낚시, 뒤집어 반문하고 그것을 검증하는 것은 선생의 타고난 기질이었다.

“나는 어릴 때 누구에게 낚시를 배운 적이 없어요. 동네 노인들이 낚시하는 게 흥미로워 곁눈질로 익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노인들보다 붕어를 더 많이 낚게 됐어요. 그 비결은 지렁이에 있었죠. 그때 노인들은 지렁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탁탁 쳐서 지렁이를 기절시킨 다음 꿰었는데, 아마 그렇게 하면 지렁이가 꿈틀거리지 않아 바늘에 꿰기 좋아서 그랬나 봐요. 그런데 어린 내 생각에도 비합리적 행위였던 거지. 기절해서 축 늘어진 지렁이보다야 싱싱하게 꿈틀대는 지렁이가 붕어 눈에 더 잘 띌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나는 꿈틀대는 지렁이로 갈아주면서 낚시했고, 그러니까 붕어가 훨씬 잘 낚이더군요.”

 

최운권 선생의 조행은 늘 현장실험이었다. 낚시터에서 품게 된 의문은 집에 돌아와서도 답을 찾고, 나름대로 가설을 정한 뒤 다음 출조에서 그 가설을 검증해보는 식이었다.
‘왜 맑은 물에는 붕어가 적은가?’ ‘물색은 왜 흐려지는가?’ ‘산란하는 붕어는 왜 침수수초보다 꼿꼿한 정수수초대에서 뒤척이는가?’ ‘어떤 낚싯대가 물고기를 제압하는 데 유리한가?’ ‘떡밥은 과연 붕어를 유인하는가?’ ‘물고기는 어떤 방법으로 어두운 물속에서 미끼를 찾아내는가?’
의문은 끝이 없었고 그에 관해 스스로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는 과정은 지난하였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쳐 터득한 지식은 선생의 명쾌한 글을 통해 낚시인들에게 전달되었다. 가령 ‘물고기는 공기를 마시게 하면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낚시인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낚시를 즐기는 데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그러나 최운권 선생은 ‘왜 공기를 마시면 힘을 쓰지 못할까’를 궁금해 했고 끝내 해답을 찾아냈다. “물고기의 아가미를 들춰보면 곱고 붉은 빗살 모양의 새엽이란 조직이 있다. 이는 물고기가 물 속의 용해산소를 취할 수 있도록 돕는 기관이다. 이들은 물 속에서는 상호 간격을 유지하지만 일단 대기에 노출되면 빗살이 서로 엉겨 붙어 호흡 곤란에 빠지게 된다.”(최운권 저 「실전 붕어낚시」에서)

 

- 낚시가 학문이라기보다 오락의 범주에 속하는 것인데 좀 편하게 즐길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꼭 붕어를 낚아야겠다, 낚시기법을 연마해야겠다는 집념이 휴식으로서의 낚시를 방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조과에 초연한 조선 흉내를 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신선인 체 하는 것이 오히려 낚시의 퇴폐주의로 이어질 위험도 있어요. 오늘날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은 고화에 나오는 한가로운 촌로가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고등교육을 받은 계층이 낚시인구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어요. 낚고자 하는 물고기의 생태가 어떤지, 찌의 부력과 봉돌의 중력이 물고기의 취이습성과 어떤 함수관계에 놓여 있는지 모르고 물가에 앉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 생각했어요.”

 

▲1980년대 중반 한국낚시진흥회 회원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최운권 선생이다.

 

평택 한의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서울대 농과대학생으로

 

최운권 선생은 1930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하였다. 올해로 81세. 선생의 모친 오화근(吳和根)은 안성의 명문이었던 오씨 집안의 맏딸로서 당시 개성 호수돈여고를 다니던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부친 최상노(崔尙魯)는 경남 양산군 원동면 배내 골짜기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 동네 글방 훈장에게 한문 몇 줄밖에 배우지 못했던 백면 선비였다. 그렇게 전혀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선생의 부모가 만나서 결혼하게 된 과정이 드라마틱하다.
시골 선비가 산골짝을 탈출해 흘러흘러 당도한 곳이 안성땅이었고 솟을대문 부잣집에 찾아들어 하룻밤 숙식을 구걸했는데, 다음날 아침 밥 몇 끼 얻어먹은 대가로 마당을 쓸다가 마침 방학을 맞아 고향집에 내려와 있던 그 집 딸과 눈이 맞았다는 것이다.

