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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춘추 40주년 특별인터뷰 - 한국 루어낚시의 대부, 예술어탁의 창시자 위수 김홍동
2011년 02월 5951 253

 

 

한국 루어낚시의 大父, 예술어탁의 창시자  渭水위수 김홍동

 

쏘가리를 사랑하고 자유를 갈망한 한국의 헤밍웨이

 

 

ㅣ허만갑 기자ㅣ

 

 

▲새해에 96세를 맞이한 위수 김홍동 선생. 여전히 정정한 모습에 온화한 표정으로 낚시춘추 취재진을 맞아주었다.<사진 이기선 기자>

 

맑고 찬 공기가 청계산을 감싸고 있던 지난 1월 5일, 의왕시 포일동의 위수(渭水) 김홍동(金洪東) 선생 댁을 방문하였다. 한국 루어낚시의 대부로 추앙받는 김홍동 선생은 새해에 96세를 맞이하였다. 지금 살아계시는 낚시계 원로 중 최고령이다.
3천평이나 되는 넓은 대지에 지은 선생의 저택은 생각보다 아담하였고 실내는 더 소박했다. 부인 전명희(田明禧) 여사가 취재진을 맞아들인 뒤 낮잠을 주무시던 선생을 깨우셨다. 95세의 전명희 여사는 정정하였다. 
김홍동 선생은 일찍이 그 집안 덕에 더 주목받았던 분이다. 김홍동 선생의 가문은 경북 포항에서 대대로 큰 어장을 경영한 수천석 부호였고, 처가도 서울 계동의 부유한 집안이었다. 처형 故 전숙희(田淑禧)씨는 이화여전 영문과를 나와 여류 문필가로 명성을 떨쳤고, 처남은 저 유명한 파라다이스그룹의 故 전락원(田樂園) 회장이다. 선생은 전명희 여사와 슬하에 1남5녀를 두었는데, 아들 김인학씨는 현재 파라다이스호텔 사장이며, 맏딸 김신자씨와 결혼한 맏사위는 드라마 ‘여로’에서 주인공 영구를 연기했던 당대 최고의 탤런트 장욱제다.
이런 집안배경 속에서 선생은 평생 직업을 갖지 않은 채 남들이 꿈꾸지 못할 삶을 살았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배재중-보성전문 시절 축구스타로 화려한 청년기를 보내며 명문가의 딸과 결혼한 그의 인생 전반은 장밋빛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좌우익의 대립,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기 속에서 의도하지 않은 고난의 세월을 겪으며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그런 김홍동 선생은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다시 낚시를 시작하며 망가진 심신을 추스를 수 있었고 낚시와 더불어 제2의 인생 후반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등장으로 한국 낚시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위수가 남긴 대표적 업적을 꼽자면 루어낚시의 개척, 예술어탁의 창시, 한국낚시펜클럽 창립, 세 가지로 집약된다. 그러나 전국 어탁강습 순회와 TV 출연을 통하여 낚시라는 레저를 일반 대중에 깊이 각인시킨 공로야말로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타고난 매력과 넘치는 에너지, 거기에 막강한 처남의 지원을 받아서 김홍동 선생은 어탁과 루어낚시라는 새로운 세계를 사람들에게 알렸다. 1980년 롯데백화점 낚시문화강좌(롯데낚시 이태희 주최, 한국낚시펜클럽 후원), 1982년 신세계백화점화랑 어탁전시회, 1985년 부산일보화랑 어탁전시회는 김홍동 선생이 아니었다면 열 수 없는 것이었다. 선생은 방송에도 여러 차례 출연하였다. 그중 이계진, 김유미,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한 KBS ‘열한시에 만납시다’엔 세 차례나 출연해 돛새치낚시 무용담을 곁들인 컬러어탁 시연으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한국낚시역사상 그만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스타는 없었다.

