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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제일의 스타 낚시인 송귀섭
2011년 01월 4824 358

 

낚시춘추 창간 40주년 특별인터뷰

 

한국 제일의 스타 낚시인 송귀섭

 

“내 낚시의 모든 것은 낚시춘추에서 비롯됐다

 

송귀섭(61)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낚시인이다. 낚시방송 출연과 각종 낚시강좌를 통해 우리나라 전통붕어낚시의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는 그는 8천명의 팬클럽을 가진 ‘낚시스타’다. 그리고 조구업체 프로스탭 활동과 광고 모델, 집 활동으로 매년 수천만원의 돈을 버는 ‘전업낚시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송귀섭씨를 ‘방송시대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낚시인’으로 평가한다. 반듯한 외모와 좋은 목소리, 타고난 언변에 세련된 매 , 그는 확실히 사람을 끄는 매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낚시인 송귀섭의 인기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20대부터 70대까지 수많은 낚시인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방송인이 아닌 낚시인’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며, 그 인정의 기저에는 송귀섭씨의 깊이 있는 낚시 식견과 경륜에 대한 존경심이 깔려 있다.
새해에 환갑을 맞는 그는 또 새해에 40주년을 맞는 낚시춘추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송귀섭씨는 “나는 평생 낚시춘추의 열렬한 애독자였고 내 낚시의 모든 것은 낚시춘추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 서성모 기자 blog.naver.com/mofisher |

 

광주시 북구 문흥동의 송귀섭씨 자택. 문이 열리고 낚시복 내피 차림의 송귀섭씨가 기자를 맞는다. 집에서도 낚시복장인가? ‘그냥 이게 편하다’고 한다. 서재로 안내한다. 원고를 쓰고 있던 중이었나 보다. 컴퓨터 화면엔 타이핑 중인 원고가 떠있고 책상 위엔 낚시잡지와 서적들이 쌓여 있다. “대물붕어낚시 책을 준비하고 있는데 3월에 열릴 부산국제낚시박람회에 맞춰 발간하려다 보니 정신이 없군요.” 책 제목은 ‘송귀섭의 월척의 꿈(가제)’. 집에서도 항상 이렇게 바쁘게 지내는 걸까?
“낚시터가 아니면 여기 서재에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격주로 2박3일씩 방송촬영을 하고 매주 열리는 조우회와 팬클럽 행사에 참석하다 보면 한 달에 보름 정도는 낚시터에서 산다고 볼 수 있죠. 나머지 시간은 이렇게 서재에서 글을 쓰거나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립니다. 집에 있을 땐 밥 먹고 운동하는 시간 외엔 보통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서재에서 생활합니다.”
책장에 군 제복을 입은 송귀섭씨의 사진이 보였다. 그가 유격대장으로 복무하던 42세에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송귀섭씨는 1994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이야기는 그의 군인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자택 서재에서 인터뷰 중인 송귀섭씨. 전통붕어낚시의 개념과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낚시광 사단장의 부관 시절  ‘낚시춘추’가 가이드북

 

