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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춘추 지령 500호 기념특별인터뷰- 도서출판 예조원 김국률 대표
2013년 03월 2815 3549

낚시춘추 지령 500호 기념

 

특별인터뷰

 

도서출판 예조원 김국률 대표 

 

 

낚시기자 외길 30년 


허만갑 기자

 

 ▲경기도 파주시 운정동의 자택에서 70년대의 낚시춘추를 펼쳐보며 ‘그 시절’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 김국률 대표.

 

도서출판 예조원 김국률(金國律) 대표. 1979년 낚시춘추에 입사한 뒤 2009년 퇴사하기까지 30년 7개월 동안 봉직한 낚시춘추의 상징이자 살아 있는 역사다. 낚시춘추의 42년 역사에서 31년을 근무했으니 낚시춘추는 김국률 대표의 손발로 일군 잡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2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통영고등학교와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김국률 대표는 79년 2월 다락원 출판사에 입사하여 단행본 제작과 낚시춘추 편집을 병행하다가 낚시춘추 2대 편집장 권지숙씨가 사임한 뒤 평기자로서 편집장 역할까지 떠맡으며 낚시춘추 발간에 전력하게 된다. 이후 낚시춘추 편집장을 거쳐 사업국장, 전무이사로 진급하면서 낚시춘추의 기틀을 다졌다.
기자 시절에는 독도낚시 최초탐사, 가거도 최초탐사 등 수많은 특종을 해냈고, 국문학과 출신으로서 신일철, 천승세, 임창수 등 낚시춘추 창간기부터 필진으로 참여해온 문인들과 교류하며 김학필, 조임제, 박준걸 등 순수 낚시인 문재까지 발굴하여 스타필자로 키워냈다.   
김국률 대표의 관심은 잡지 제작에만 머물지 않고 낚시문화 전반에 걸쳐 있었다. 그가 기획하고 진두지휘한 1993년 5월 2일 ‘낚시터 청소의 날’ 행사는 전국에서 5600명이 참가한 사상 최대 규모의 낚시터 환경보호 행사로 기록된다. 또한 1982년 낚시춘추와 한국낚시펜클럽, 전국낚시연합회, 부산낚시연합회가 합동으로 추진한 <새로 통일된 낚시용어> 발간은 비속어와 일본어가 난무하던 낚시용어를 아름다운 우리말로 순화한 업적이었는데 그 역시 당시 김국률 편집장이 동분서주하며 성공시킨 프로젝트였다.   
입문자들의 길잡이인 낚시단행본 편찬도 대부분 김국률 대표의 손을 거쳤다. <낚시교실 시리즈> <실전낚시 시리즈> <한국의 명방파제> <낚시 100문1000답 시리즈> <민물낚시터백과> <전국낚시지도>는 모두 김국률 대표의 작품이다. 좀 더 체계적인 낚시 및 레저 단행본 출간을 위해 예조원 출판사를 차린 후에도 <송귀섭의 붕어대물낚시>, <바다낚시 첫걸음>, <루어낚시 첫걸음> 등 입문서적을 활발히 편찬하고 있다.

낚시언론의 기틀 다진 낚시춘추의 상징

 

대표께서 낚시춘추를 떠난 지도 3년이 넘었군요. 어느덧 낚시춘추가 지령 500호를 맞았습니다.
“그래요. 감개무량하군요. 낚시춘추 임직원들의 노고가 컸어요.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지령 500호 발간을 이룩한 원동력을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글쎄, 여러 가지가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먼저 독자들의 변함없는 성원이 있었고, 낚시춘추를 거쳐 간 수많은 필자와 기자들의 노력이 있었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낚시춘추를 아껴주는 광고주들의 지원이 있어서 500호를 이어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가 볼 땐 낚시춘추 42년 중 31년을 근무한 김국률 대표께서 지령 500호의 수훈갑이 아닐까 하는데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지만 당치 않은 평가입니다. 수훈갑을 뽑으라면 응당 힘든 경영여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초창기 낚시춘추를 이끌어온 창간인 한형주 박사님과 전 발행인 정효섭 회장님이지요.”

 

낚시기자로선 최초로 기자상을 받았습니다.
“84년에 한국잡지협회가 수여하는 제18회 한국잡지 언론상을 수상했어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수상식을 했지요. 하지만 나 개인에게 주는 상이라기보다 낚시춘추에 주는 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정효섭 사장님을 비롯한 임직원들과 낚시인들이 너무 많이 술을 먹여서 만취했던 생각이 납니다.”