 

한국낚시역사상 최고의 낚시스타


안방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신 김홍동 선생은 방문객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이 날 선생 댁엔 나와 이기선 사진부장, 그리고 위수클럽의 수인(水人) 이정삼(李正三) 회장, 박선근, 유준재 회원이 방문하였다. 아흔여섯의 연세에 비해 선생은 건강하였다. 요즘은 추워서 실내에 계시지만 가을까지 매일 산책을 즐겼다고 한다. 물론 근력이 쇠하여 낚시를 다니지는 못한다. 기억력도 감퇴하여 충분히 알 만한 몇 명의 조우 이름을 들먹여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낚시 이야기가 나오자 대번에 눈빛이 달라지며 과거 진양호 대평, 영월 목골 등에서 낚시했던 이야기를 더듬거리나마 정확히 재현하였다. 천생 꾼이시다.
김홍동 선생의 낚시 장자방으로서 30년간 선생과 함께해온 이정삼 회장은 “작년 가을까지도 말씀을 잘 하셨는데… 생각보다 많이 쇠약해지셨다. 이래갖고 인터뷰가 되겠느냐”며 안타까워했다. 나로선 좀 더 일찍 선생을 찾아뵙지 못한 것이 아쉽고 송구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김홍동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은 육성인터뷰 대신 지나간 기록에 의존해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은 선생이 낚시춘추와 단행본에 직접 썼던 저술과 故 송우 한국견지낚시클럽 회장이 생전에 김홍동 선생의 구술을 토대로 정리한 글, 그리고 수인 이정삼 회장의 증언을 종합하여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포항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 축구팀 대표선수까지

1916년 경북 포항 동해읍에서 김학조의 2남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홍동은 구룡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고보(경북고등학교의 전신)에 지원하였으나 입시당일 수험표를 빠뜨리고 가는 바람에 첫 시험인 수학시험을 보지 못해 낙방. 그러나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서울로 가겠다고 부모를 설득하여 당시의 명문 휘문중교에 응시해 합격하였다(당시의 학제는 5년제 소학교→5년제 중학교→2~3년제 전문학교였다. 즉 중학교가 지금의 고등학교 단계를 겸하였다).
김홍동은 휘문에서 축구선수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골이 장대한 건각의 김홍동은 ‘비호’라는 별명을 얻었다. 2학년 때 서울에서 중등연맹전이 열렸는데 팔을 다친 선배 대신 윙으로 출전하여 골을 터뜨리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후 각 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잇달아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서울 배재중학교로 옮겼다. 배재 시절 경성과 평양이 겨룬 경평축구전에서 맹활약한 김홍동을 신문에서 ‘배재팀의 백넘버 나인 김홍동’으로 사진과 함께 소개하기도 했다. 김홍동은 체육특기생으로 장학금까지 받으며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 법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조선 축구팀 대표, 즉 국가대표팀 선수로 북경과 동경을 다녀왔다. 그때 김홍동이 누린 인기는 후일의 차범근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그를 따르던 팬 중에 교동국민학교에 다니던 꼬마가 매일 경기장을 찾아왔는데 그가 후일 한국 카지노계의 대부가 되는 전락원이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전락원의 둘째 누나인 지금의 부인 전명희씨를 만나게 된다. “한복을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기생인 줄 알았다”고 김홍동 선생이 술회할 정도로 전명희씨는 미인이었다. 명동 YMCA에서 열린 축구스타와 명문가 딸의 결혼식은 호화로웠고 두 사람의 앞날엔 행복만이 펼쳐져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운명은 결코 너그럽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은 막바지로 치달았고 보성전문 학생들에게도 징집명령이 떨어졌다.    
징집을 피해 포항으로 내려온 김홍동은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대구헌병대 포항주재소에 수감되었다가 부친 친구분들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으나 자신을 때리는 순사를 홧김에 받아쳐 폭행죄로 다시 수감되었다. 다행히 그가 태평양전선으로 끌려가기 전에 일본은 패망하였고 8.15 광복을 맞이한다.
해방이 되자 경북에선 좌익 계열의 민족주의자 여운형의 주도하에 건국준비위원회가 설립되었고, 건준에서 김홍동을 주목하였다. 부호의 아들에 일본 순사를 때려눕힌 영웅이었던 김홍동은 정치세력 확대를 꾀하던 여운형 계열로선 더없이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결국 회유에 못 이겨 건준 청년부의 책임자로 잠시 일했지만, 정치적 색채가 너무 공산주의로 흐르자 발을 빼고자 부인과 함께 서울로 야반도주했다. 그러나 건준에서 잠시 일한 이 경력은 ‘빨갱이’란 낙인으로 남아 이후 이승만 정권하에서 두고두고 김홍동 선생을 괴롭히게 된다.