“1973년에 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0년간 장교로 군 생활을 했는데 야전군 전후방부대, 특전사, 유격대 등 특수부대에서 주로 복무했습니다. 내가 낚시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던 곳도 군대였죠.”
송귀섭씨가 책장 한  구석에 있는 낚시춘추 합본호를 꺼냈다. 종이가 누렇게 바랜 1975년 합본호였다. 그는 책을 펼치더니 붕어낚시 채비 그림이 그려져 있는 지면을 보여주었다.
“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년 뒤 사단장 전속 부관으로 복무했는데 그 사단장님이 대단한 낚시광이셨습니다. 주말마다 낚시를 갈 때 출조지 선정이나 낚시법, 그리고 낚시 후 그 결과에 대해 분석하는 일을 제가 맡아서 하게 됐죠. 어렸을 때 동네 저수지에서 낚시를 하긴 했지만 당시 낚시에 대해 잘 모르던 내가 타지에서 그런 정보를 어떻게 구하겠습니까? 그래서 매달 낚시춘추를 사보면서 책에 소개되는 낚시터 정보와 테크닉을 공부하게 됐죠. 지금 내 낚시의 모든 기 는 그래서 낚시춘추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1년간의 ‘낚시부관’ 생활을 마친 뒤에도 그는 매달 낚시춘추를 탐독했다. 한 지역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군인이라 책을 모아두기 힘들었기에  요한 자료들은 그때그때 스크랩을 했다. 당시의 연재  자였던 한형주, 최운권, 예춘호씨의 글을 즐겨 읽었다.
“시간이 날 때 찾아서 읽는 편인데 지금 봐도 좋은 구절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아요. 낚시춘추 창간인인 한형주 박사님은 수 을 많이 쓰셔서 읽는 즐거움이 있었고 최운권 선생님의 붕어 테크닉 기사를 탐독하면서 낚시이론을 정립해나갔습니다. 예춘호 선생님은 대낚시와 루어낚시와 바다낚시를 고루 즐기셨는데 저로선 늘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예 선생님이 쓴 글 중 이런 얘기가 있어요. 후배들과 함께 바다낚시를 갔는데 학공치만 낚이니까 짜증을 내더랍니다. 그때 예 선생님은 학공치만 낚이면 학공치에 맞는 낚싯대와 채비로 낚시를 즐기면 됐지 왜 짜증을 내냐고 하셨다는 글을 읽고는 나도 이분처럼 즐기는 낚시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나운서가 꿈이었던 소년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산남리의 부농 송영철씨의 집에 4남2녀 중 장남으로 송귀섭씨는 태어났다. 5대 종손의 장손으로 가문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아이는 부모 말을 잘 들어 순둥이로 불렸고  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반장을 놓치지  을 정도로 총명하고 리더 이 있었다. 특히 웅변 실력이 뛰어나 도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을 차지했다.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소년 송귀섭의 꿈은 아나운서였다.
“난 남들 앞에서 말을 잘했어요. 중학교 운동회 때 마이크를 들고 방송을 한 적이 있는데 함평으로 휴양 차 내려온 TBC 라디오 아나운서가 내 목소리를 듣고는 노력하면 훌륭한 아나운서가 될 거라고 칭찬해줬습니다. 당시 명문이었던 서울고 응시에 실패한 뒤 아나운서나 배우가 되려고 부모님 몰래 예술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죠. 그러나 광대질은 안 된다는 아버지 손에 끌려서 결국 고향으로 내려와 함평농고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머슴을 둘 정도로 부유했던 집안이 갑자기 기울면서 그의 학창 시절은 순탄치 못했다고 한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제때 진학하지 못하고 입학과 휴학, 재입학을 반복해서 고등학교 3학년일 때 그의 나이는 벌써 스물두 살이었다.
“함평농고에 다닐 땐 과목이 농업이다 보니까 공부에 흥미를 잃고 결석을 밥 먹듯 했습니다. 41명 학급에서 40등을 했다면 말 다한 거 아닙니까? 중학교 때부터 배운 유도 덕분에 씨름부 선수 생활을 했는데 학교에서 규율부장을 맡기도 했어요. 그런데 고3 여름방학 때에 선배들의 싸움에 연루되어 형사가 부모님을 찾아오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때 부모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맹세를 했죠. 착실하게 공부해서 경찰이 아니면 군인이 되겠다고.”
그 사건 뒤 100일간 공부만 했던 그는 거짓말처럼 3사관학교 11기생으로 합격했다.
경기도 성남 비행장 경비중대장으로 복무할 때 지금의 부인 김인화씨를 만나서 결혼했다. 전국을 옮겨가며 군 생활을 했고 틈틈이 낚시를 즐겼다. 그가 낚시를 가장 많이 했던 시기는 원주에서 유격대장으로 근무했을 때다. 섬강 인근에 부대가 있어 관사 문을 열면 바로 강이 펼쳐져 있었다. 아침저녁 운동을 하듯 낚시를 즐겼다.
“낚싯대 두 세트를 준비해서 한 세트는 숙소에 두고 한 세트는 강가에 항상 펴놓았죠. 전역할 때까지 4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고 아침저녁으로 나가 낚시를 했어요. 그때 실험도 많이 했습니다. 왜 겨울엔 낚시가 안 될까 해서 보트를 타고 포인트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물속에서 떡밥이 어떻게 풀리는가 싶어서 직접 잠수를 해서 관찰하기도 했어요.”

