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장바구니 주문배송조회 고객센터
과월호신청
Home> 뉴스&칼럼 > 뉴스&피플
낚시춘추 40주년 특별 인터뷰 - 낚시춘추 창간인·한국낚시진흥회 초대 회장 한형주 박사
2011년 01월 3432 240

 

낚시춘추 창간인·한국낚시진흥회  초대 회장 한형주 박사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은 낚시춘추를 만든  것”

 

 

| 허만갑 기자 |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 있는 한형주 박사. 83세의 고령에도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다.<사진 이기선 기자>


 

원파(圓波) 한형주(韓炯周) 박사(83). 지난 1971년 낚시의 불모지인 이 땅에 『낚시춘추』를 창간하고, 1986년 낚시인의 권익 보호를 위해 『한국낚시진흥회』를 설립한 우리나라 낚시계의 거목이자 한국낚시사의 산 증인이다.
1928년 함경남도 신창에서 의사 한병만(韓秉萬)과 이시돌(李時突)의 3남2녀 중 2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연극과 미술, 음악을 사랑한 활달한 소년이었다. 일찍이 3.1 만세운동 때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과대학의 전신) 학생으로 군중행렬을 이끌다 옥고를 치른 부친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그는 일제 말기 중학교 학우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다 함흥도청의 고등계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함남중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18세의 앳된 선생님이 되어 함흥 신흥정공립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광복을 맞이한 그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예과에 입학하기 위해 단신 월남한 뒤 남북 분단을 맞아 북에 있는 가족과 영영 이별하게 된다.
이후 가난한 고학생으로 모진 외로움과 싸우며 학업에 매진한 그는 1.4후퇴 때 피란지 부산에서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육군 군의관 중위로 임관하였고, 역시 피란 도중 부산에서 숙명여대를 졸업한 부인 김명희(金明姬)씨를 만나 남한에서 비로소 가족을 만들게 되었다.

 

 

서울의대 입학 위해 단신 월남한 뒤
부모형제와 생이별

 

결혼과 함께 생활이 안정되면서 비로소 낚시인 한형주의 삶이 시작되었다. 양수리 59육군병원 군의관 대위로 근무할 때부터 잡게 된 낚싯대는 어릴 때 신고산에서 할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익힌 낚시의 열정을 되살려 이후 평생을 낚시라는 취미와 더불어 살게 된다.      
1960년 8년간의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서울 동대문구에 개인병원을 개설한 후 내과와 신경과로 명성을 떨쳤으며 1968년엔 제주도 서귀포에 사비를 들여 「서울대학교 풍토병 연구소 분원」을 설립하여 모교인 서울대학교에 무상으로 사용토록 했다.
그리고 1971년 정계와 의료계, 문단 조우들의 권유에 따라 우리나라 최초의 낚시월간지인 『낚시춘추』를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1977년 서울대학교 후배인 故 정효섭 다락원 회장에게 낚시춘추를 물려준 뒤 본업인 의학에 열중하여 그해 서울의대 외래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낚시에 대한 애정은 식을 길이 없어 1986년 낚시터 환경보호와 낚시인 권익보호, 건전한 낚시문화 계몽을 취지로 전국의 낚시명사들과 함께 『(사)한국낚시진흥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다. 『(사)한국낚시진흥회』는 1996년 한강환경관리청과 낚시터 환경오염 합동단속을 벌인 바 있고 97년엔 낚시면허제 실시에 대한 반대의사를 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사)한국낚시진흥회』는 4대 회장 서기원씨(전 KBS 사장) 등을 거쳐 현재는 김명제(바낙스 대표), 정연화(해동조구사 대표)씨가 공동회장을 맡고 있다.

 

▲초창기 낚시춘추 편집회의 광경. 오른쪽이 한형주 박사  ▲1986년 9월 13일 전국의 낚시명사 61명이 발기하여 이룩된 한국낚시진흥회 창립총회를 마치고.

 

▲2010년 낚시춘추 30주년을 기념하여 30년간 발행한 낚시춘추를 쌓아 놓고 고 정효섭

회장(오른쪽)과 기념사진을 찍은 한형주 박사.