 

낚시춘추의 역대 최대 특종을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84년 7월호의 독도 최초 탐사보도가 아닐까요? 나하고 문성근 기자(현 월간낚시21 발행인)가 취재팀을 이끌고 MBC 기자와 카메라맨이 동행했어요. 독도의용수비대장으로 유명한 울릉도의 홍순칠씨가 우리를 가이드했는데 출항허가가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어요. 큰 오징어배를 두 척이나 대절해놓고 출항허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해경에서 붙잡아놓고 자꾸 시간을 끄는 겁니다. 일본과의 외교마찰을 우려해 출항을 막고 싶은데 취재진이 있으니 여론을 의식해 막지도 못하고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는 것 같았어요. 결국 낮 11시에야 출항허가가 떨어져 독도로 향하는데 다행히 바다는 순했습니다. 홍순칠씨 말로는 일 년에 두세 번 만날 정도의 순풍이라더군요. 서도 물개바위와 동도 독립문바위에 두 팀이 내려 갯바위낚시를 시도하고 또 한 팀은 배에서 트롤링을 했습니다. 조과는 기대 이하였죠. 배에선 열기와 달갱이(달강어)란 물고기만 낚이고 갯바위에선 우럭만 낚았어요.” 

 

개인적으로 꼽는 본인의 특종은?
“특종이라기보다 의미 있는 일이라면 내 아이디어로 전국적 행사를 치른 93년 5월 2일 ‘낚시터 청소의 날’을 꼽고 싶군요. 당시 내무부, 환경처, 수산청이 후원했고 전국 433개 낚시회, 5600명이 참가해 총 320톤의 쓰레기를 수거했어요. 이런 행사가 지금 또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의미 있었던 프로젝트가 낚시용어 제정입니다. 70년대까지는 일본말이 낚시용어의 대부분이었어요. 82년에 시작해 83년 4월 20일 ‘새로 통일된 낚시용어’를 발표했는데 당시 허웅 한글학회 이사장이 축사를 하면서 “전문집단에서 정리한 전문용어로 인정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민중서관 국어대사전에 거의 다 수록되었습니다. 그때 바로잡지 않았으면 더 엉망이 됐을 겁니다. 지금도 새로운 낚시용어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는데 낚시용어 2차 통일작업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좌)84년 10월 제19회 잡지의 날에 한국잡지 언론상을 수상한 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찍은 사진. 가운데가 당시 김국률 차장과 부인 정용자씨,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故 정효섭 낚시춘추 발행인이다.

우)84년 5월 독도탐사대원들과 함께 울릉도를 출발할 때 찍은 사진. 맨 앞이 독도탐사를 기획한 김국률 기자다.


 