 

 

"나는 낚시춘추 평생 애독자입니다." 누렇게 종이가 바랜 낚시춘추 합본호를 보여주고 있는 송구섭씨.

 

 

‘월척특급’을 진행하며 최고의 방송스타로

 

1994년 20년간의 군 생활에서 예편하고 가족이 있는 광주로 내려왔다. 새로운 직업을 찾지 못해 1년간 낚시만 다니다가 지금 살고 있는 광주 북구 문흥동 아파트 상가에 슈퍼마켓을 열었다. 그러나 6개월 후 맞은편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가게를 접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이때 떠올린 아이디어가 슈퍼와 낚시점을 함께 운영하는 것. 가게 이름은 아파트 이름을 따서 무지개 슈퍼낚시로 지었는데 슈퍼보다 낚시점이 의외로 잘됐다.
“당시만 해도 광주의 낚시는 수도권에 비해 많이 뒤떨어져 있었어요. 콩알떡밥낚시 전문가인 내가 손님들에게 찌맞춤부터 낚시요령까지 상세하게 설명해주니까 그게 소문이 나면서 금방 회원들이 불어났습니다.”
97년 월간붕어에 연재한 글이 계기가 되어 낚시방송과 첫 인연을 맺게 된다. 송귀섭씨의 글을 본 리빙TV의 제작진이 제안해 ‘낚시는 즐거워’란 프로의 해설을 맡게 됐는데 이를 시작으로 2000년 개국한 인터넷방송 피시니스TV, 2002년 개국한 FTV에 고정출연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방송 활동이 힘이 들지  고 즐거웠어요. 남들은 방송 울렁증을 얘기하기도 하던데 나는  무 재미있었어요. 멘트용 원고가 하나 없어도 그 자리에서 한 시간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방송 전에 자료를 충분히 준비해야 했는데 그 과정도 즐거웠습니다.”
2003년 7월에 첫 방송이 나간 FTV의 ‘월척특급’은 송귀섭을 방송스타로 만든 프로그램이다. ‘월척특급’은 월척붕어를 대상으로 대물에 도전하는 낚시과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방영 1회부터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송귀섭씨는 3회째까지 월척을 낚지 못했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겁기만 했다. 
“당시 FTV의 김중기 사장은 월척특급 기획안을 보더니 말도 안 되는 기획이라며 반대를 했죠. 평생에 한 번 만나기 힘든 월척을 방송에서 보여주려면 매번 꽝을 칠 텐데 그걸 누가 보겠느냐고 하더군요. 나는 3개월까지 해서 반응이 없으면 막을 내리겠다고 고집을 피웠고 방송에 집중하기 위해 낚시점도 접었습니다. 결과는 나도 놀랄 정도의 대성공이었습니다. 결국 3개월이 6개월, 1년, 이렇게 연장되더니 지금까지 방영되는 최장수 프로그램이 됐습니다.” 
‘월척특급’ 방송이 7회째를 맞던 2003년 겨울 시청자들이 자발적으로 송귀섭 팬클럽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평산가인(平山)’이다. 평산은 송귀섭씨의 호다. 낚시인 최 의 팬클럽이 탄생한 것이다.

 

 

부인 김인화씨와 함께. 방송촬영 없이 휴식을 위한 낚시를 떠날 때는 늘 동행하는 낚시친구다.