 

지난 5월, 한형주 박사는 여든셋이 될 때까지 50년간 이끌어온 병원을 폐업하고 부인과 함께 경기도 용인으로 내려와 신갈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하갈동 삼성노블리카운티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신갈저수지에서 낚시도 하고 이따금 외출하여 문우회 회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골프도 치면서 건강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낚시춘추 창간 40주년을 맞아 2011년 1월호에 한형주 박사의 인터뷰 기사를 싣기 위하여 11월 26일 자택을 방문한 낚시춘추 취재진을 한 박사는 아버지처럼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낚시잡지를 만들면 어떻겠느냐 얘기했더니 다들 쌍수를 들고 환영해요. 문인낚시회에서 모두 기고하겠다고 나섰으니 출발부터 필진 홍수였죠. 자유당 중진으로 당시 국회의장을 지낸 이재학 의장을 비롯해 특히 나와 같은 의사들이 크게 반겼어요.”

 

“그래, 요즘 책은 잘 팔립니까? 요즘 사람들이 도통 책을 봐야 말이지.”
(한형주 박사는 우리(나와 이기선 사진부장)를 보자마자 객지에 나가 사는 자식들 보듯 걱정스런 눈빛으로 안색부터 살핀다. 그래서 나도 고향집에 온 자식처럼 호기롭게 대답했다.)

박사님, 걱정 마세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팔리는 낚시잡지, 낚시춘추니까요. 
- “책 좀 얇게 만들면 안 돼요? 아이구~  너무 두껍고  너무 호화로워! 매달 이렇게 만들려면 얼마나 힘이 들어. 제작비도 많이 들 텐데… 일본 <츠리비토> 보니까 낚시춘추 반도 안 되더만….”
낚시춘추만 종합지고 나머지 잡지들은 다 바다, 루어, 붕어 전문지들이에요. 그런 전문지들과 분야별 낚시정보를 각각 경쟁해야 하니까 전체 볼륨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 “요즘 낚시전문지들이 그렇게나 많습니까?”
(한 박사님께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간되는 낚시잡지들을 열거해드리자 깜짝 놀란다.)
“조선일보에서 만든 월간낚시가 없어진 후 낚시춘추는 이제 경쟁자가 없겠구나, 참 다행이다 생각했는데 그렇게 낚시잡지가 많이 생겼을 줄 몰랐네요.”
낚시터가 그립지  않으십니까? 
- “그립다마다요. 하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낚시는 자주 못 다니고 대신 골프를 치러 다닙니다. 낚시만큼 잔재미는 없지만 운동이다 생각하고 다니고 있어요. 낚시는 못 가더라도 늘 물이 보이는 곳에 살고 싶어서 신갈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여기로 이사 왔어요.”
새해가 되면 낚시춘추가 창간 40주년이 됩니다. 
“그래요. 정효섭 사장하고 30주년 기념사진을 함께 찍으면서 이걸 표지사진으로 하면 어떨까 얘기한 게 엊그제 같은데 또 10년이 흘렀네. 40이라는 나이는 사람으로 치면 가장 활발하고 진취적인 나이입니다. 내가 낚시춘추를 창간했을 때 마흔셋이었는데, 세상에 겁나는 게 없던 때였지. 잡지도 마흔 살이 되면 전성기라고 봐야 합니다. 우리 집에 낚시춘추가 매달 배달돼 올 때마다 난 맨 뒷장의 판권부터 봐요. 거기 보면 발행인 앞에 고문 한형주라고 딱 적혀 있잖아요. 그걸 볼 때마다 참 뿌듯해요.”
출판인이 아닌 의사로서 잡지를 만든다는 게 쉽지  았을 텐데 어떤 계기로 낚시춘추를 창간하게 됐습니까? 
- “그해(70년) 겨울에, 그때는 얼음낚시를 모르던 시절이라 맘에도 내키지  않는 사냥에 손을 대고 있는데 홍순일(洪淳一, 낚시춘추  대 편집장)이라는 20대의 젊은 기자가 찾아와서 낚시월간지 발행을 간곡히 권유하는 겁니다. 낚시인구는 급증하는데 도대체 우리나라 어디에 어떤 댐이나 저수지 수로가 있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고 낚시기법이나 정보를 수집하고 교환할 길이 없으니 낚시월간지를 만들어 그런 정보들을 담아내면 낚시인들이 많이 보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너무나 갑작스런 이야기여서 일단 거절했지만 사실 당시 한양낚시회 회장을 맡고 있던 나로서도 낚시터 선정이 가장 큰 고충이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낚시터 지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막연한 소망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얘기를 주변에 했더니 다들 쌍수를 들고 환영해요. 문인낚시회에서 모두 기고하겠다고 나섰으니 출발부터 필진 홍수였죠. 자유당 중진으로 당시 국회의장을 지낸 이재학 의장을 비롯해 특히 나와 같은 의사들이 크게 반겼어요. 광주의대 명예교수였던 손철(孫徹) 박사님과 부산 MBC 전무를 지낸 김종한(金鍾漢) 선생이 특히 격려해주셨습니다. 결국 71년 3월호를 창간호로 낚시춘추는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71년 1월 어느 날 당시 용산낚시회장으로 있던 우리나라 지도계의 원로 박종하(朴鐘夏) 선생을 편집인으로 모시고, 홍 편집부장, 송소석 선생 그리고 김동운(金東雲) 사진기자와 함께 막 개통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무작정 호남지방으로 첫 취재를 갔습니다. 가다가 전주 삼례에 있는 주교저수지라는 곳이 좋아 보여 그곳에서 낚시를 했는데 용케 무넘기통에서 잔 붕어 수십  마리를 낚아서 그것으로 창간호 표지를 찍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부인과 함께(1964년)  ▲육군 군의관 대위로 있을 때인 30세의 한형주 박사