“외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우리 아버지는 절세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미남자였다고 해요.”

 

오씨 집안에서는 야단이 났고, 선생의 부모는 쫓겨나 평택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거기에서 부친은 한방을 공부했고, 모친의 헌신적인 지원에 힘입어 마침내 약재소를 차리고 명의로 이름을 떨쳤다. 그렇게 노력으로 일군 행복 속에서 맏아들 운권을 낳았다.

 

- 와~ 스토리가 완전히 ‘온달과 평강공주’군요.
“나의 모친은 내가 성동소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소.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대청마루에 자리 잡고 내가 그날 배운 교과서의 조목조목을 되새겨 복습을 시켰어요. 그 모습을 지금도 어제의 모습처럼 나는 잊지 못해요. 그때, 그 어머니에게 나는 얼마나 귀엽고 소중한 존재였겠소. 그런 천금같은 자식을 남겨두고 어머니는 감기지 않는 눈을 감으셨던 겁니다.”

 

1944년 평택의 성동국민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당시 시골학생으로서는 하늘의 별따기 격인 서울의 중앙고보에 합격했고,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생물학과에 진학한다. 그러나 그 해 6월 25일 전쟁이 터지면서 환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던 선생의 삶은 예기치 않은 격랑에 휩싸이고 말았다.
북한군은 삽시간에 서울을 넘어 평택까지 들이닥쳤고 한의사인 부친은 반동부르주아로 찍혀 인민재판장에 끌려갔다. 다행히 치안대장이 부친을 뒤로 빼돌려 목숨은 건졌다. 두 달 후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1.4후퇴를 하게 된다. 그때 선생도 제2국민병에 소집되어 전선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혈기가 넘쳤던 청년 최운권은 문경새재를 넘어 대구까지 걸어서 가는 고행의 길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공군에 입대하여 조종사가 되려고 했다. 당시 선생의 학력으로 공군조종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공군 대령으로 있던 외가 아저씨가 “전투기 조종사는 위험해서 안 된다. 네가 죽으면 내가 네 아버지를 어떻게 보겠느냐”며 강제로 사천공군부대의 법무감실로 빼내버렸다.

 

“결과적으로는 그 분이 날 살린 거요. 그때 졸속으로 조종훈련을 받고 무스탕 전투기에 올랐던, 나와 같이 시험을 치른 친구들은 모두 사고로 죽었으니까요.”

 

 

 

▲미국 보스턴에서 대구낚시를 나가기 전 낚싯배 앞에서.

 

- 낚시는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평택이란 지명 자체가 평평할 평(平)에 못 택(澤)자 아닙니까. 어릴 때 집밖에만 나가면 모두 저수지고 수로였어요.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동네 노인들이 낚시하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껴 통대에 무명실을 감아 바늘을 묶고 봉돌 대신 못대가리를 달고 찌는 수수깡을 끼워서 나도 낚시를 해보았어요. 그렇게 해서 대여섯 치 붕어 한 마리를 끌어냈는데 전해오는 저항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나한테도 이놈이 잡혔다는 성취감을 느꼈죠. 다시 한 번 또 해봐야겠다. 그렇게 몰입하게 된 낚시가 평생을 함께한 거지. 서울의 중앙고보에 진학했을 땐 관훈동 고물상을 뒤져 중학생 신분으로는 거금을 주고 일본산 조립식 낚싯대와 인조 데구스(天蠶絲의 일본말 : 누에의 성숙한 견사선을 떼어 식초에 담가 늘어뜨린 뒤 햇빛에 말린 실. 나일론이 등장하기 전까지 낚싯줄로 쓰였다)를 사서 쓰기도 했어요.”

