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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춘추 창간 40주년 특별 인터뷰 - 「바다낚시교실」의 저자 이일섭 선생
2011년 04월 5640 197

 

 

 

 

 

 

낚시책 중 베스트셀러 1위, 「바다낚시교실」의 저자  이일섭 선생

 

과학적 낚시이론의 기초를 다진 한국 낚시필자의 大父

 

 

허만갑 기자

 

 

 

 

 

대구의 자택에서 인터뷰 도중 너털웃음을 웃는 이일섭 선생. 늘 낚시인 독자들의 요구를 생각하고 독자를 올려다보는 태도로 글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낚시책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무엇일까? 1위부터 5위까지 꼽아보자면 1위 「바다낚시교실」, 2위 「낚시채비전집」, 3위 「루어낚시교실(박현재)」, 4위 「붕어낚시교실(송소석)」, 5위 「바다낚시 100문1000답」이다. 그런데 그중 1, 2, 5위에 오른 책들의 저자는 한 사람이다. 바로 대구의 낚시원로이자 한국 최고의 낚시이론가인 이일섭(李日燮) 선생이다.
이일섭 선생은 올해 85세다. 선생이 저술활동을 펼친 시기는 한국낚시이론의 태동기인 80년대였다. 하지만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일섭의 「바다낚시교실」을 능가하는 바다낚시 교본은 나오지 않고 있다. 「바다낚시교실」은 92년 발간된 후 지금까지 10만부가 팔렸다. 
특히 「바다낚시교실(上)-기초편」에서 명쾌하게 풀어낸 물때에 관한 정리는 ‘이일섭 낚시학’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선생은 옛날부터 어촌에서 사용해온 우리 고유의 물때에 천문학의 조석(潮汐)원리를 결부시켜 ‘과학적 물때 이론’을 탄생시켰다. 바닷물의 점성으로 인해 사리보다 이틀 후에 가장 센 조류가 흐르는 원리를 흥미롭게 풀어낸 ‘월조간격과 실제의 사릿날’, 오전과 오후의 만조 수위가 각각 다른 일조부등(日潮不等)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한 ‘여름엔 그믐 밤물이 세고 겨울엔 보름 낮물이 세다’는 선생의 기사들은 오늘날까지 바다낚시 현장에서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선생이 만든 베스트셀러라면 1982년부터 지금까지 발간하고 있는 「지역별 관광낚시지도」도 빼놓을 수 없다. 25만분의 1 대축적 지도에 잡다한 정보는 모조리 생략하고 오직 저수지와 도로만 기입함으로써 전국 각지에 어떤 저수지가 있는지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일명 ‘이일섭 지도’로 통한 이 지도첩은 내비게이션이 보급되기 전까지 낚시인들의 가장 큰 안내자 역할을 수행했는데, 낚시차량치고 이 지도가 실려 있지 않은 차가 없을 정도였다.

 

 

대구경북낚시연합회 창립 주도

 

 

이일섭 선생의 또 하나의 업적은 대구경북낚시연합회의 창립이다. 당시 부산에는 부산낚시연합회가, 서울에는 전국낚시연합회가 있었지만 대구경북에는 그런 단체가 없었다. 이일섭 선생은 경북지역 낚시단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나 호응이 없자 1년 10개월간 거의 혼자서 김천, 상주, 안동, 포항, 경주, 영천 등지의 낚시회들을 방문하여 설득함으로써 결국 대구경북낚시연합회의 발족을 이끌어냈다. 1986년 9월 대구지법 검사장 김사룡씨가 대구경북낚시연합회 초대회장에 추대되었고 선생은 상임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2년 후인 88년에 경북낚시연합회와 대구낚시연합회로 분리되었으나 두 단체 모두 오늘까지 건재하여 대구낚시연합회는 18대 박석구 회장이, 경북낚시연합회는 7대 윤두영 회장이 이끌고 있다. 이일섭 선생은 현재 대구낚시연합회 고문으로 있다.
이일섭 선생은 또한 대구루어낚시클럽을 창단하여 루어낚시의 불모지였던 영남에 루어낚시 기법과 문화를 보급하였다. 서울릴낚시 박현재 사장을 통해 루어낚시에 매료된 이일섭 선생은 황강, 밀양강, 반변천 등 영남의 강계를 누비며 쏘가리·꺽지 루어낚시를 전파하고 새로운 낚시터들을 개발하였다. 그때 구축된 루어낚시 기반은 오늘날 대구를 수도권에 이어 가장 큰 배스낚시 시장으로 성장시킨 주춧돌이 되었다.