 

 

“서울의 모든 낚시회들이 낚시춘추에 매월 소개되는 새로운 낚시터들을 보고 찾아갈 정도였어요. 낚시에세이, 낚시소설, 낚시만화, 낚시꽁트 등에 우리나라의 저명한 문인들이 적극 참가하면서 낚시문화가 낚시춘추를 매체로 향기롭게 꽃피게 되었습니다.”

 

창간호 표지에 실린 낚시춘추 제자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한문을 잘 모르니 한글 제자로 바꿔 보자는 말도 있지만 이 제자를 아끼는 낚시인들이 워낙 많아서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낚시춘추 제자는 누가 만든 것입니까? 
- “낚시춘추라는 제자는 나의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동기동창인 하농 김순욱 박사에게 부탁해 얻게 된 것입니다. 김 박사는 모양이 좋고 정중한 맛이 풍기는 전서를 하고 싶었지만 낚시라는 한글이 섞여 있어 밸런스를 맞춰 예서로 했다는데 처음 보는 순간 아름답고 친근감이 가서 마음에 들더군요.”
당시 낚시춘추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 “서울의 모든 낚시회들이 낚시춘추에 매월 소개되는 새로운 낚시터들을 보고 찾아갈 정도였어요. 또 얼음낚시와 밤낚시를 최초로 보도하면서 붕어낚시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요. 보트낚시, 수초낚시 같은 신기법의 보급에 앞장섰고 바다낚시터까지 개척했습니다. 무엇보다 낚시에세이, 낚시소설, 낚시만화, 낚시꽁트 등에 우리나라의 저명한 문인들이 적극 참가하면서 낚시문화가 낚시춘추를 매체로 향기롭게 꽃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적자운영에 허덕였다고 들었습니다. 
- “사람들이 낚시춘추를 즐겨 보기는 하는데 그때도 낚시점에서 빌려보지 돈을 주고 사서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더구나 잡지란 게 책만 팔아선 타산이 맞지 않고 광고가 붙어야 하는데 당시엔 낚시산업도 발전되지 않아서 광고 수입이 별로 없었지요. 창간부터 6년 6개월간 줄곧 적자였습니다.”
낚시춘추를 괜히 창간했다고 생각하신 적은 없습니까? 
-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이 낚시춘추를 창간한 겁니다. 낚시춘추를 창간한 뒤로 내가 그야말로 스타가 됐어요. 당시 내가 낚시터에 가면 “한 박사다”하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맞이하고 좋은 책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전라도고 어디고 가면 그 지역의 낚시연합회로부터 칙사 대접을 받았으니 그 보람이라는 건… 잡지 하나 만들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인가 싶었으니 얼마나 잘한 일입니까. 지금도 골프 치러 가면 사람들이 “여기 낚시춘추 창간한 한형주가 왔다”고 해요. 골퍼들이 대부분 왕년에 낚시꾼들이라 다 알아봐요. 그래서 나는 인생에 있어서 경제를 떠나 문화면에서 좋은 일을 하는 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지금도 거듭 깨닫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정효섭 회장과는 어떤 인연으로 만났습니까? 
- “내가 정효섭씨를 만날 때쯤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낚시춘추 발행에 대한 타성이 생기는 걸 느끼고 있을 때였어요. 7년 동안 전국의 낚시터 소개도 대충 마무리가 되었고 새로운 낚시장르 보급도 궤도에 올라 창간 초기와 같은 감격적인 요소들이 거의 없어진 것이죠. 그러던 어느 날 낚시춘추에서 손을 떼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다가왔습니다. 세무당국이 낚시춘추사에 세금을 부과하면서 광고수입만 따로 내 병원 수입에 합산시켜 종합소득세로 부과하는 것이에요. 낚시인들을 위한 문화사업이라 생각하고 적자도 감수해온 나의 순수한 의지를  전혀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어요. 이 상태로 가다가는 낚시춘추가 문제가 아니라 병원 운영이 위협을 받겠다 싶어서 주변에 인수자가 나서면 넘겨야겠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인수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여럿 나타났는데 하나같이 맘에 안 들어요. 낚시춘추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더군요. 그러던 차에 정효섭씨가 나를 찾아왔어요. 보니까 첫인상이 맘에 들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니 믿음이 가더군요. 당시 서울대 문리대는 최고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었죠. 말을 나눠보니까 이 사람이면 낚시춘추를 살리겠다 싶어서 그 자리에서 결정했어요. 나와 달리 정 사장은 기자 출신이니까 편집장도 따로 뽑을 필요 없겠고 편집기자만 한두 명 뽑으면 충분히 운영해나가겠다 생각한 것이죠. 솔직히 정효섭씨가 내 어깨에서 큰 짐을 내려준 겁니다.”

 

▲신갈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용인의 자택에서 부인과 함께.

 

“낚시산업이 부흥하려면 낚시용 어족자원이 많아져야 합니다. 물고기가 많고 잘 낚이면 낚시꾼도 늘어날 수 있지만 물고기가 줄어들면 낚시꾼도 줄어들 수밖에 없을 거예요.”

 