 

낚시로 되찾은 생명


▲'배재팀의 백넘버 나인 김홍동' 경평축구전에서 맹활약하며 축구선수로 명성을 떨칠 때의 모습이다.

 

 

 

 

 

 

 

 

 

 

 

 

 

 

 

 

 

 

 

 

 

 

 

 

 

 

 

 

 

 

 

김홍동 선생은 어릴 때부터 낚시꾼 기질이 있었다. 봄이 오면 선생의 집에선 파종할 때 씨앗으로 쓸 수백 가마의 밀을 씻기 위해 인부들을 샀다. 뿌연 밀 씻은 물이 흘러가면 하구에서 감성돔 떼가 와글와글 몰려들었고 김홍동은 인부들이 만들어준 낚싯바늘에 갯지렁이를 꿰어 포항에서 ‘뻬차리’라 부르던 감성돔을 한도 없이 낚았다. 그래서 선생은 감성돔을 귀한 고기라 생각하지 않았다. ‘감성돔 회가 최고다’라고 주장하는 인사가 있으면 ‘고기 맛도 모른다’고 면박을 주곤 했다.    
일단 낚시를 가고 싶으면 참지 못하는 그에겐 황당한 낚시일화가 부지기수다. 평안도 박천온천으로 떠난 신혼여행길에서 새색시를 혼자 두고 몰래 빠져나와 낚시를 즐겼던 사건, 6.25 전쟁통에 장인의 청계산 농장에서 피난생활을 할 때 안양저수지에서 낚시를 하다가 인민군 병사에게 발각된 사건(다행히 소년 병사가 김홍동 선생이 낚은 물고기를 분대장에게 선물해 그 후로는 인민군들의 보초 아래 안전하게 낚시를 했다고 한다), 부산 피란시절 열기낚시를 하기 위해 영도에 집을 구한 일은 생명을 담보하기 힘든 역경 속에서도 낚싯대를 놓지 못한 못 말리는 꾼의 기질을 대변하고 있다.

제주도 다금바리낚시에 미쳐 45일간 숲섬에 머물다가 결국 가족에게 끌려나온 일, 진양호 상류 대평리에서 간첩으로 오인되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에게 야간검문 당한 일, 비무장지대인 서화천 혜안계곡에서 낚시하다가 역시 간첩으로 오인한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던 일화도 있다.
이런 김홍동 선생의 보헤미안 기질을 일찍 간파한 부친은 ‘평생 직업을 가지지 말라’는 유언장을 남겼다. “내가 하던 어업은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팔라. 너 먹고 살 것은 내가 다 만들어놓고 떠나니 사업도 하지 말고 장사도 하지 말고 취직도 하지 말라. 그리고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빌려준 돈은 애비 돈이지 네 돈이 아니므로 네가 받지 말라.”
아버지의 유언대로 선생은 평생 생계지책을 위한 직업을 가져본 적 없으나 부친이 남긴 재산 덕에 먹고살기엔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해방 후의 토지정리, 전쟁 중의 인민군에 의한 토지몰수 과정을 겪으며 재산의 큰 손실을 보았다. 설상가상 이승만 정권이 집권한 후 철저한 반공정책을 펼치면서 건준 활동 경력이 있는 김홍동 선생은 걸핏하면 붙잡혀서 심문 받고 투옥되는 생활을 반복했다. 6.25 발발 전 이승만 정권은 전국의 좌익 성향 인사들을 ‘예비검속’이란 이름 아래 대대적으로 검거했는데, 김홍동 선생도 이때 잡혀 들어갔다가 다행히 경찰 친구의 도움을 받아 탈출할 수 있었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예비검속 대상자들은 모조리 학살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공산주의자에 대한 탄압은 더 심해졌고 좌익 아닌 좌익으로 낙인찍힌 김홍동 선생은 진절머리 나도록 감방을 드나들었다. 당시 선생은 처형 전숙희씨가 발행하는 「동서문화」에서 잠시 편집을 맡아 조지훈, 박목월, 조능식 등 주당파 문인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암울한 미래에 대한 우울증으로 술에 빠져 살던 선생은 결국 위장병을 얻어 의사로부터 “회복 불가능”이란 일종의 사망선고를 받는다. 그때 나이 어느덧 쉰 살이 훌쩍 넘어 있었다.
어느 날 한남동의 집을 나와 한강변을 배회하던 김홍동 선생은 견지낚시를 하는 촌로들을 보고 ‘낚시하는 노인들은 다 저렇게 장수하는가’ 싶어 견지낚시에 깊은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삼성동 언덕에 살던 한 노인에게서 견지낚시를 배워 이후 3년간 견지낚시를 즐기며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았다. 그때 한강변의 농부들은 여름이면 견지낚시로 물고기를 잡아 파는 어부로 변했고, 생계를 위해 프로의 경지에 이른 그들의 낚시솜씨는 신기에 가까웠으나 김홍동은 그들 사이에서도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낚시천재 김홍동이 꾼으로서의 명성을 떨친 것은 이때부터다.

