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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론-그는 최고의 정치사상가이자 낚시애호가였다
2011년 07월 752 2073

 

 

 

 

 

 

 

 

 

 

 

 

강태공론 姜太公論

 

 

그는 최고의 정치사상가이자 낚시애호가였다

 

 

 

사람들은 낚시하는 사람을 흔히 강태공(姜太公)이라고 표현한다. 중국과 한국 등 동양에서 낚시인의 대명사로 불리는 강태공은 어떤 사람인가?

 

 


姜太公은 중국 제나라를 세운 왕이다

 

 

강태공은 지금으로부터 약 3100년 전 사람으로 「강태공(姜太公)」  「태공(太公)」  「태공망 여상(太公望 呂尙)」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  「강상(姜尙)」 등으로 불린다. 자(字)는 자아(子牙)이고 호(號)는 비웅(飛熊)이다. 사기(史記)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의하면 백이(伯夷)의 후손으로서 본래 성은 강(姜)이고 이름은 상(尙)이었으나 강족(姜族)으로서 전통 동이족(東夷族) 출신이었던 선조가 여나라로 봉해짐으로써 봉지(封地)에 따라 성(氏)을 삼아 여상이라 하였으며, 태공망이라는 명칭은 ‘선왕 혹은 윗분(太公)이 바라고 기다리던(望)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당시 강태공을 등용한 문왕이 최고로 높여 부른 호칭이다.
강태공은 중국 주나라의 시조인 문왕과 무왕 대에 걸쳐서 태사를 지낸 인물로서, 주나라 문왕을 보좌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강군을 육성하여 제후국 간에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무왕 대에 이르러서는 부패한 은나라 주왕조를 멸망시키고(무왕 13년) 주나라를 세운 공신이다. 이후 주나라의 태사로서 도탄에 빠졌던 백성을 잘살게 하고 군사와 무역을 성하게 하였으며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공으로 제나라의 시조(始祖) 왕이 되어 태평성대의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다.
특히 제나라(지금의 산동반도) 왕으로 부임하여 통치할 때는 1년을 72후(72候, 1후는 5일)로 구분하여 자연현상 변화에 따라서 때에 맞춰 영농을 하게 하는 등 천문지리에 능하였으며, 나라 땅의 소작 배분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9:1(백성 몫 9, 나라 세 1)로 하여 백성의 몫을 넘치게 해주는 등 민본사상에 충실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국민의 세금감면 혜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나라 세를 줄여 농사를 장려하면서 농기구를 비롯한 기계를 연구하여 보급하고, 풍부한 농·공 생산품으로 인접국가와 무역을 하도록 하는 등 국제무역에도 문을 열었다. 그러는 중에도 군사전략을 연구하여 저 유명한 육도삼략의 ‘육도(六韜)’를 쓰고, 음부경(陰符經)과 태공병법(太公兵法), 태공금궤(太公金 ?)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 병서들은 후일에 손자병법을 썼던 손무가 수차례 탐독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세계 각국에서 고급과정 군사전략서로 필독하는 저서이다. 필자도 군 시절 육군대학 정규과정에서 공부를 했던 과목이다.

 

 

▲ 중국 산동성 치박시에 있는 강태공 사당의 강태공상.
 

 

 

강태공은 평생을 열심히 산 사람

 

 