 

- 대개 낚시의 입문 과정을 보면 아버지나 집안 어른에게 배운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은 그렇지 않으셨군요?
“부친은 낚시를 하지 않았고 낚시를 못하게 했어요. 아버지에게 들킬까봐 몰래 낚시를 다녔어요. 낚시가 유전적이라고 하는데 선천적 기질은 없다고 봐요. 생활과정에서 낚시를 접해보면 누구나 낚시꾼이 되는 것이고, 그런 기회가 없으면 낚시꾼이 안 되는 것이지.”

 

1953년 전쟁은 끝났다. 선생은 경남 사천에서 공군 사병으로 만기제대했다. 폐허 속의 현실은 참담했다. 평택의 집은 B29기의 폭격으로 전소하였다. 땅이야 꽤 있었지만 사겠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식구들이 끼니를 걱정하는 마당에 대학에 복학하여 학업을 계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 아는 친구가 “미국 대사관에서 직원을 채용한다는데 너는 영어를 잘 하니 한번 응시해보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미 대사관, 대사관 직원은 몇 마디 영어로 대화를 나눠보고는 “혹시 타자기를 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당시 우리나라엔 영문 타자기가 없었고 그것을 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그러나 선생은 공군 법무감실 근무 중 사천에 파견 나온 미군부대에서 통역병을 하면서 타자기를 쳐본 경험이 있었다. 타라라락, 몇 줄을 쳐내자 “오케이” 즉석에서 채용되었다. 미국 대사관은 당시 최고의 직장이었다. 미국 대사가 한국 대통령만큼 막강했던 시절이다. 그때 부인 정금순씨를 만나 결혼했다.

 

“대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한 간호사가 눈에 띄게 예쁜 거요. 첫눈에 반해 구애를 펼쳤지. 내 인생에 젊고 화려한 시절이었지요. 나는 직장 덕에 누구보다 먼저 미국의 신문물을 흡수하며 살았고 아내도 당시 유행을 선도하는 멋쟁이였소.”

 

▲미국 대사관 근무 시절 부인 정금순씨와 함께.

 

30대에 창간한 「월간영어」, 언론통폐합 때 강제폐간

 

1956년 선생은 3년 동안 근무한 미국 대사관을 나와 「잉글리시 위클리」라는 주간신문사를 차렸다. 실용영어와 영자신문 읽는 법 등을 영한혼용으로 실은 이 신문은 중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재로 인기리에 팔렸다. 그로부터 5년 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박정희가 이끄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신문에 대한 대대적 정리를 단행했고 「잉글리시 위클리」는 월간지로 바꾸라는 권고를 받았다.

 

“말이 권고지 시키면 해야 하는 시대였어요. 그런데 전화위복이랄까, 영어 월간지로 바꾼 후에 더 잘 팔리게 됐지 뭐요.”

 

그렇게 탄생한 것이 당시 「시사영어」와 쌍벽을 이루었던 「월간영어」다. 「시사영어」가 대학생과 직장인을 고객층으로 시사영어를 다룬 반면 「월간영어」는 일반인과 중고생이 보기 적합한 생활영어를 다루었다. 「월간영어」를 발행하면서 영어교육용 단행본도 함께 발간하였다. 어학잡지와 어학교재출판을 병행하면서 출판사로서 입지는 탄탄해지고 사세는 날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언론통폐합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월간영어」는 예기치 않은 철퇴를 맞아 폐간의 아픔을 겪는다.

 

“잡지의 권두언으로 실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설문이 문제가 됐어요. 당시 매월 미 대통령의 연설문을 하나씩 싣는 시리즈를 내보내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하필 그때 실린 연설문이 ‘엘리트 계층이 각성하고 있어야 독재정권의 출현을 막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지 뭡니까.”
 