 

낚시춘추 모니터가 된 압구정 견지도사


이 무렵 김홍동 선생은 낚시춘추와 첫 인연을 맺는다. 당시 낚시춘추 발행인으로서 전국의 명망 있는 낚시필자를 찾던 한형주(韓炯周) 박사가 ‘압구정 견지도사 김홍동’의 이름을 듣고 모니터로 위촉하고자 하였고, 처음엔 흥미가 없던 선생도 한형주 박사를 직접 대면한 뒤 마음이 통해 모니터직을 수락한다. 그 후 낚시춘추의 새 발행인이 된 故 정효섭(鄭孝燮) 회장도 김홍동 선생과의 인연으로 낚시춘추를 인수하게 된다. 77년 당시 정효섭 회장은 선생의 처형인 전숙희씨가 발행하던 월간지 「동서문화」의 편집장이었고, 선생에게서 한형주 박사가 「낚시춘추」의 새로운 인수자를 찾는다는 얘기를 듣고는 한형주 박사를 찾아가게 된 것이니 결국 김홍동 선생이 한 박사와 정 회장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  
1974년, 어느덧 예순이 된 김홍동 선생은 긴 낚시인생의 마지막 파트너를 만난다. 바로 루어낚시다. 그해 여름 파로호에서 시골 꼬마가 쇠붙이에 갈고리바늘을 달아 쏘가리를 줄줄이 낚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통역관 한병철씨를 만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루어대와 릴을 구입하면서 루어낚시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그때 한씨에게 함께 루어낚시를 배운 사람이 「루어낚시 入門」의 저자 故 박현재씨다.

 

▲제주도 숲섬에서 돌돔을 낚은 위수. 다금바리낚시에 빠져 45일간 숲섬에 머물다가 가족에게 붙잡혀 나오기도 했다.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박현재씨는 74년 퇴계로 진양상가 지하에 작은 낚시점포를 열고 ‘서울릴낚시’란 상호를 붙였다. 그리고 김홍동 선생에게 낚시클럽의 회장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서울릴낚시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루어낚시회로 기록되며 금강의 안남 지수리를 비롯한 전국 강계의 쏘가리낚시터를 섭력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김홍동 선생이 낚시계의 주목을 받으며 6년 동안 회장직을 맡고 있을 당시 회원 중엔 기아산업(기아자동차의 전신)의 김상문 회장도 있었다. 이 시기가 서울릴낚시의 전성기였다.
당시 선생의 가세는 조금 기울어져 여타 낚시회의 회장처럼 기부금을 척척 낼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다. 그에 비해 서울릴의 회원들은 모두 의사, 기업체 사장, 교수 등 상류층 인사들이었다. 그럼에도 회원들이 김홍동 선생을 깍듯이 모신 것은 선생의 기개와 인품, 그리고 놀라운 낚시실력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낚시인들은 ‘고수’ 앞에선 사회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고개를 숙이는 경향이 있다. 당시 루어낚시로는 선생을 대적할 이가 없었다고 한다. 캐스팅 시합을 벌여도 1등이었고, 조과로 따져도 항상 1등이었다. 포인트를 보는 안목이 남달랐고 ‘축지법을 쓴다’는 말이 나돌 만큼 훨훨 날았다. 남들이 1km 훑을 시간에 선생은 2~3km를 훑어대니 따라갈 재간이 없었다. 수인 이정삼 회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선생님은 60대였고 나는 30대였지만 도저히 그 걸음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하루는 건너편 포인트가 좋아 보여 나는 하류로 빙 돌아서 갔는데 선생님은 낚싯대를 입에 물고 헤엄을 쳐서 그 센 여울목을 건너가시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도착했을 때 선생님은 벌써 꿰미 가득 쏘가리를 낚아놓고 계셨다”고 말했다.