“한국낚시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1980년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낚시의 특징을 꼽는다면?
“70년대는 낚시의 도약기였습니다. 1964년 12월 최초 출시된 글라스로드가 낚시산업을 도약시켰죠. 당시엔 골프가 없던 때여서 낚시, 등산, 바둑이 3대 취미로 꼽혔는데 낚시가 가장 고급이었어요. 경제인과 정치인들이 모두 낚시를 즐기던 때죠. 80년대는 낚시의 전성기였습니다. 82년 봄 해동산업의 ‘흑기사’를 필두로 카본낚싯대가 보급되고 86년 봄부터 충주호시대가 열리면서 민물낚시의 고급화가 이뤄졌습니다. 또 80년대 초 크릴의 보급으로 바다낚시가 대중화되었어요. 크릴 보급은 바다낚시 비용을 낮추고 처넣기와 맥낚시에서 구멍찌낚시로 판도를 바꾸었습니다. 낚시산업도 최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90년대는 낚시의 전환기였습니다. 80년대 후반부터 낚시면허제가 거론되는 등 환경보호 차원에서 낚시를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떡밥과 납추의 수질오염 문제가 대두되었어요. 골프가 인기를 끌면서 지도층 인사들이 낚시에서 이탈된 것도 이때죠. 낚시산업은 정점을 찍고 하락세를 보이다가 98년 IMF가 터지자 전반적으로 타격을 입었어요. 이때 낚시계가 환경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2000년대 들어 환경에 무심한 낚시인들이라는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제 신입기자 시절인 90년대 초만 해도 승용차가 적어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 출장을 다녔는데, 80년대의 취재여건은 어땠습니까?
“그때는 승용차가 훨씬 더 적었기 때문에 기차나 버스를 타고 취재를 다녔어요. 서울역에서 밤 11시 무궁화 열차를 타면 새벽 4시 반에 부산역에서 부산 낚시인들과 만나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통영, 고흥으로 바다낚시를 가거나 진주, 함안 쪽으로 붕어낚시를 갔지요. 그때 서울의 개별 출조 낚시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 교통수단은 서울역 뒤 서부역(지금은 없어졌다)에서 출발하는 장항선 완행열차였습니다. 보통 첫차가 5시 25분에 출발하는데 철도청에서 일요일에 한해 20분 앞당겨 5시 5분에 출발시켰어요. 낚시인들을 위한 배려였죠. 일요일 장항선 첫차는 승객의 90퍼센트가 낚시인이었어요. 그리고 그중 90퍼센트가 평택역에 하차해서 아산호(평택호)로 갔습니다. 수많은 낚시인이 일시에 평택역 앞으로 쏟아져 나오면 당시의 평택 택시 200대 중 절반가량이 기다리고 있다가 낚시인들을 아산호로 실어 날랐습니다. 낚시터로 향하는 낚시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급합니까. 그 소란은 10분이면 조용해졌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출장지는 어디입니까?
“나는 가능한 한 많은 낚시터를 가보고 싶어서 한 번 간 출장지는 두 번 가지 않았습니다. 가거도가 가장 기억에 남는군요. 80년 12월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갔는데 당시엔 목포에서 들어가는 데만 이틀 걸리는 오지 중의 오지였죠. 목포에서 여객선을 타고 대흑산도로 가서 거기서 격일제로 홀수일에 운항하는 새마을호를 타고 가거도까지 들어가야 했는데 홀수일에 폭풍이 터지면 그 다음날 가는 게 아니고 다음 홀수일에나 배가 떠서 대흑산도에서 사나흘 머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나도 폭풍에 이틀간 대흑산도에 묶여 항구에서 잡어나 낚으며 소일했는데 다방아가씨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커피를 들고 와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우여곡절 끝에 가거도에 들어갔는데 정말 감성돔 천국이었어요. 2구 임성식 선장 집에 묵으며 본섬낚시를 했어요.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찌낚시가 발달하지 않아 갯지렁이 미끼로 던질낚시를 해서 감성돔을 낚았는데 그래도 잘 낚였어요. 그런데 내가 가거도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철수할 때의 악몽 때문입니다. 주의보가 터진다는 말에 진주낚시인들과 함께 젓갈배를 타고 도망치듯 나왔는데 오후 4시에 가거도를 출발한 것이 다음날 오후 1시에야 목포에 도착했어요. 엄청난 파도 속에서 무려 18시간을 항해한 것이죠. 어쨌든 그 취재로 가거도가 알려졌고 일약 유명낚시터가 되었죠.”

 

◀70년대에 찍은 흑백사진들을 정리하고 있는 김국률 대표. 한국 근현대 낚시의 대소사를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김 대표의 별명은 ‘낚시 도서관’이다.


 

낚시춘추의 전성기에 닥쳐온 위기는?

 

어쩌다가 낚시기자가 되셨습니까? 원래 낚시를 좋아하셨나요?
“나는 바닷가에서 나고 자랐지만 낚시를 그다지 즐기진 않았어요. 글쓰기를 좋아해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출판사에 들어갔는데 그게 낚시춘추를 함께 발간하는 다락원이었던 거지요.”

 

낚시춘추에 입사한 시기는 언제입니까?
“작고하신 정효섭 회장님이 77년 9월에 낚시춘추를 인수하였고 내가 79년 2월에 입사했어요. 당시 권지숙 편집장이 여자 몸으로 혼자 편집을 도맡고 있었고 편집기자가 딱 한 명 있었어요. 그밖에 광고 한 명, 영업 한 명, 경리 한 명의 정말 작은 출판사였습니다. 그때 영업담당이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 한 윤병용 상무(현 한국낚시진흥회 사무국장)였어요.”   