2000년대 들어 한국의 낚시산업이 침체국면을 좀체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낚시계의 원로로서 한국낚시가 부흥할 수 있는 길을 일러주신다면? 
- “우리나라 낚시인구가 500만이 넘는다는 말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고 오히려 낚시인구는 점점 줄고 있다고 봐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한창 낚시를 다닐 때만 해도 야외 레저랄 게 등산하고 낚시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얼마나 다양한 레저들이 생겨났습니까? 그리고 낚시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도 요즘은 고기가 너무 안 낚여서 재미가 없다고 해요. 낚시산업이 부흥하려면 낚시용 어족자원이 많아져야 합니다. 물고기가 많고 잘 낚이면 낚시꾼도 늘어날 수 있지만 물고기가 줄어들면 낚시꾼도 줄어들 수밖에 없을 거예요.” 
과거엔 낚시계에 정재계의 명사들이 많았고 이름난 문인들도 많았는데 요즘은 그렇지 못해서 낚시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 “옛날엔 대단한 낚시꾼들이 많았지요. 그중에서도 특히 이재학 국회의장은 낚시춘추 창간기념사도 써주실 만큼 낚시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는데, 그분이 일찍 돌아가신 게 한국낚시계엔 큰 불행이지요.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 아홉시에 나하고 통화를 했어요. 내일 낚시 갈 텐데 어디로 가면 좋겠느냐 물어봐요. 그래서 예당지로 가보시라 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홍천으로 견지낚시를 가다가 한강변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셨다고 하여 안타까웠습니다.”
한 박사님이 낚시계에 남긴 또 하나의 큰 업적이 한국낚시진흥회 설립 아니겠습니까. 
-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 낚시는 눈부신 발전을 하였습니다. 낚시인구가 급증하고 낚시산업도 발전하고 낚시가 차지하는 위치가 레저 중에서 대단했지요. 그래서 낚시계를 대표하는 새롭고 건실한 단체가 있어야겠다 생각했어요. 한국낚시진흥회가 출범하기 전에 수산청 산하의 한국낚시연합회가 있었지만 이웃나라 일본의 낚시계를 살펴보아도 실행단체와 기획단체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우리나라도 기획단체가 있어야겠다, 그래서 그 전에 잠시 생겼다가 해산된 한국낚시펜클럽 멤버가 중심이 되어서 전국의 유명한 낚시인 61명의 발기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낚시진흥회 창립총회가 열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2년 5개월 후에 한국낚시진흥회를 체육부 산하의 사단법인체로 등록하고 난 뒤에 이제 나는 앞으로 1년간만 더 하고 회장직을 그만 두겠다고 했어요. 내가 이 나라 낚시계에 하고 싶었던 일들은 다 했다는 안도감이 들고 나이도 환갑이 지났을 때라 젊고 유능한 새로운 회장이 이끌어갔으면 했지요.”    