 

 

 

국일제과공업사 시절인 30대 초반의 이일섭 선생(오른쪽). 감포해수욕장에서.

 

 

 

89년 KBS '바다낚시입문'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일섭 선생.


흥남공대 재학 중 6.25 만나 단신 월남

 

 

봄비가 내리던 지난 2월 27일, 대구시 수성구 범물2동의 이일섭 선생 댁을 방문하였다. 나는 선생을 내가 햇병아리 기자일 때부터 뵈었고 최근엔 3년 전 단양 쏘가리낚시대회장에서 뵀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정정하여서 기뻤다.

 

 

- 선생님 기력이 여전하신 걸 보니 요즘도 두주불사하실 것 같아 겁납니다.
“그래요? (술 이야기에 표정이 환해지며) 오늘 만갑씨가 왔으니까 그 핑계로 한잔 할까?”

 

- 제 술실력으로 선생님과 대작할 수 있겠습니까? 술은 따라 드리겠습니다.
“낚시춘추는 별고 없지요? 돌아가신 정효섭 회장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나한테는 더없이 잘해주신 분인데. 서울에 올라가면 여관에서 자지 말고 우리 집에서 자자고 꼭 자기 집으로 끌고 가셨지. 지금의 정규도 사장과 그때 바둑을 둔 적 있는데 당시 어린 나이에 바둑을 참 잘 두더라고. 깜짝 놀랐어요.”

 

-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붕어)낚시 다니고 가끔 (대구낚시)연합회 나가는 것 외에는 집에서 글을 써요. 뭐 출판할 만한 그런 글은 아니고, 그냥 아무 소재나 잡아서 글을 쓰면서 생각도 정리하고 새로운 지식도 얻고…, 평생 글만 써와서 그런지 글을 쓸 때가 가장 편하고 기분이 좋아요.”

- 저희는 글쓰기가 직업이라 그런지 글 안 쓰고 몇 달 푹 쉴 수 없나 그런 생각 하는데요?
“무엇이든 밥벌이로 하면 지겨운 점은 있지. 그래도 기자는 참 좋은 직업이오. 나는 옛날부터 기자가 하고 싶었고 그런 기질이 좀 있었어요. 취재하고 그것을 꼼꼼히 기록해놓았다가 글로 정리하는 것이 재미가 있었던 거지.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전쟁을 만났고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내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이일섭 선생은 1927년 함경북도 회령(會寧)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조부는 만주 길림성 용정에서 한의사로 꽤 많은 재산을 모았으나 선생의 부친이 거듭된 사업 실패로 그 재산을 거의 소진했다. 그래도 선생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3남1녀의 맏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두뇌가 명석하여 직업을 자주 바꾼 부친을 따라 회령, 주을, 명천으로 옮겨 다니면서도 늘 전교에서 1~2등을 다투었고, 스물한 살 되던 해에 흥남공업대학교에 입학했다.
흥남공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0년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초기 3개월은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갔으나 유엔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낙동강에서 전선이 고착되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단숨에 역전되어 10월엔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자 명천군청의 공산당원들은 국군을 피해 도주하였고 행정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군청에 나와 있던 몇몇 학생들이 북진해온 국군을 돕게 되었는데 그중에 이일섭 선생도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뒤집어졌고, 국군은 후퇴하게 된다.

 

 

“명천이 다시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지면 국군의 심부름을 했던 우리는 보복을 당할 것이 뻔했지요. 그래서 1.4후퇴 당시 나도 국군 3사단 22연대를 따라 삼팔선을 넘었어요. 그때는 곧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군인들이 말하기를 한 달만 있으면 맥아더가 원자탄을 중국에 떨어뜨릴 것이다, 그러면 중공군이 도주할 것이라고 해서 따라나선 길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돼버렸지요.”
(북에는 두 남동생과 여동생이 살아 있을 수 있지만 생사를 알 길이 없다.)