 

 

▲서울릴낚시회 시절의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김홍동 선생이며, 그 앞에서 1등 상품으로 어탁을 받은 사람이 수인 이정삼 회장, 그 오른쪽에 메가폰을 든 사람이 고 박현재 선생이다.


예술어탁의 새 지평을 열다

 

김홍동 선생은 늘 일기를 썼다. 그 일기는 <위수조행일지>라는 이름으로 정리돼 총 30여 권에 이른다. 그중 1972년 5월 21일 일기장에 이렇게 쓰여 있다.
“…갑자기 내가 낚은 고기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사랑스럽다. 남들이 팽개치는 피라미, 짓밟아버리는 버들치, 누치, 끄리, 붕어, 내게는 모두 아름답고 사랑스런 고기들이다. 이 예쁜 고기들에게 영원의 삶을 불어 넣을 수는 없을까? 나는 생각했다. 낚은 고기들을 예쁜 화선지 위에 어탁으로 남겨 놓으면 어떨까? 어탁을 아는 사람이 없어 배울 곳도 없다. 할 수 없는 일이다. 개척자는 늘 외로운 사람이다. 찍어 보자. 먹으로 그냥 찍어 보자.…”
김홍동 선생이 어탁을 시작할 당시 우리나라엔 흑백의 묵탁 외엔 없었고 그나마 조악한 기록어탁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어탁을 선생은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살려내고자 했다. 선생이 물고기 사체를 집안에 들고 와서 탁본을 뜨는 모양을 본 가족은 ‘허구한 날 낚시행각을 일삼더니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하고 대경실색하지만, 그가 완성한 어탁을 본 자녀들이 “너무 아름답고 신기하다”고 감탄하여 나중에는 가족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어탁 작업을 지속한다.
천이나 화선지에 먹의 번짐과 겹치기를 이용해 회화적으로 구성한 그의 어탁은 보는 이의 경탄을 자아냈다. 컬러로 묘사된 직간접어탁, 100호 크기의 군집어탁은 그림보다 화려했다. 선생은 미술을 정식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으나 천부적 미감과 호방한 구도, 그리고 특유의 농도 짙은 번짐 기법으로 어탁의 새 지평을 열었다. 어탁의 본고장인 일본의 낚시월간지 <츠리비토>의 오구치 사장도 선생의 어탁을 보고 “최고”라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1982년 8월 처남 전락원 회장의 적극적 후원 아래 열린 제1회 신세계백화점화랑 ‘위수 김홍동 어탁전’은 대성황을 이루었고 한 점에 50만원(당시 50만원이면 현 시세로는 500만원에 해당한다) 하는 36점의 어탁이 삽시간에 다 팔렸다. 
어탁 중에서도 선생이 가장 큰 애착을 가진 것은 쏘가리 어탁이다. 김홍동 선생은 쏘가리를 만난 후 평생 그 아름다움에 빠져 살았다. “쏘가리는 우리나라의 국어(國魚)”라고 말했을 정도다. 실제로 쏘가리는 한국에만 있는 고유 특산종이다. 다만 중국에 비슷한 물고기가 있으나 뚱뚱하고 못 생겨서 쏘가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일본인들이 쏘가리에 반해서 이식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홋카이도에서 쏘가리로 추정되는 물고기가 낚인다고 해서 김홍동 선생을 초청하여 그 물고기의 확인을 의뢰하기도 했다. 물론 그 고기는 쏘가리가 아니고 꺽지였다.
김홍동 선생의 어탁은 낚시춘추, 월간낚시와 TV를 통해서 여러 차례 소개되고 어탁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84년 5월 김홍동 선생은 조능식, 유주방, 이일섭씨 등과 함께 「한국어탁회」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창립하기에 이른다.