- 부당한 폐간조치에 항의해보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항의를 했지요. 그러나 문공부에서 온 답변은 ‘이유 없다’는 거요. 그때는 군인들 맘대로 하는 세상이었소. 밤에 끌려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세상이었으니, 밤에 자다가도 차 소리만 들리면 벌떡 일어나곤 했어요. 그야말로 야만적 공포시대였지.”

 

- 그 후로는 아무런 직업도 갖지 않으셨는데 그러면 무슨 돈으로 생활하셨습니까?
“부친이 생전에 마련해두었던 평택의 땅을 팔아서 그다지 큰 어려움은 모르고 살았어요. 직업도 없고 다른 취미도 없으니 줄기차게 낚시만 다녔죠. 나만큼 낚시를 많이 다닌 사람도 없을 겁니다. 겨울이면 추자도에 가서 감생이도 낚고 계곡을 누비며 송어도 낚고, 뉴욕 사는 동생 초청으로 미국 낚시여행도 다녀왔지요. 낚시에 관한 한 여한이 없어요.”

- 그렇게 허구한 날 낚시만 다니면 부인께서 싫어하지 않았습니까?
“낚시 다니는 것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았어요. 새벽마다 도시락을 배낭에 넣어주며 배웅한 착한 아내죠. 그러나 가끔 교회에도 같이 나갔으면 했어요. 명색이 교회 권사라는 직책에 남편 하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지 못하니 얼마나 민망스러웠겠어요. 주일만 되면 내외가 새옷 갈아입고 자식들을 앞세워 교회에 나오는 남들이 그렇게나 부럽더라는 겁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타협안을 제시하더군요. 한 주 걸러 한 번은 낚시를 다니고 한 번은 교회에 나오면 안 되겠느냐고. 엿새 만에 돌아오는 일요일도 여삼추인데 보름만의 낚시행이란 사람 잡을 공백이지요. 결국 내가 말했어요. 여보, 우리 저승에서는 손잡고 교회 나갑시다. 다만 하늘나라에 저수지가 없다면 말이지. 하하하.”

 

-낚시춘추에 ‘삼총사’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초대 발행인 한형주 박사와 2대 발행인 정효섭 회장, 그리고 최운권 선생님은 항상 어울려 다니는 단짝이었다고 하던데요.
“그랬지요. 우리는 부부동반 여행도 자주 다녔어요. 만나면 즐겁고 마음이 통하니 늘 셋이 어울려 다녔어요.”

- 선생님이 아는 한형주 박사님은 어떤 분입니까?
“인간적으로 정말 존경하는 분이오. 출판과는 아무 관계없는 의사가 얼마나 낚시가 좋았으면 낚시춘추를 창간했겠소.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낚시잡지가 어디 돈 되는 사업이오? 실제로 창간 후 얼마나 고생하고 적자에 허덕였나요. 그래도 우리나라 낚시계를 위해 6년 넘게 이끌어오다가 정효섭씨라는 후계자를 만나서 무난히 인계해주었어요. 의사로서도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내가 혈압약을 처방받기 위해 한 박사님의 병원에 갔는데 대기실에 앉아서 보니까 환자들에게 그렇게 자상하고 공포감을 주지 않기 위해 인술을 베푸는 모습이 너무 존경스러웠어요. 우리나라 낚시계의 최고 공로자이십니다. 사심 없이 낚시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도 그렇게 못했어요.”

 

- 그럼 선생님이 아는 정효섭 회장님은 어떤 분입니까?
“한마디로 둘도 없는 술친구였지. 같이 술을 마시면 우리 둘 사이엔 간격이라든가 거짓이라든가 전혀 없었어요. 암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요즘 의학이 발달해서 설마 죽기야 하겠나 했는데… 좋은 친구 먼저 갔구나. 인제 나하고 술 한 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친구가 이 세상에 없구나… 너무 일찍 간 게 한스러워요. 강직하고 엄격한 사람으로서 큰 회사를 이끌어온 데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84년에 조선일보에서 「월간낚시」를 창간했을 때 낚시춘추를 자기들에게 팔라고 했어요. 그러나 정효섭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지. 그때 참 대단한 친구구나 그 용기에 놀랐습니다. 누가 조선일보를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나요. 결국은 월간낚시가 폐간했으니 낚시춘추가 이긴 것이지.”