“차라리 그때 북에 남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요.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는 모르나 덜 괴롭진 않았을까.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 괴로움은 없지 않았을까. 나는 북에 있는 부모형제를 두고 도망쳐온 죄로 60년간 유배와도 같은 생활을 했어요.”

 

혈혈단신 전쟁고아 신세가 된 이일섭은 대구의 한 인쇄소에 취직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림 솜씨를 인정받아 삽화 등을 그리는 ‘화공’이 되었다. 그러나 이북 출신으로 남한땅에서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살려면 군인이 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 끝에 군대에 들어갈 길을 모색한다. 

 

 

83년 5월 대청호에서 루어낚시를 끝내고 찍은 사진. 왼쪽부터 노익배(대구조우회 회장), 이일섭, 고 박현재(서울릴낚시 대표), 김홍동 선생.

 

 

 

81년 9월 합천호가 생기기 전의 황강에서 이일섭 선생이 낚은 31.5cm 꺽지 기록어. 이 기록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당시엔 과거 군속으로 있던 사람에게 군적을 주는 현지입대라는 것이 있었어요. 다행히 명천에서 국군을 도운 전력을 인정받아서 육군항공대 작전교육국 제8과에 현지입대하여 군번을 받고 문관이 되었습니다. 대학 출신임을 인정하여 처음부터 4급 14호를 주더군요. 지금으로 치면 대위급이었지.”

군인은 이일섭 선생의 적성에 맞았다. 꼼꼼하고 정확한 일처리로 능력도 인정받았다. 스물아홉 되던 해에 부인 한옥기(韓玉基)씨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이북 출신이라는 딱지는 그에게서 승진의 기회를 번번이 앗아갔다. 결국 1959년 3년간 복무한 군대를 나왔다.
주변에 늘 친구가 많았던 선생에겐 갖가지 권유와 제안이 따랐다. 대구 국일제과공업사의 최봉서 사장을 만나 군납 입찰 전담 상무도 했고, 그러다가 서일식품공업사라는 엿공장을 만들었다가 ‘노새집의 사탕’이란 제과업체를 인수하여 직접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 60년대 이후 해태제과, 오리엔트제과 등 초대형 제과업체가 등장하면서 지방의 중소 제과업체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낚시를 더 자주 하게 됐어요. 사업이 사양길에 빠지니까 낚시라도 가지 않으면 울화를 다스리기가 힘들었지.”

 

- 현실도피의 방편으로 낚시를 즐기셨다는 말인가요?
“달걀이 먼저냐 병아리가 먼저냐의 이야기요. 사업이 안 돼서 낚시터로 쏘다닌 면도 있지만 또 낚시에 빠져서 사업에 소홀했던 면도 있었으니까. 실제로 당시 대구에선 이일섭은 낚시 때문에 망했다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니까요.”

 

저녁시간이 되자 이일섭 선생은 나를 수성못 유원지의 한 중국요리점으로 데려갔다. ‘오늘따라 중국요리가 먹고 싶다’고 하셨지만 사모님 몰래 약주 한잔 하고 싶어 그런 것임을 사모님도 아셨을 것이다.

 

 

- 낚시글은 어떤 계기로 쓰게 됐습니까?
“내가 무명이던 시절에 영덕 대탄의 백사장 원투낚시 조행기를 낚시춘추에 투고했는데 그게 실렸어요. 그러자 더 멋진 글을 써야겠다는 욕심이 생겨요. 수산청 포항지원에 직접 찾아가서 내가 이러이러한 내용을 써서 낚시춘추에 싣고 싶은데 자료를 좀 줄 수 없겠느냐고 하니까 박사들이 흔쾌히 모든 자료들을 내주더라고. 그것을 정리해 실은 것이 ‘어류는 저수온 상태에서도 취이활동을 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이었어요. 그런데 그 글이 낚시계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어요. 사방에서 전화가 오고, 낚시강좌를 해달라는 제의도 들어오고, 너무 뜻밖의 호응이라 나도 깜짝 놀랐습니다.”

 

- 그 기사가 스타 탄생의 신호탄이었군요.
“그러고 나자 정효섭 사장이 ‘바다낚시 강좌’란 제목으로 연재를 하자고 합디다. 그래서 78년 1월부터 13회 연재를 했고, 그 연재물을 모아서 출간한 책이 「바다낚시특강」이에요. 그게 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습니다.”