  “순수 낚시인들의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


김홍동 선생이 우리나라 낚시계에 남긴 또 하나의 큰 업적은 「한국낚시펜클럽」의 창립이다. 선생이 생각하기에 당시의 출조문화란 먹고 마시고 노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출조버스 안은 항상 술 냄새와 음담패설로 젖어 있었고 낚시터에선 한 마리라도 더 잡아 족치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런 낚시문화를 바꾸어야겠는데, 그것을 회원이라는 손님 비위에 맞출 수밖에 없는 낚시점주가 해결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당시 낚시점주들의 연합체로 구성된 「전국낚시연합회」(99년에 한국낚시연합으로 명칭 변경) 외에 또 다른 단체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선생은 ‘낚시를 생계수단으로 갖지 않은 순수 낚시인들만 모여 단체를 만들어야 400만 낚시인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낚시글 기고가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낚시문화를 계몽하고 선도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1980년 창립한 「한국낚시펜클럽」이다. 김홍동 선생이 부회장을 맡고 회장엔 한형주 박사를 추대하였다.
한국낚시펜클럽이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낚시면허제’ 제안이었다. 김홍동 선생은 “낚시터를 보호하고 낚시문화를 계몽하기 위해선 인력과 재원이 필요하며 그 돈은 면허제를 통해 낚시인들이 스스로 조성해야지 다른 누가 부담해줄 리 없다. 지금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낚시하고 환경을 더럽힌다면 결국 낚시는 쇠퇴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국민의 반발을 살 수 있다’며 면허제 제안을 거부했다.
1983년 4월 27일 한국낚시펜클럽은 (사)전국낚시연합회, 부산낚시연합회, 낚시춘추와 함께 낚시용어 통일을 위해 2년간 추진해온 ‘새로 통일된 낚시용어집’을 다락원에서 발간하였고 이때 제정한 낚시용어들은 〈국어대사전>에 수록돼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김홍동 선생은 정치적 흥미는 없었다. 주관이 뚜렷한 문인들의 다양한 이해와 주장을 조화시키는 데 피로감을 느낀 선생은 결국 자신이 만든 한국낚시펜클럽을 탈퇴하였다. 선생의 탈퇴 후 85년 5월 18일 펜클럽은 해산했다. 선생은 낚시계의 정신적 리더들이 순수한 모임으로 결속하여 낚시문화활동을 하고자 하였으나 뜻한 바대로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한국낚시펜클럽이 해산한 6개월 뒤인 85년 11월, 김홍동 선생을 따르는 다수의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리버사이드호텔에서 재결합의 회합을 가졌고, 현재도 '순수낚시인 단체'의 필요성을 역설한 선생의 의지에 대한 공감대는 여전히 살아 꿈틀대고 있다.
 
일흔의 노구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다시 초야로 돌아온 선생은 70여년 낚시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사르고자 아프리카 낚시 대탐험에 나선다. 그는 말로만 듣던 빅토리아호수의 거대한 나일퍼치와 인도양의 블루마린을 낚는 꿈을 꾸었다. 요즘에야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꿈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는 아프리카는커녕 해외여행 자체가 금지되어 있던 87년이었고, 더구나 선생이 처음 아프리카로 떠날 때 연세는 72세였다. 선생은 그 후 74세(1989년), 86세(2001년)에도 아프리카 낚시탐험을 다녀왔다.
물론 케냐에서 출발한 이 원정은 아들 김인학씨가 (파라다이스그룹이 케냐에 건설한) 나이로비 사파리파크호텔 사장으로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부인 전명희 여사도 이 여행에 동행하여 노부부는 서울-홍콩-봄베이-나이로비로 이어지는 비행시간만 30시간이 넘는 장도에 올랐다.

 

 

 

 

위수의 걸작으로 꼽히는 '쏘가리 유영도'(묵탁 35×85cm). 72세 되던 1988년의 작품이다. 위수클럽은 김홍동 선생이 76년 '청담동 거실' 시기부터 2000년 포일리 칩거 시기까지 제작한 전성기의 어탁과 조능식. 유주방 선생등의 어탁작품을 모아서 한국어탁의 역사를 집대성한 <한국어탁도록>발간을 추진하고 있다.

