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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창립 40주년 맞은 만어낚시의 발자취. 부산 충무동 태화상사로 출발, 온,오프 마켓의 미래가 된 피싱그룹만어
2011년 07월 7417 2044

FOCUS

 

창립 40주년 맞은 만어낚시의 발자취

 

부산 충무동 태화상사로 출발, 온·오프 마켓의 미래가 된 피싱그룹만어

 

ㅣ이영규 기자ㅣ

 

우리나라 최대의 낚시유통업체 중 하나인 피싱그룹만어(만어낚시)가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1971년 부산 충무동에 태화상사라는 이름으로 첫 문을 연 뒤 올해로 40돌을 맞은 피싱그룹만어. 그 발자취를 통해 대한민국 낚시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본다.

 

 

 ▲피싱그룹만어 안승근 회장과 안국모 사장. 아버지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안국모 사장은 피싱그룹만어를 국내 최고의 낚시문화공간으로 만들 생각이다.
 

1971년 충무동 형제낚시 앞에 태화상사라는 이름의 낚시점이 문을 열었다. 점원 1명을 둔 옹색한 20평짜리 매장의 주인이 안승근, 지금의 피싱그룹만어 회장이었다.
당시 부산에선 글라스로드가 국내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낚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은성과 오리엔탈 글라스로드가 인기를 끌었는데 태화상사는 오리엔탈 낚싯대의 부산대리점과 도매점을 겸했다. 글라스로드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지만 안승근 사장은 낚싯대를 많이 팔지 못했다. 도매업이 처음인데다가 사업자금도 부족해 당시 항도낚시, 신진낚시, 은파낚시 같은 큰 도매점이 선금을 주고 낚싯대를 매점하는 데 대항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승근 회장에게 태화상사는 첫 낚시점이었지만 이미 그는 낚시업에 잔뼈가 굵어 있었다. 60년대 중반 우연한 기회에 대나무낚싯대 공장을 인수하여 대학 때 전공분야였던 도장기술을 접목시킨 안승근 회장은 품질 좋은 대나무낚싯대로 히트를 쳤다. 그 낚싯대가 당시 부산을 휩쓸었던 동양작(東洋作)이다.

 

첫 ‘독자 브랜드’ THC 낚싯줄로 기반 닦아
그러나 2년 뒤인 1971년에 ‘엔젤’이란 브랜드의 글라스로드가 국내 최초로 출시되자 대나무낚싯대의 시대는 끝났음을 예견한 안승근 회장은 발 빠르게 공장을 팔아버리고 낚시유통업으로 전환했다.
그의 타고난 사업 수완은 태화상사를 차린 후에 더 빛났다. 70년대 초에는 나일론 낚싯줄도 귀할 때였다. 낚시점에서 낚싯줄을 사려면 “몇 발만 잘라달라”는 식으로 구입했다. 안승근 회장은 묘안을 냈다. 일본에서 실타래처럼 묶여 들어온 3000m짜리 낚싯줄을 물레에 건 뒤 10m 단위의 전용 실패에 다시 감아 판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방식이었지만 소형 실패에 낚싯줄을 감아 판 것은 우리나라에선 태화상사가 최초였다. 똑같은 낚싯줄이지만 거기에 낚시인의 니즈를 반영하여 ‘상품’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태화상사의 상호를 따 상표를 THC로 적었는데 말 그대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안승근 회장은 웃으며 “이 얘기는 기사에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면서도 THC 낚싯줄이 지금의 피싱그룹만어로 성장하는데 첫 발판이 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노조사 중에는 지금도 낚시점을 찾아와 THC 낚싯줄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당시에 히트를 친 THC 낚싯줄이 지금의 옥션과 인크론을 낳은 안승근 회장의 첫 브랜드였을 것이다.

 

▲ 1980년 가을 무렵 충무동에서 남포동으로 이전한 만어낚시. 오래된 아크릴 간판과 미닫이 문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만든다

 

