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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루어낚시의 大父, 위수 김홍동 선생 타계
2011년 10월 4432 2305

 

謹弔

 

한국 루어낚시의 大父, 위수 김홍동 선생 타계 

 

 

허만갑 기자

 

우리나라 예술어탁의 창시자이자 루어낚시의 대부로 추앙받아온 위수(渭水) 김홍동(金洪東) 선생이 지난 9월 4일 새벽 별세하였다. 향년 96세. 6일 오전 8시 30분 서울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된 영결식에는 부인 전숙자, 아들 김인학을 비롯한 유가족들과 조객 100여 명이 참석했다. 고인의 시신은 경기도 성남영생원에서 화장한 뒤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 시안공원에 안장되었다.

 

 

▲서울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홍동 선생의 빈소.

 

낚시역사상 가장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스타

김홍동 선생의 타계 소식은 아흔여섯의 고령을 감안하여도 좀 뜻밖이었다. 기자는 불과 7개월 전 선생과 인터뷰를 했다. 당시 약간의 부축을 받기는 했으나 바깥에 나가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정정하셨다. 그때 선생과 함께 있었던 위수클럽 이정삼 회장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까지도 별 탈 없어 나와 통화까지 하셨다.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통증이 와서 병원에 가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은 잘됐으나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고통 없이 영면하셔서 그나마 슬픔 속 위안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유가족이 낚시계에는 부고를 보내지 않아서 조문객 중 낚시계 인사는 거의 없었다. 기자도 선생이 별세한 지 하루 뒤인 9월 5일에야 소식을 전해 듣고 빈소를 찾았다. 빈소에는 아들 김인학씨와 맏사위 장욱제씨, 둘째 사위 김성택씨가 조문객을 받고 있었다. 선생은 슬하에 1남5녀를 두었다. 아들 김인학씨는 인천 올림푸스호텔 사장이며, 장녀 김신자씨와 결혼한 장욱제씨는 드라마 ‘여로’에서 주인공 영구를 연기했던 당대 최고의 탤런트다.
선생께서 기력을 잃은 뒤로 오랫동안 낚시인들의 방문이 없었기에 유가족 측에서 연락할 만한 낚시인사도 없었을 것이다. 선생과 동시대를 호흡한 낚시인들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고 원로들을 기억하는 낚시계 후배들도 드물다. 상주들을 보고 찾아온 조문객은 많았으나 낚시인 김홍동을 추모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선생이 한국 낚시에 남긴 큰 족적에 비해 마지막 가는 길은 다소 쓸쓸해보였다. 위수클럽의 김원철 고문, 이정삼 회장을 비롯한 선생의 낚시제자들과 한국어탁회 이상근 회장, 한국낚시진흥회 윤병용 사무국장, 도서출판 예조원의 김국률 대표 등이 조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술어탁을 창시하고 한국낚시펜클럽 창립을 주도

김홍동 선생은 1974년 우리나라 최초의 루어낚시 클럽으로 알려진 서울릴낚시 회장으로 루어낚시 보급과 루어낚시터 개발을 이끌었고, 어탁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 예술어탁을 창시했으며, 1980년 한형주 박사와 더불어 한국낚시펜클럽을 창립했다. 선생은 전국 어탁강습 순회와 TV 출연을 통하여 낚시라는 레저를 일반 대중에 깊이 각인시켰다. 1980년 롯데백화점 낚시문화강좌, 1982년 신세계백화점화랑 어탁전시회, 1985년 부산일보화랑 어탁전시회를 열었고, 이계진, 김유미,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한 KBS ‘열한시에 만납시다’에 세 차례 출연해 어탁의 아름다움을 국민들에게 전파했다.
김홍동 선생은 일찍이 그 집안 덕에 더 주목받았던 분이다. 선생의 가문은 경북 포항에서 대대로 큰 어장을 경영한 수천석 부호였고, 처가도 서울 계동의 부유한 집안이었다. 처형 故 전숙희씨는 이화여전 영문과를 나와 여류 문필가로 명성을 떨쳤고, 처남은 파라다이스그룹의 故 전락원 회장이다. 
1916년 경북 포항 동해읍에서 김학조의 2남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홍동은 서울 휘문중교에서 축구선수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해 평양 숭실중학교, 서울 배재중학교로 스카우트되었고 체육특기생으로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 법과에 입학했다. 조선 축구팀 대표선수로 중국, 일본과 경기를 치렀던 당시 김홍동의 인기는 후일의 차범근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그를 따르던 꼬마 팬이 후일 한국 카지노계의 대부가 되는 전락원이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전락원의 둘째 누나인 부인 전숙자씨를 만나게 된다.
이렇듯 김홍동 선생의 인생 전반은 장밋빛이었으나 태평양전쟁 발발, 징집을 피한 도피생활, 6.25전쟁의 피난생활로 고난의 세월을 겪어야 했고, 해방 후 잠시 좌익청년당에 몸담았던 전력으로 이승만 정권하에서 고초를 겪으며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자유와 쏘가리를 사랑한 ‘한국의 헤밍웨이’

그러나 그런 역경 속에서도 김홍동 선생은 낚시를 통해 심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낚시를 좋아했고 신혼여행길에서 신부를 홀로 두고 낚시를 갈 정도로 광적인 기질도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낚시를 즐긴 것은 50세부터였다. 처형 전숙희씨가 발행하는 「동서문화」에서 조지훈, 박목월, 조능식 등 주당파 문인들과 어울리던 시절 위장병을 얻어 의사에게 ‘치료 불가능’이란 사망선고를 받지만 한강에서 3년간 견지낚시를 하며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는다. 예순에 이르러선 쏘가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루어낚시를 시작했고 「루어낚시 入門」을 쓴 서울릴낚시 박현재 사장을 만나 전국 강계의 루어낚시터를 섭력하며 저서 <쏘가리 따라 삼천리> <환상의 루어낚시터> <루어낚시의 매력> <어탁교실> <어탁은 예술이다>를 남겼다.
자신이 물욕이 없는 만큼 남의 물욕도 쉽게 용인하지 못한 선생은 시류에 어울리는 삶을 살지 못했다. 평생 권력에 기댄 적 없고 굴복한 적도 없으며 아이처럼 천진한 열정만을 추구해왔다. 그런 그에게 낚시는 구도의 길이자 종교였다. 김홍동의 제자들은 “중국에 강태공이 있고 영국에 아이작 월튼이 있고 미국에 헤밍웨이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홍동이 있다”고 말한다. 평생 꿈과 자유를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선생의 정열은 낚시인들의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등불로 남을 것이다. 

 

▲김홍동 선생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 유명 탤런트였던 맏사위 장욱제씨(오른쪽에서 두 번째)도 상주로 조객들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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