첫 직장이었는데 좀 더 큰 출판사에 취직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사람 인연이란 게 희한한 것이 권지숙 편집장의 사촌 시동생이 노주현이라고 내 친구였어요. 권지숙씨가 편집기자를 구한다고 하자 나를 추천한 거죠. 당시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통영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일하다가 군대에 가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친구 소개로 다락원이란 곳을 가보니까 참 사무실도 볼품없고 직장으로서 매력이 없어요. 다만 사장님이 인상적이었어요. 뿔테 안경을 쓴 젊은 사장이 흰 셔츠를 살짝 걷어붙인 채 책상에 앉아 원고지와 씨름하고 있는데 멋지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날이 마침 권지숙 편집장의 집들이였는데 얼떨결에 따라가서 밤새 술 마시고 화투 치며 놀다가 아침에 나왔어요. 나올 때 사장님이 내게 차비 하려며 3천원을 쥐어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진행비더라구요. 그렇게 코가 꿰인 거죠. 그 후 고향 출신의 국회의원 비서직 제의가 온 적도 있고 다른 회사에서 추천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성격상 곁눈질을 못해서 그런지 한 번 직장을 잡으니까 다른 곳에 눈 돌리기 싫더군요.”

 

발행인이 한형주 박사에서 정효섭 회장으로 바뀌면서 낚시춘추는 어떤 변화가 생겼습니까?
“낚시춘추 판매가 늘고 낚시단행본들이 속속 출간되면서 경영이 안정화되었습니다. 80년 3월호부터 활판 인쇄를 접고 옵셋 인쇄를 시작하면서 컬러풀한 사진들이 많이 실리고 읽는 잡지에서 보는 잡지로 전환되었죠. 또 84년 1월호부터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전환했습니다. 때마침 낚시산업이 성장하면서 광고수입도 차츰 늘어났어요. 그러나 5년간은 계속 적자였고 79년 인수 후 84년에야 경영이 정상화됐습니다. 발행인이 바뀐 후 기자의 현장취재가 늘고 부산, 대구, 광주, 제주 등지에 모니터를 두어 전국 네트워크를 갖추기 시작한 것도 큰 변화였습니다.”

 

낚시춘추의 전성기는 언제였고 가장 큰 위기를 맞았던 시기는 언제인가요?
“낚시춘추의 전성기라면 최고의 발행부수를 기록한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였고, 가장 큰 위기를 맞았던 시기도 역시 그때입니다. 왜냐하면 84년 봄에 조선일보사의 월간낚시가 창간했기 때문이죠. 낚시시장이 성장하면서 비로소 흑자경영으로 돌아서나 싶었는데 거대신문사가 그 시장에 발을 뻗친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대신문사와 낚시춘추의 경쟁이라… 모두 ‘낚시춘추는 이제 끝났다’고 봤고, 그간 낚시춘추에 기고한 필자들과 취재원들이 줄줄이 월간낚시로 넘어갔지요. 그 전에 조선일보사에서 사장님을 만나 낚시춘추를 넘기라고 위협조로 말했지만 사장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조선일보는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낚시춘추 직원들을 스카우트하기 시작해 결국 두 명의 기자가 월간낚시로 이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2005년에 월간낚시가 폐간되었으니 20년간의 기나긴 싸움도 낚시춘추의 승리로 끝난 셈이지요.”

 

김국률 대표께선 스카우트 제의를 안 받았습니까?
“나도 제의를 받았죠. 조선일보의 모 기자가 만나자고 해서 대충 예감하고 나갔더니 ‘큰물에서 일해 볼 생각 없느냐’고 묻더군요. 당연히 일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다. 하지만 낚시춘추가 망하면 가겠다고 했죠. 사장님에겐 그 사실을 한참 나중에 말했지만 아마 짐작하고 있었을 겁니다.”

 