80년대 중반부터 맞은 중흥기
1980년 가을, 태화상사는 인근 남포동으로 자리를 옮기고 상호도 만어낚시로 바꾸었다. 그리고 거래처를 꾸준히 늘려가며 사세를 확장한다. 직원은 10명으로 늘었고 교대제 근무를 할 정도로 영업규모가 커졌다. 80년대 만어낚시의 주 거래처는 제주도를 비롯한 포항 이남 전역이었는데 당시 서울에는 새서울낚시, 대한낚시, 남수도낚시 같은 도매점이 유명했다. 안 회장은 80년대 중반 이후를 한국낚시유통업이 급성장한 시기라고 말했다.
“80년대 중반부터 레저 개념이 싹 트기 시작했죠. 자가용을 몰고 낚시를 다니는 사람이 늘었고 텐트와 코펠, 버너 같은 레저용품이 불티나게 팔릴 때입니다. 그때부터 낚시용품도 아이템이 다양해졌어요. 팔십년대 초만 해도 민물낚싯대로 바다낚시를 할 때였으니 봉돌과 바늘, 도래를 빼고는 소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거든요. 그러다가 90년대 초 일본의 릴찌낚시 기법이 국내에 소개되고 장르도 다양해지면서 아이템이 급속도로 늘었습니다. 만어의 외형도 커지는 계기가 됐지요.”
만어낚시는 남포동에서만 세 번 이사했다. 99년 9월 남포동4가에 피싱랜드만어라는 상호를 달고 오픈한 게 세 번째 매장이다. 이후 2004년 7월에 동래점을 오픈하고, 2008년 9월에는 남포점이 사상으로 옮기면서 만어낚시의 충무동과 남포동 시대는 막을 내린다.

 

▲1980년대 말 일본에서 열린 한일낚시진흥회 우호친선낚시대회에 참가한 안승근(뒷줄 왼쪽에서 네번 째) 회장. 서울의 오장규, 송소석 선생 등과 함께 한국낚시진흥회원 자격으로 참가했다.
 

사범대 졸업한 아들, 교사 꿈 접고 가업을 잇다
안승근 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피싱그룹만어를 이끌고 있는 안국모 사장은 교사가 꿈이었고 공주사범대를 졸업했다. 그는 방학 때마다 부산으로 내려와 매장 일을 돕곤 했지만 4학년 졸업반이 될 때까지도 가업을 잇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류창고가 안락동 집 지하에 있었어요. 주말과 휴일에는 물량이 많아 밤새 포장을 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이건 사람 할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특히 배낚시용 납봉돌이 들어오는 날은 죽는 날이었어요.” 안국모 사장의 말이다.  
그러나 ‘네가 아니면 누가 가업을 이어받겠느냐’는 아버지의 강한 설득에 아들은 결국 손을 들었고 대학 졸업 후에 곧바로 매장 근무에 투입됐다.
피는 못 속인다고, 안국모씨는 바로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했다. 수년간의 물류창고 아르바이트 경험 덕분에 매장 관리 업무도 금방 적응했고 누구보다 재고 파악에 빨랐다. 경영일선에 뛰어들면서 안국모씨는 낚시선진국 일본의 유통체제를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매장 근무 7년만인 99년 일본의 낚시도매상에 직원으로 취직해 밑바닥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낚시선진국 일본의 최신 아이템을 벤치마킹하려면 내 자신이 일본어부터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업을 확장하면서 일본의 업계 관계자들을 접할 기회가 잦아진 것도 일본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동기가 됐죠. 지인을 통해 소개 받은 일본 낚시도매상에 취직해 일도 배우고 일본어도 배웠습니다. 처음엔 일본 도매상도 경기가 나빠 아르바이트를 쓸 여건이 못 된다고 주저했지만 ‘월급은 아무래도 좋다. 경험을 쌓고 싶다’고 하자 선뜻 불러주더군요.”
마루큐 등 일본 회사의 제품을 수입하는 만어에서 일본어 회화는 필수였다. 일어가 능통해지자 통역을 쓸 일도 없어졌고 무역업무 일처리는 더욱 빨라졌다. 최근 피싱그룹만어와 일본의 유명 바늘업체 마루토사가 총판계약을 맺은 것도 안국모 사장의 끈질긴 물밑 접촉의 결실이었다.

 

▲ 피싱그룹만어의 인재상과 경영철학을 적어 놓은 액자.
 

“낚시를 훌륭한 가족 취미로 만들고 싶다”
부산경남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만어낚시였지만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전국적 지명도는 갖지 못했다. 그런 만어낚시가 부산을 넘어 전국적 낚시유통업체로 대중에게 각인된 것은 과감한 변신 덕분이다.
1999년 9월, 안국모 사장은 20년 넘게 사랑받아온 만어낚시 간판을 과감히 떼어나고 젊은 이미지의 피싱랜드만어(2004년에 피싱그룹만어로 변경)로 상호를 바꿨다. 2001년에는 유통업계 최초로 옥션, 인크론이라는 자체 브랜드를 창출했고 이택상, 박창수 같은 유명 낚시인을 필드테스터로 채용, 브랜드 심볼로 만들었다.