 

이일섭의 필명은 전국에 알려졌다. 대구매일신문에 77년 11월부터 매주 토요일 ‘바다낚시란 이런 것이다’를 연재했고, 낚시춘추에는 79년부터 ‘릴낚시의 실제’라는 이름으로 2차 연재를 시작했다. 85년과 86년에는 서울 롯데백화점에서 두 차례 하계낚시강좌를 열었다. 84년 4월에 조선일보가 <월간낚시>를 창간했을 때 스카우트해야 할 필자 1호로 지목한 사람이 이일섭 선생이었다.

 

 

“월간낚시 편집장으로 부임한 이유경씨가 찾아와서 원고를 써달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일본 낚시서적에서 카피한 물고기와 낚시, 바다와 관련된 글들을 한 다발 안겨주더라고. 그 복사본의 글들이 너무 흥미로워서 그걸 받아 들었지. 그리고 실제로 ‘물과 물고기와 낚시’라는 제목으로 월간낚시에 20회 연재했어요. 또 그보다 1년 전에 부산에 <월간 바다>라는 바다낚시 전문지도 생겼는데 (은성사 고문인)장종록씨가 소개하여 거기에도 연재를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정효섭 사장이 못마땅해 하는 거예요. 사실 나와 정 사장의 의리로 봐서는 다른 경쟁지에 글을 실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시절이라 원고료를 벌기 위해 여러 곳에 글을 썼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방세를 내기 위해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썼다지 않습니까. 사실 글이란 게 배가 부르면 잘 안 나와요. 여유가 있을 때는 오히려 잘 안 써지더라고.”

 

- 그것이 프로작가 아닙니까? 선생님이야말로 우리나라의 낚시전문 자유기고가 1호이십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 바다낚시의 역사가 일천하고 장르가 다양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 많은 장르의 낚시이론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까?
“내 경험만 가지고는 턱도 없는 것이지요. 당시 40대 후반의 내가 해본 바다낚시는 감성돔 원투낚시, 망상어 찌낚시, 열기 외줄낚시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일본과 미국의 자료들을 많이 공부하고 또 참고했어요. 그때 일본의 낚시채비전집을 그대로 번역해서 나온 책은 있었지만 우리바다에 맞는 낚시책은 전무했습니다. 특히 바다루어낚시를 이해하는 데에는 내가 쏘가리, 송어 루어낚시를 해본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76년 11월 한일친선낚시대회가 열린 서귀포 범섬에서. 왼쪽부터 이일섭, 고 심동섭(영동낚시연합회 사무국장), 강상문, 김준남(<바다낚시터백과-명소를 찾아서> 저자) 선생.

 

 

 

 

천부적 그림 실력으로 삽화와 채비 직접 그려

 

 

- 가장 애착이 가는 대표작은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바다낚시교실」이지요. 내가 79년에 처음 발간한 「바다낚시특강」을 13년간 보강하여 만든 책이니까.”

 

- 「바다낚시교실」의 모든 삽화를 선생님이 직접 그린 것이라 들었습니다.
“책에 나오는 300여 컷의 일러스트를 로트링펜으로 직접 그렸어요. 그래서 내 그림은 미술담당자가 다시 그릴 필요가 없었죠. 그 후로도 내가 쓴 책의 모든 그림은 모두 내가 손으로 하나하나 그린 것입니다.”

 

이일섭 선생의 낚시채비·묶음법 일러스트는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대로 재사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더 잘 그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천부적 소질을 보였던 선생은 낚시소품, 매듭, 해저지형의 특징까지 생생하게 되살렸는데, 낚시인의 시각으로 묘사한 선생의 그림은 전문 삽화가도 대신할 수 없었다. 선생의 그림은 보는 것만으로 낚시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사였다.

 

 

 

▲'바다낚시교실'에 실린 바늘묶음 삽화. 이일섭 선생이 로트링펜으로 직접 그린 것이다. 이런 손가락의 움직임은 낚시를 모르는 삽화가가 그릴 수 없는 것이었다.

 

 

- 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잘 팔리는 책을 만드는 비결을 좀 가르쳐주십시오.