강태공의 일생에 관해서는 강태공이 벼슬하기 전 80살까지 가난하게 살고(窮八十) 벼슬한 후 80살을 부유하게 살았다(達八十)고 하여 160세까지 살았다고 하는 설이 있고, 한편으로는 BC 1211년에 출생하여 BC 1072년에 사망했다고 하여 139세까지 살았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정확한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순자(荀子)와 한시외전(漢詩外傳)을 근거로 주나라 문왕을 만났을 때가 70세였고, 무왕 대에서 30년을 더 살아서 100세까지 살았다고 하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강태공은 출사 이전에는 고난의 세월을 살았다. 본시 명문가 태생이었으나 부친의 곧은 성품으로 인해 관직을 삭탈 당하고 가세가 기울어져서 스스로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태공은 은나라 수도인 조가(朝歌, 지금의 하북성 기현)에서 조릿대로 조리를 엮어 시장에 나가 팔기도 하고 소금과 밀가루 장사도 했으며 국수장사, 음식점, 소나 돼지를 잡아 파는 백정 일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잘 안 되자 배운 글로 사주풀이를 하여 연명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공사 감독을 하게 되었으나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공사의 부당성을 간(諫)하다가 쫓겨나고 말았다. 강태공의 출사 이전의 다양한 경험은 후에 주나라와 제나라를 부강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 후로는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의 주지육림(酒池肉林)과 황음무도(荒淫無道)에 실망하여 초야로 들어가서, 오직 낚시를 벗 삼아 마음을 달래가면서 뜻을 펼칠 시대를 기다리면서 학문연구에만 몰두했다. 혹자는 이 시절의 강태공 생활에 대해서 무위도식을 하면서 하릴없이 물가에 나가 곧은 바늘을 물에 넣고 허송세월을 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한심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묘사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생각은 전혀 맞지 않는 얘기인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강태공은 가장 천직인 백정 노릇까지도 하면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였으며 수없는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끈기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찾아서 시도한 사람이다. 그러다가 은나라의 주왕이 실정을 하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을 예감하고 초야에 묻혀서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군사전략을 비롯하여 정치, 인륜, 치세에 대한 공부를 했던 것이다.
만약에 이때 강태공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문왕을 만나 하루아침에 태사가 되어 나랏일을 보면서 그렇게 출중하게 정사와 군사전략 등의 임무수행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후에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굳건히 세운 후 제나라 왕이 되어 추후 춘추시대(BC 770~476년)와 전국시대(BC 475~221년)에 큰 힘을 가질 나라를 건국하고 치국했겠는가.
필자는 강태공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고 실존인물임을 고려할 때, 그의 일생의 반은 열심히 공부하여 실력을 쌓았고, 일생의 반은 치국평천하를 이루는데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가 위수(渭水, 웨이수이)에 나가서 낚시를 즐긴 것은 우리가 여가에 낚시를 나가는 것과 같이 열심히 공부하는 중 마음을 가다듬기 위한 여가 취미생활이었을 뿐이라고 본다.

 

 

                           중국 산동성 치박시에 있는 강태공 기념관

 

 

강태공의 ‘곧은 낚시’는 고기를 낚는 낚시였다

 

 

그렇다면 곧은 바늘을 사용한 낚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즉 물고기를 낚을 수도 없는 곧은 바늘을 물에 담그고 세월을 보내는 것이 한심한 일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당시의 낚시도구를 몰라서 가지게 되는 무식의 소치이다. 당시에는 실제로 물고기를 낚는 바늘 종류 중 곧은 바늘(直針)이 흔히 사용되었고, 그 바늘에 미끼를 달아서 물고기를 낚은 기록이 있고, 현존하는 실물도 있다. 이러한 곧은 바늘은 비단 중국 땅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에서도 사용되었으며, 그 유물이 출토되어 현존한다. 그리고 지금도 중국에서는 자급하여 만든 곧은 바늘을 사용해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곧은 바늘을 마치 전혀 효용가치가 없는 쭉 펴진 바늘로 묘사하여 강태공이 하릴없이 물가에 앉아 허송세월한 것처럼 잘못 인식해왔고, 임금이 찾아주는 시대가 오기만을 기다린 피동적인 기회주의자처럼 그릇되게 인식됐던 것이다. 그러나 강태공은 낚시를 해서 실제 물고기를 낚았고, 그러면서 많은 인격수양과 공부를 했던 것이다. 강태공의 일화 중에서 물고기를 낚은 모습을 찾아보면 「설원(說苑)」이라는 고사에 잘 표현되어 있다.