당시 낚시춘추와 월간낚시의 경쟁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필자 영입 경쟁과 최대어 특종 경쟁이 특히 심했습니다. 낚시춘추의 정상급 필자들과 전문 낚시인들이 월간낚시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전국을 대표하던 낚시단체의 일부 임원진들도 친월간낚시로 전향했어요. 그때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조선일보라는 매체가 주는 권위는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내가 추자도 소머리섬에서 취재를 하고 있는데 경비행기 한 대가 추자도 상공을 빙빙 선회하는 거예요. 무엇인가 보았더니 비행기에 조선일보라고 적혀 있어요. 항공사진으로 추자군도를 찍고 있었던 겁니다. 당시 나는 허리를 다쳐서 제대로 서서 사진조차 찍기 힘든 상태였어요. 아~ 낚시춘추는 갯바위에서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있는데 월간낚시는 하늘을 날고 있구나! 그때 오기가 생기더군요. 진정한 낚시인들은 알 것이다. 하늘에서 화려하고 일목요연한 항공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몰라도 진짜 정보는 갯바위에서 낚시인들과 부대껴가며 직접 바윗돌 하나하나를 그려 넣은 낚시춘추의 지도에 들어 있다는 것을. 그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그런 현장정신이 낚시춘추의 저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낚시기자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있었어요. 낚시춘추 신입기자 시절에. 그때 내 고민을 듣고 필자 임창수씨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김 기자, 나 같은 직장인은 세상에 쌔고 쌨다. 또 당신이 꿈꾸는 작가나 신문기자들도 차고 넘친다. 하지만 낚시기자는 당신 혼자뿐이지 않나. 당신은 희소성이 있고 누구보다 이 일을 잘할 수 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어려움이 있는 줄 알지만, 하늘이 내린 천직이라 생각하고 매진한다면 수많은 낚시인들이 김국률 이름 석 자를 기억할 것이다. 그 후로 후회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했죠.”

 

▲소설가 천승세씨가 70년대 말 낚시춘추에 에세이 ‘임수여적’을 연재할 때의 자필원고. 밑에 놓인 것은 김국률 대표가 소장하고 있는 낚시춘추 창간호와 낚시월간지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낚시와 양어’.


“한국 낚시의 역사, 내가 정리해야 할 일”

 

만나고 싶은 낚시인이 있다면 어떤 분들입니까?
“너무 많아요. 방금 말한 임창수씨도 연락이 두절되어 만날 수가 없어요. 낚시탐험가 심정우, 유주방씨… 여러 분야의 낚시를 두루 좋아한 만화가 고우영 화백도 생각나네요. 모두 고인이 되었죠. 낚시춘추의 옛 필진 중에서 가장 만나보고 싶었던 분이 만화가 김경언씨예요. 한형주 박사님의 친구분으로 78년에 미국으로 이민 간 후 연락이 두절된 것으로 압니다. 글과 만화 모두 최고였고 품격, 깊이가 다 있었어요. 돌아보면 70년대엔 그런 필자들이 있어도 시대가 받쳐주지 못했고 80년대 이후엔 그만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만화가 김삼씨, 소설가 안정효 선생님, 낚시광이었던 전 국회의원 예춘호 선생님도 존경하는 분들인데 내가 게을러서 연락을 못하고 있네요. 지난날 한국 낚시계를 이끌었던 원로들이 대부분 유명을 달리하셨고 생존해계신 분들도 연로하여 언제 세상을 뜨실지 모릅니다. 최운권, 송소석 선생님도 자주 만나 뵈어야 하는데…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질 위기에 있는 한국의 낚시역사를 정리하는 것이 내게 남겨진 과제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낚시잡지는 전문지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는데 낚시춘추만 종합지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종합지와 전문지 중 낚시춘추가 가야 할 길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낚시잡지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합니다. 지금의 낚시는 전문화시대이므로 낚시잡지도 전문화되어야 한다고 봐요. 그러나 종합지가 하나는 있어야 합니다. 역사를 기록하고 전체 낚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은 종합지가 아니면 하기 힘듭니다. 낚시춘추 주도하에 통일된 낚시용어집을 발간한 것이나 전국 낚시터 청소의 날 행사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종합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최선의 방안이라면 낚시춘추는 종합지의 골격을 그대로 가져가고 그 외에 전문지를 하나 더 발간하는 것이겠죠.”

 

30년 낚시기자의 소회를 정리한다면?
“나는 우리나라 낚시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가장 행복한 낚시기자 생활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70년대와 80년대는 낚시가 상류층의 고급레저로 각광받았고 정·재계의 거물들과 문인·예술가들이 낚시를 즐겼습니다. 나는 낚시기자로 그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낚시하면서 내 인생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일에 미쳐 살았지만 행복한 시절이었죠. 80년대의 영광이 낚시계에 다시 도래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낚시는 한국인들의 피 속에 내재된 선과 동이 조화를 이룬 취미에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 다음엔 또 오르막이 있듯이 낚시가 반드시 부흥할 날이 올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저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될 것입니다. 현안 문제를 낚시계 스스로 해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준비해 나가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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