 

- 안국모 사장께 묻고 싶습니다. 피싱그룹만어의 독자 브랜드인 옥션과 인크론은 성공한 국내 낚시 브랜드로 꼽힙니다. 유통업체임에도 독자 브랜드를 창출할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낚시 시장이 갈수록 커지자 제조업체도, 제품 수도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비슷한 품목끼리 경쟁하다보니 솔직히 더 이상은 마진을 못 붙이겠더군요. 이 점이 실질적 계기가 됐습니다. 우리는 다품목을 취급하다보니 각 제품마다 장점과 단점을 꿰뚫어 볼 수 있었죠. 소비자들이 원하는 장점만 따내 제품을 개발하니 품질이 좋아질 수밖에요. 조구업체가 아닌 유통업체로서는 첫 도전인 만큼 위험도 감수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옳은 판단이 됐습니다.”

- 요즘은 온라인 시대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온라인 쇼핑몰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초대형 오프라인 매장을 계속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온라인 쇼핑몰이 대세이긴 합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빠르고 편한 구매를 좋아하는 신세대들도 있지만 매장에 나와 여유 있게 쇼핑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세대별 개인별 취향에 달린 문제라고 봅니다. 온라인 쇼핑몰이든 매장 판매든 구색이 많아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품종, 대형화는 필수라고 생각해요. 현재 만어는 국내 최다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손님들 입에서 ‘만어에 가면 다 있다’라는 말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더군요.”

 

 

▲초대형 매장을 자랑하는 피싱그룹만어 동래점.
 

현재 안국모 사장이 운영하는 동래점은 연면적 600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초대형 매장이다. 매장을 밖에서 쳐다봤을 땐 그리 크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서자 별세계였다. 1층 매장은 바다낚시용품과 떡붕어낚시 용품들이 빼곡하게 진열돼 있었고 물건을 고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분주했다. 각 진열대마다 물건이 넘쳐나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경우도 많았다. 나를 매장 안으로 안내한 안국모 사장은 “자고 나면 물건이 새끼를 치는 것 같다”고 농담을 했다.   
2층으로 올라가자 프리미엄관의 세련되고 기품 넘치는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의 유명 헤라낚시용품을 전시해 놓은 곳으로 개당 10만원을 호가하는 고야마찌와 충상찌, 이시이찌, 최고급 낚싯대 등 다른 낚시점에서는 보기 힘든 고가의 용품들이 깔끔하게 전시돼 있었다. 1층 매장은 대중적인 소품과 장비를, 2층은 고가의 수입 장비 위주로 구색을 맞춰 놓고 있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강의실이 나왔다. 30평 규모의 강의실엔 100명이 동시에 강의를 들을 수 있는 테이블과 시청각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여기서 매년 10차례 이상 낚시강의가 열린다. 지난 6월 4일에는 부산 사직여중 레저스포츠반 학생들을 초청해 떡붕어 전층낚시 강의를 열었다고 한다. 안국모 사장의 각오는 다부졌다.
“단순히 매장의 대형화만으로는 고객을 잡기 어렵습니다. 대형화만 추구하다 실패한 곳들을 적잖이 보셨을 겁니다. 이젠 낚시에도 문화가 필요하다고 봐요. 단순히 고기를 많이 잡는 수준을 벗어나 온 가족이 시간과 비용을 기꺼이 투자할 만한 양질의 취미로 업그레이드 하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동래점에만 15명의 직원이 일을 하고 있다. 맨 왼쪽이 안국모 사장.

 


Interview

한국낚시유통업의 대부  안승근 회장

 

“고객은 늘 신선함을 원해, 낚시유통업도 끝없는 변화만이 살 길”

 

피싱그룹만어 창립자 안승근 회장은 1940년 경남 함안생으로 부산 동아대학교 화공과를 졸업했다. 71년 충무동에서 오리엔탈낚싯대 부산경남 대리점과 도매점을 하면서 본격적인 낚시유통업에 뛰어들었다. 1990년에 일본의 미끼 제조회사인 (주)마루큐와 한국총대리점 계약을 체결하면서 바다낚시 집어제 시장과 전층낚시용 떡밥 시장을 새로이 열었다. 2001년에 옥션, 인크론 등의 브랜드로 다양한 낚시용품을 직접 생산하는 독자브랜드 체제를 창출했다. 언제나 파격적 시도와 한발 앞선 시장 개척으로 낚시유통을 이끌어온 부산 낚시계의 거상(巨商), 안승근 회장은 민물낚시와 바다낚시를 두루 즐기는 베테랑 낚시인이기도 하다. 1999년에 안국모 사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현재는 총괄 고문 역할을 맡고 있다.