강태공이 70세일 때 위수에서 낚시를 하는데 사흘 밤낮동안 입질이 없어서 은근히 화가 나 있었다. 이때 인근에 사는 농부가 와서 “가는 낚싯줄에 향기로운 미끼를 달아서 쓰되 고기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해보시오”하고 조언을 해주었다(예민한 채비와 적절한 미끼, 정숙한 행동과 기다림을 강조한 것이다). 이에 강태공이 그 말을 따라서 하니 처음에는 붕어가 올라오고 다음에는 잉어가 올라왔다.     

 

 

                                                  강태공이 낚시를 한 위수 바위에 조어대라고 새겨 넣었다.

강태공과 문왕의 만남 그리고 천하통일

 

 

강태공을 만날 당시 문왕은 은나라 서쪽 제후국의 우두머리 격인 서백의 지위에 있었다. 당시 문왕은 은나라의 서쪽 제후국을 통합하여 세력을 키워가는 중에 큰 인재가 절실히 필요 하였는데, 하루는 사냥을 나가기 위해서 점을 쳐보니 ‘용이나 이무기나 호랑이나 큰곰이 아닌 인재를 얻을 것이다’하는 점괘가 나왔다. 그날은 위수의 상류지역인 반계(磻溪)로 사냥을 나갔는데, 우연히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물가에 앉아서 낚시를 하는 노조사를 보고 문답을 나누었다.

 

문왕 : 무엇을 낚고 있소이까?
강태공 : 세월을 낚고 있소이다.
문왕 : 여기는 내 땅인데 허락은 받았소이까?

강태공 : 天下非一人之天下 乃天下人之天下也 同天下之利者則得天下(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천하이니 천하의 이익을 함께하는 자만이 천하를 얻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왕은 머리를 스치는 점괘, 즉 큰 인물을 만날 것이라는 점괘를 떠 올리고 인재를 얻는 법과 천하경륜에 대한 문답을 오래한 후 강태공의 인물됨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수레에 태우고 돌아가서 스승으로 모시고, 매일 조회가 끝난 후에는 신하들과 함께 강태공의 강의를 들었다.
이후 강태공은 태사(太師, 임금의 스승이면서 임금을 대리하여 국사를 살피는 직책)로서 그동안 공부해 온 천문지리, 병법, 인륜, 치세 등의 해박한 지식을 영농과 군사전략 및 국가경영에 적용하였고, 강태공의 보좌를 받은 문왕은 나라를 강성하게 하여 천하의 2/3를 얻었으나 끝내 천하통일을 보지 못하고 뒷일을 강태공에게 부탁하고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어서 즉위한 무왕은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여 강태공을 태사로 모시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결국 무왕 13년에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개국공신인 강태공을 제후국 제나라의 시조후(侯) 왕으로 봉하였다. 이로써 강태공은 마침내 제나라의 왕이 된 것이다.
이후 제나라는 강국을 이루었고 세월이 흘러 주왕실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군웅이 할거하던 294년 동안의 춘추시대에는 200여 개 제후국 중에서 세력이 강한 5국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어서 254년 동안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는 진나라가 전국통일(BC 221년)을 이룰 때 까지 연, 진, 초, 한, 위, 조와 더불어서 주요 일곱 나라 중 하나였다.

 

 

 

                             문왕이 강태공을 수레에 태우고 떠나는 장면을 그린 그림.

 

 

강태공에 대한 재평가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강태공은 뛰어난 학자요 사상가요, 군사전략가요, 정치가였다. 그리고 강태공이 위수에서 낚시를 한 것은 학문에 몰두하는 중에 물가에 나가서 물고기를 낚으면서 활력을 재충전하는 취미생활이었다. 이러한 강태공에 대해서 오늘날 일부가 부정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온당치가 못하다. 만약에 누가 나에게 낚시를 좋아하는 강태공이라고 해 준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표현인가. 현재도 중국 산동성 치박시에는 강태공 사당과 기념관이 있고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한 시대의 영웅인 강태공을 접하고 간다.
▒ 필자연락처 http://cafe.daum/welike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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