 

▲한형주 박사 부부와(왼쪽) 정효섭 회장 부부(오른쪽), 그리고 최운권 선생 부부(가운데)가 함께했던 여행길에서.

 

▲감성돔을 낚으러 추자도를 찾은 최운권 선생(왼쪽). 붕어낚시 외에 바다낚시, 루어낚시도 두루 즐겼다.

 

- 요즘은 누구랑 술을 마십니까?
“집에서 혼자 마셔요. 내가 성격이 좀 건방져서 상대가 안 맞으면 대작을 못해. 요즘은 둘째 딸이 10도짜리의 특이한 막걸리를 사오는데 맛이 아주 좋아요.”

 

-그 막걸리 저도 맛볼 수 있습니까?

(안색이 환해지며) “아아 그럼! 좋고말고! 여보, 오리고기로 안주 좀 만들어봐.”

- 한국낚시펜클럽의 창단 주역으로서 한국낚시진흥회 창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셨는데 한형주 박사께서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 선생님도 한국낚시진흥회에서 빠지셨다고 들었습니다.
“한국낚시진흥회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아요. 지금은 낚시업자들의 단체가 되었지만 나는 순수낚시인들, 특히 낚시필자 등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진흥회의 모 인사가 진흥회를 활성화시킬 방안을 내게 물어보기에 내가 말했어요. 낚시춘추를 한 권 사라. 거기 보면 진흥회를 짊어질 명단이 다 있다. 루어낚시, 민물낚시, 바다낚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미 다 나와 있지 않느냐. 그들을 주축으로 루어낚시부, 바다낚시부, 민물낚시부를 만들면 반드시 뜻 깊은 사업구상이 나오고 젊은 낚시인들을 중심으로 추진력이 나올 것이다. 내 솔직히 그렇게 말했어요. 그런데 이해를 못하더라고.”

 

- 낚시계 원로로서 오늘날의 낚시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유~ 없어요. 안 할래. 나이 들어서 괜히 이러쿵저러쿵 하는 거 보기 좋지 않아요. 요즘 낚시인들 옛날 우리보다 더 생각이 깨어 있고 더 잘하고 있는데….”

- 요즘은 낚시를 안 다니십니까?
“안 다니는 게 아니라 못 다닙니다. 팔십이 넘으니까 낚시가방 메고 원거리를 간다는 것도 어렵고 밤을 새는 것도 무리에요. 어쩌다 낚시방송을 보면, 나도 저기 가서 앉아있어 보았으면…, 소쩍새가 피를 토하듯 울고 별자리가 중천을 맴도는 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에 나 혼자 휩싸여 구름을 거느리고 노니는 신선이 된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또 한 번 느껴보았으면… 하지만 이제 추억속의 그림이에요. 나이라는 건 불가항력입디다.”

 

- 돌아보면 혹시 아쉬운 점은 없습니까?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면 이것 하나는 꼭 해보고 싶다든가 하는…
“없어요. 그저 낚시인으로 살았다는 게 행복할 뿐이오. 낚시가 내 인생을 즐겁게 해주었고 낚시가 있었기에 보람 있었소. 낚시춘추에 글을 쓰며 인기도 누렸고 내 조그만 노력이 「붕어낚시연구」라는 책으로 남았고 이 책이 우리나라 낚시여명기에 보탬이 되었다고들 하니 행복합니다. 낚시계에 발자취 하나 남겼다는 게 내 소박한 자랑이오. 여한이 없어요.” 

 

 

▲ 소양호에서 어신을 기다리며. 최운권 선생이 '가장 좋았던 시절의 추억'으로 꼽는 사진이다.

 

▲ 자택에서 부인 정금순 여사와 함께 다정한 포즈를 취했다. 정금순 여사는 대한적십자회 마포지구협의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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