(한국낚시진흥회 창립총회에서 선출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한형주, 부회장:김시철 김인선 안강태, 자문위원:최태호 최신해 최기철 박연희 김한 김사룡 손철 백만기 홍일해 서기원, 이사:곽인송 김근희 김찬식 박영덕 박현재 송소석 심동섭 이일섭 장윤석 장종록 정기조 정태성 정효섭 최운권 추연근 홍성유, 감사:김창락 손팔주)
한형주 박사님에게 낚시란 무엇입니까? 
- “나는 낚시로 인해서 행복이 뭔지를 알았고 낚시 때문에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하며 살고 있어요. 그동안 기쁘고 즐거웠던 일도 많지만 나에겐 북녘 고향에 부모형제를 두고 열여덟에 삼팔선을 넘어온 뒤로 60년 넘게 망향에 사무친 아픈 세월이 있었어요. 그 세월 속에 낚시가 있었기에 고비마다 별 탈 없이 살아왔고 그리움에 사무친 외로운 세월을 달래주고 잊게 해준 것이 낚시보다 큰 것이 없어요. 낚시는 내게 취미 이상으로 내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낚시는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 “어릴 때 할아버지가 낚시를 좋아하셔서 할아버지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조전손전으로 배운 겁니다. 아버지는 공의로서 함흥에 정착할 때까지 신창, 신포, 신고산, 차호 등 함경남도의 소읍을 전전했기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녔습니다. 나는 신고산에 살던 칠팔세 때 할아버지에게 처음 낚시를 배웠습니다.”
부친은 낚시를 즐기시지 않았습니까? 
- “아버지는 낚시보다 테니스, 스키, 당구, 바둑을 즐기셨어요. 한 마디로 신식 하이칼라 멋쟁이었지. 특히 테니스 실력은 함경남도 선수권을 차지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부친이 의사였고 조부님도 한의사를 하셨다니 의사가 가업인 셈이군요. 
- “나는 사실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들었거든. 아버지도 내 그림에 대한 소질은 인정하셨지만 그래도 내 미래를 위해선 의사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 내가 월남할 때 나를 부르더니 서울에 올라가면 곁눈질하지 말고 의과대학에 응시하라고 간곡히 분부하시는 겁니다. 아버지는 내 30년 선배인 셈입니다. 지금도 매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원 명부를 받으면 색인란에 아버지의 성함이 있어요. 나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의대에 들어갔지요. 내가 어릴 때 김서방이라 부르는 벙어리 물지게꾼이 있었는데, 물지게를 지고 대가로 받은 동전을 잃어버릴까봐 입에 물고 잠들었다가 그만 목구멍에 걸려 엉엉 울면서 병원에 아버지를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얼른 목구멍을 벌려 동전을 꺼내 그 지게꾼을 살리셨죠. 내가 놀라서 서 있으니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형주야, 김서방이 참 불쌍하지! 저런 불쌍한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 그렇지? 말씀하셨어요. 그때 나도 훌륭한 의사가 되어야겠다 맘속으로 다짐했죠.”