“독자의 요구를 생각해야 해요. 내가 큰 것 낚았다, 이렇게 해서 많이 낚았다 자랑하면 안 돼요. 낚시글을 쓰는 이들이 중간에 그런 걸 슬쩍 비추기를 좋아하지만 난 못 비췄어. 많이 낚은 적이 있어야 말이지(웃음). 읽는 독자를 편하게 해줘야 해요. 독자 당신이 글 쓰는 나보다 한 단계 위요 하고 써야 돼요. 독자를 내려다보고 가르치려 들면 안 됩니다. 너무 주관적으로 쓰지 말고 객관적으로 써야 합니다.”

 

- 낚시춘추 편집부에 하고 싶은 말씀은?
“좀 적게 낚고 많이 즐기는 방법을 알려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낚시란 마음으로 산천을 낚는 것입니다. 취적비취어(取適非取魚)란 말이 있잖소. 낚은 고기를 돈으로 사면 몇 배 더 살 텐데 고기에 얽매어 애태울 일이 뭐 있어요. 잉어 낚으러 갔다가도 피라미와 더불어 놀 수 있는 것이지요. 낚시란 물가에서 위로 받고 허함을 달래고 역경을 헤쳐 나갈 용기를 얻을 수 있을 때 언제나 즐거운 조행이 되는 겁니다. 낚시춘추가 대어 자랑보다는 올바르게 낚고 세월을 낚는 길을 가르쳐주면 좋지. 그런 낚시꾼들을 찾아 그런 분들의 글을 올리기 바랍니다.” 

-선생님은 오늘날 우리나라 낚시계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사행심이 문제입니다. 옛날엔 낚시대회에 명예를 걸고 참가했는데 지금은 돈을 보고 참가합니다. 낚시대회 상금이 오백만원, 천만원 하는 걸 보면 안타까워요. 사람의 마음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사행심을 부추겨 이득을 노리는 사람들에 의해 우리 낚시문화가 병들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낚시춘추가 일깨워줘야 합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조행은 무엇입니까?

“너무 많고, 너무 없어요.”

 

- 그래도 하나만 기억해보시지요.
“글쎄, (낚시춘추 제주 모니터를 했던)부창옥씨랑 마라도에 갔을 때가 기억에 남는군요.”

 

- 왜 기억에 남습니까?
“고기를 못 낚고 빈손으로 돌아왔거든.”

- 가장 친하게 지낸 낚시친구는 누구입니까?
“대구조우회 회장을 역임했던 노익배씨입니다. 서울 출신으로 유명한 사진작가여서 70년대 낚시춘추에 노익배씨의 사진이 많이 실렸어요. 그분은 너무 아는 게 많고 괴팍한 성격 때문
에 주변에 사람이 많이 없었는데 아집불통인 것이 나하고 죽이 맞아서 늘 어울려 다녔어요.”

- 선생님이 가장 좋아한 낚시는 무엇입니까?
“나이에 따라 달라진 것 같아요. 어릴 때와 나이가 들었을 땐 붕어낚시이고, 파워가 있던 젊은 시절엔 바다낚시, 특히 갯바위낚시를 즐겼지요. 바다낚시엔 파워가 있고 붕어낚시엔 철학이 있어요. 나는 처음에 붕어낚시부터 시작해서 한때는 동남서해를 두루 다니며 갯바위낚시를 했지만 육십이 넘고부터는 산간 계류에서 루어낚시를 한다거나 조용한 호숫가에서 붕어와 더불어 자연의 비경에 심취하는 경향이 짙어졌습니다.”

 

- 선생님에게 꿈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허허 뭐라고 대답할꼬? 인생은 어떻게 살든 편하게 사는 길은 없더이다. 그러나 올바르게 살 수는 있지. 남을 사랑하고 사는 것, 감사하고 사는 것 그게 내 꿈입니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낚시계에 신세를 많이 졌어요. 고마운 분들이 참 많아요. 그러나 이미 많은 분들이 이 세상을 떠났고 남은 분들에게도 보답할 능력이 없으니 그게 서글퍼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올 때엔 비가 그쳐 있었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신세를 진 쪽은 선생님이 아니라 우리나라 낚시계, 그리고 낚시춘추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지는 못했다. 어디 가서 한잔 더 했으면 하는 선생의 눈빛을 애써 피하느라. 선생님, 마감이 촉박하여 이번엔 일찍 상경했지만 조만간 대구로 다시 가서 긴 술 한잔 올리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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