 

 

 

적도가 지나는 열사의 땅 아프리카는 숨이 막힐 정도로 뜨거웠지만 김홍동 선생은 케냐와 탄자니아 국경의 빅토리아호수에서 마침내 2m30cm, 72kg의 초대형 나일퍼치를 낚는 데 성공한다. 더욱이 이 나일퍼치를 어탁으로 남기기 위해 케냐 나이로비까지 비행기로 운송하는 프로젝트를 벌였다. 공항 측에선 냉동시설도 변변치 않은 열대지방에서 썩어가는 생선을 비행기에 실을 수 없다고 거부했으나 김홍동 선생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나이로비의 사파리파크호텔로 공수된 나일퍼치는 수많은 유럽인 관광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푸른색의 어탁으로 부활했고, 난생 처음 동양의 진귀한 예술어탁을 목도한 외국인들은 “원더풀”을 연발했다. 옥양목 천으로 단숨에 직접법으로 뜬 이 나일퍼치 작품은 위수클럽의 이정삼 회장이 소장하고 있다.
나일퍼치를 낚은 후 선생은 인도양을 바라보는 와타모아로 가서 거대한 돛새치를 낚는다. 돛새치 역시 어탁으로 되살아났고 와타모아의 헤밍웨이호텔과 마린디의 이탈리아인 화가가 운영하는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후일 그 이탈리아 화가는 ‘김홍동 어탁 유럽 전시전’을 기획하였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위수의 낚시인생에서 세 차례의 아프리카 원정은 잊지 못할 조행이었다. 인터뷰 도중에도 선생은 몇 번이나 아프리카 낚시여행을 회상했다. “수천마리의 나일퍼치가… 배를 빙 둘러싸는데… 주둥이가 칼처럼 나와 가지고… 무서웠어… 무섭더라고.” 점점 희미해지는 선생의 기억 속에선 돛새치와 나일퍼치가 오버랩되어 있었다. 선생에게 그들은 물고기가 아니라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의 환영이리라. 선생은 지금도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자연과 흑인들의 순박함을 그리워한다. 흡사 우리나라처럼, 노인이 버스에 타면 잽싸게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던 흑인들의 예의에 큰 감명을 받고 아프리카를 미개한 나라로 생각했던 것을 부끄러워했다.

 

꿈에서도 그리운 독락정과 청마여울


한번 먹은 마음은 돌이킨 적 없는 고집불통에다 선생 자신이 물욕이 없는 만큼 남의 물욕도 쉽게 용인하지 못한 위수의 성정은 때로는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세인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조금만 굽히고 살았더라면 세속적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길도 한때 펼쳐져 있었지만 선생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일평생 권력에 기댄 적 없고 굴복한 적도 없으며 아이처럼 천진한 열정만을 추구해왔다. 그런 그에게 낚시는 구도의 길이자 종교였다.
김홍동 선생은 자신을 따르는 후학에게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전수하고자 애썼다. 전국을 돌며 어탁강습회를 열었고, 저술에도 힘써서 〈바다낚시백과 원도편> <어탁교실> <쏘가리 따라 삼천리> <환상의 루어낚시터> <루어낚시의 매력> <어탁은 예술이다>를 남겼다. 그래서 수인 이정삼씨는 “중국에 강태공이 있고 영국에 아이작 월튼이 있고 미국에 헤밍웨이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홍동이 있다. 평생 꿈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은 그는 진정한 자유인, 한국낚시의 헤밍웨이다”라고 말한다.
이 날 나는 김홍동 선생에게 여러 차례 낚시춘추의 아무개라고 이름을 말씀드렸으나 선생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셨다. 그러나 “제 고향이 (쏘가리낚시터로 유명한) 경호강에서 가까운 진주”라고 말하자 김홍동 선생은 환한 표정으로 친밀감을 보이시며 “언제… 쏘가리 낚으러… 갑시다”라고 더듬더듬 말씀하셨다. 이 날 점심식사를 함께하는 자리에서 선생은 좌중을 돌아보며 “쏘가리 낚으러 가자”는 말을 네 차례나 반복하였다. 이정삼 회장은 “알겠습니다. 5월이 되면 선생님 좋아하시는 쏘가리 신병훈련소 안남 지수리로 가서 쏘가리도 낚고 맛있는 것도 먹읍시다”하며 선생의 손을 꼭 쥐었다. 그 말에 선생은 기분이 한껏 좋아지신 듯 허허 웃었다.
독락정 검은바위에서부터 청마여울로 돌아가면 하금, 상금을 차례로 지나… 눈빛을 반짝이며 쏘가리 여울을 몽유하는 선생은 어느새 신선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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