 

“나는 낚시로 인해서 행복이 뭔지를 알았고 낚시 때문에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하며 살고 있어요. 그동안 기쁘고 즐거웠던 일도 많지만 나에겐 북녘 고향에 부모형제를 두고 열여덟에 삼팔선을 넘어온 뒤로 60년 넘게 망향에 사무친 아픈 세월이 있었어요. 그 세월 속에 낚시가 있었기에 고비마다 별 탈 없이 살아왔고 그리움에 사무친 외로운 세월을 달래주고 잊게 해준 것이 낚시보다 큰 것이 없어요. 낚시는 내게 취미 이상으로 내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이 보고 싶겠군요. 
- “특히 명절 때가 되면 더 그립습니다. 의과대학 시절 방학이 되면 친구들이 모두 고향으로 떠나고 혼자 남는 게 참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하루는 함께 하숙하던 친구를 배웅하러 서울역에 갔다가 혼자 돌아 나오는데 환송 나온 사람들도 돌아간 뒤라 쓸쓸한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어요. 내 친구는 집에 갔다. 집에 가서 부모님을 만나겠지. 또 어제 백화점에서 산 선물을 동생들에게 하나하나 나누어주면 모두들 얼마나 좋아하겠나. 그렇게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요. 나도 이북 고향 땅에 부모형제가 있는데. 그 날 밤 불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하숙방에 웅크리고 누워서 정말 서럽게 울었어요.”
그런 외톨이 신세를 면하게 해준 분이 지금의 부인이시군요. 
- “우리는 6.25 동란 중인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만났습니다. 그때 나는 부산의 전시연합대학 가교사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군의관 중위로 임관되었고 아내도 그곳에서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부산 남성여고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그해 가을에 내 중학교 동기생이 결혼을 해서 내가 신랑의 들러리를 서게 됐는데 그때 신부의 들러리를 서게 된 것이 아내였어요. 그렇게 부산에서 연애를 하다가 12월에 중공군과 대치 중인 중부전선 6사단에 전속 명령을 받은 겁니다. 부산역에서 헤어지고 전선으로 향하는데 그 서글픈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1년간 서로 편지만 주고받다가 서울의 수도육군병원에 돌아오니 아내도 마침 서울로 전근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3년간 교제 끝에 결혼했습니다. 내가 8년간의 군생활을 제대하고 와보니 장인께서 동대문구 용두동의 큰길가에 아담한 2층집을 마련하고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 집의 2층에 진료실을 차리고 아래층에서 살림을 하면서 개원의사의 첫발을 내디뎠죠. 나는 아내를 만난 게 내 삶에 최고의 행운입니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행복은 뭐냐? 결국 가정에 있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외간에 속 안 썩이고 원만하게 살아온 게 다 아내 덕분이라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낚시인들에겐 낚시춘추 창간인으로서 유명하지만 의사로서도 명망이 높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나는 내과 전공의사로서 의학박사 학위도 서울대학교 대학원 내과에서 받았습니다. 내 병원은 처음부터 내과와 신경과를 표방했는데 당시만 해도 신경과 전문의가 거의 없었습니다. 스트레스라는 말조차 없었을 때니까. 그런데 환자를 받아보니 80%가 심신의학에 해당되는 환자여서 놀랐어요. 사실은 내가 신경과 전문의가 된 것은 순전히 타의에 의한 것이었어요. 전쟁이 막바지였던 1953년에 전방 사단에 배속되어 연대의 의무대장으로 매일 밤 야습해오는 중공군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우연히 서울의 수도육군병원으로 전속명령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곳에 신설된 정신신경과 교육대에 입대하라는 명령을 받은 겁니다. 