 

- 만어낚시를 대형화한 계기가 단순히 시대적 흐름 때문이었나요? 아니면 이전부터 계획하셨던 프로젝트였나요?
“요즘은 국내에 현대화된 대형 매장이 많이 생겼습니다만 나는 그 전부터 대형화에 욕심이 있었습니다. 90년대 초반에 일본의 대형 매장들을 둘러보다가 거대한 규모와 다양한 아이템에 놀랐습니다. 그때 우리는 손님이 물건을 주문하면 창고로 달려가 물건을 찾아서 갖다 줬지만 일본에서는 손님들이 직접 매장을 돌며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르더군요. 말 그대로 쇼핑 개념의 매장이었어요. 언젠가 부산에 대형 매장을 내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는데 실제론 당초 계획보다 10년 이상 늦어진 셈이죠. 남들은 10년만 일찍 대형화했다면 좀 더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요. 저걸 해야겠다 싶으면 밤잠을 설쳐서라도 하는 성격이지만 사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시기라고 봅니다. 모든 준비가 완벽해질 때를 기다렸지요.”

 

 ▲안승근 회장(맨 왼쪽)이 매장을 찾아온 손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낚시유통업은 아직도 과도기, 5~10년 뒤를 내다보고 뛰어야”

 

- 1990년에 일본 마루큐사의 한국총대리점을 계약했습니다. 요즘은 마루큐 떡밥이 국내에서 대단히 높은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10년 뒤를 내다본 결과인가요?
“88년인가 일본에 가서 바다낚시용 집어제라는 것을 처음 봤습니다. 처음엔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의문이 들더군요. 샘플을 한국에 들고 와 가덕도에서 써봤는데 집어제만 뭉쳐 던져도 볼락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더군요. 대단한 물건이다 싶었죠. 그때만 해도 우리는 쩍(담치)을 삽으로 긁어 부순 뒤 밑밥으로 주던 때입니다. 내가 마루큐사의 관계자에게 쩍 밑밥의 효과를 자랑하자 ‘그런 자연밑밥은 한계가 있다. 그게 언제까지 남아있겠냐’고 내게 반문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는 수입을 결정했죠. 민물용 떡밥은 그보다 1년 뒤에 수입했습니다. 민물 떡밥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솔직히 처음엔 ‘떡밥까지 수입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마루큐 떡밥 연구실을 방문하곤 깜짝 놀랐습니다. 수족관마다 조명을 설치해 놓고 인공적으로 밤과 낮을 만든 뒤 붕어들이 어떤 성분의 떡밥을 좋아하는가를 연구하고 있더군요. 그 때 ‘아! 이거는 필요한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님들 때문이 아니라 당장 내가 손맛을 더 쉽게 볼 수 있는 방법이 되겠다 싶었죠. 중층낚시가 본격적으로 인기를 끈 것은 90년대 말이지만 이미 그 전부터 부산 지역의 몇몇 붕어낚시꾼들은 글루텐 떡밥을 사용해 붕어낚시를 즐겼습니다.”

- 최근 급성장한 신생 유통업체들이 많습니다. 오프라인 시대의 산 증인으로서 신생 유통업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솔직히 내가 할 말은 없다고 봐요. 우리는 가진 것 없이 시작해 맨손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그때와 지금은 시대 자체가 다르니까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직도 한국의 낚시유통업은 과도기라는 겁니다. 온라인 시장은 이미 경쟁 단계를 넘어 벌써 포화 단계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또 당장 국내 낚시산업이 위축되고 있어요. 황금알을 낳는 시장으로 알려졌던 중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도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당장 오늘 얼마만큼 팔 것인가에만 매달리지 말고 5년, 10년 뒤를 내다봐야 해요.”

 

<피싱그룹 만어 주요 연혁>1971년 부산 충무동에 태화상사 개업.
 오리엔탈 낚싯대 부산경남 대리점 겸하면서 도매 시작
1980년 부산 남포동 만어낚시로 상호 변경
1990년 일본 (주)마루큐 한국 총대리점 계약 체결
1999년 9월 남포동4가에 ‘피싱랜드만어’로 확장 개업
2001년 국내 조구유통업계 최초 마케팅 도입
 CI작업 전개 옥션(OXIEN), incron 브랜드 창출
2003년 12월 피싱그룹 만어 홈페이지
www.manuh.co.kr 오픈
2004년 X-mesis 브랜드 창출
2004년 7월 15일 피싱그룹만어 동래점 오픈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600평)
2008년 9월 5일 피싱그룹만어 사상점 오픈
 (남포동에서 모라동으로 지하1층,  
 지상 2층, 연면적 450평 신축건물 이전)
2010년 피싱그룹만어
www.fishinggroup.co.kr 오픈 
2011년 일본 마루토사와 한국총판 계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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