지원도 하지 않았는데 내 전공과는 상관도 없는 정신신경과 교육대라니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대학교 때 스승이신 유석진 선생님께서 나를 위해 포탄이 떨어지는 곳에서 빼내고자 배려해주신 것이었어요. 전쟁이 끝난 후 처참한 분위기 속에서 정신신경과 환자가 급증했으니 유석진 선생님이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지요. 군에서 제대하고 병원을 개원한 지 반 년이 지나면서 환자가 많았습니다. 나는 피를 보는 것이 지겨워서 외과의가 되는 것을 포기했어요.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신경과 전문의가 되어 수많은 환자를 치료했으니 참으로 운이 좋았던 거지요.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잘했다 싶은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가장 잘한 일은 낚시춘추를 창간한 것이고, 두 번째로 잘한 일은 제주도 서귀포에 ‘풍토병연구소’를 지은 겁니다. 그때 우리나라엔 기생충이 대단히 기승을 부렸고 그게 참 안타까웠어요. 그 후 풍토병이 지금처럼 박멸되었으며 풍토병연구소는 거기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낚시춘추 운영하느라 돈을 많이 쓰셨는데 풍토병연구소 짓느라 또 큰돈이 들어갔겠군요. 
- “돈 관리는 아내가 했으니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병원 수입에서 많은 투자액이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돈을 쓰시면 부인께서 싫어하지 않던가요? 
- “싫어하지 않았어요. 값진 일에 쓰는 돈인데. 내 아내도 사회사업에 관심이 많아요. 아내는 숙명여대 학생회장과 총동창회장을 했고 그 후 숙명학원 재단이사로 있으면서 ‘성숙한 사회 가꾸기 모임’의 공동대표였던 나를 음으로 양으로 돕고 좋은 일에는 많은 협조를 해주었습니다.”
박사님의 꿈은 무엇입니까? 
- “통일이 되어서 고향에 두고 온 동생을 만나는 것이지요. 부모님과 형은 생존해계실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동생은 살아 있을 것으로 봅니다. 죽기 전에 통일이 되어 고향에다 좋은 일 하고 싶은 게 제 마지막 남은 꿈입니다. 요즘 북한의 김정일이 하는 짓을 보니까 북한체제가 곧 무너지겠어요. 나라가 재산이야? 아들한테 물려주게. 그리고 또 하나 꿈이라면 우리나라가 더 부강한 나라가 되는 거예요. 이 나라와 이 사회가 없었다면 나는 집시처럼 유랑했을 것이고 의사라는 직업도 가질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응당 내 몸과 마음을 바쳐서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박사님이 불러서 방에 걸어둔 세 점의 유화를 구경시킨다. 모두 손수 그린 작품인데 화가가 꿈이었던 한 박사는 38세 때 우리나라 유화계의 중진인 박득순(朴得錞) 화백에게 1년 넘게 정식으로 유화를 배웠다.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색채가 아름답고 구도가 평화롭다. 자랑하고 싶은 건 자랑해야 하는 호방한 품성을 이날도 아낌없이 보여주셨다. 마지막으로 이기선 사진부장의 소매를 잡아끌며 당부의 말씀을 덧붙였다.)
“그나저나 사진이 잘 나와야 할 텐데. 많이 찍었지? 너무 늙어 보이면 그 사진 쓰지 마.”
걱정 마십시오, 박사님. 정 연세 들어 보이면 저희가 컴퓨터로 뽀샵 처리해드릴게요. 
(그러나 포토샵은 필요 없었다. 사진 속에 환하게 웃고 있는 한형주 박사는 영원한 낚시꾼 청년, 멋쟁이 젊은 오빠였다. 한 박사님, 낚시춘추가 50주년 그리고 60주년이 되는 날까지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 낚시광장의 낚시춘추 및 Angler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 침해(무단 복제, 전송, 배포 등) 시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