 

“낚시춘추와 함께 전통붕어낚시의  발전을 이어나가고 싶다”

 

지금까지 출연한 방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방송은? 
- 대략 300편 정도를 촬영한 것 같다. 그중 2003년 11월 강진 만덕호 촬영에서 4짜 붕어를 낚았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4짜 붕어는 지금보다 훨씬 귀했다. 방송에서 4짜붕어를 낚는 것을 보여준 것은 그게 처음이었다.
연간 수입은 어느 정도인가
- FTV 제작위원 월급과 천류 프로스탭 연봉, 이노피싱 어드바이저 활동비, 광고 모델료, 단행본 인세, 잡지 원고료 등의 수입을 모두 합치면 7천만원 정도 된다. 작년 수입을 계산해보니 7천4백만원이었다.
낚시만 해서 그 정도 수입을 올리다니 부럽다. 다른 낚시인들도 전업낚시인이 될 수 있나? 
- 나처럼 전업낚시인이 되고 싶다는 낚시인들의 전화가 자주 오는데 나는 그때마다 준비는 하되 아직은 하지 말라고 말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 낚시업에 종사하지  고 전업낚시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아직은 갖춰져 있지  기 때문이다. 낚시인 중 프로란 직함을 갖고 있어도 1년에 1천만원 이상 받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나는 매우 특수한 경우이고 대단한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공직에 있다가 예편해서 낚시계 활동을 할 때 때마침 낚시방송이 시작됐고 낚시잡지도 여러 개 생기면서 폭넓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유명해져서 불편한 점은 없는가? 낚시터에서 늘 남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월척특급 방송이 몇 회 나간 뒤 고속도로 휴게소에 갔더니 유심히 쳐다보는 사람이 생기고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인사를 하더라. 그래서 앞으로는 행동을 정말 조심해야겠구나 생각했다. 사소한 일에도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부담감이 있다.

 

낚시방송 촬영 중인 송귀섭씨. 그는 '월척특급'에 출연하면서 스타로 떠올랐다.  

 

 

‘평산(平山)’이란 호는 누가 지어준 것인가? 
- 내가 서예를 배웠던 스물일곱 살 때 스승이신 미성 박춘기 선생님이 지어주셨다. 평산은 평평한 산을 뜻한다. 박 선생님은 내 신분이 군인이고 외모는 우람한데 평온한 성품을 지녔다며 인생을 살면서 높아서 잘 보이려 하지 말고 악산(惡山)이어서 아름답게 보이려 하지 말며 모든 사람을 아우를 수 있는 산이 되라는 뜻으로 평산이라 지었다고 말씀하셨다. 
전통붕어낚시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는데 전통붕어낚시란 어떤 낚시를 말하는가? 
- 전통붕어낚시란 우리 선조들이 즐겨왔던 낚시를 말하는데 정신적인 면과 기법적인 면으로 나눌 수 있다. 정신적인 면은 선비 정신이다. 선조들은 낚시와 함께 풍류를 즐겼고 과도한 고기 욕심을 부리지  았다. 기법적인 면은 봉돌을 바닥에 앉히는 바닥낚시다. 선조들은 투박하지만 여유롭게 기다릴 줄 아는 바닥낚시를 즐겼다. 나는 내림낚시나 전층낚시 기법이 유행했을 때도 전통바닥낚시를 강조하면서 발전시키려 노력해왔다. 그런 점에서 낚시춘추는 전통바닥낚시의 정신과 기법을 충실히 계승해왔다. 나는 낚시춘추를 보면서 전통바닥낚시를 공부해왔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지금 낚시춘추에 다시 글을 쓰고 있다. 낚시춘추와 함께 전통붕어낚시의 발전을 이어나가고 싶다.
언젠가 FTV에 낚시춘추 한형주 고문과 함께 출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거 한 박사 글의 애독자였다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 2006년 내가 진행한 ‘낚시인  대석’에 한형주 박사님을 모시고 촬영을 했다. 평소 애독자였던 한형주 박사님을 직접 대하니 내가 그분의 수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 한 박사님은 인터뷰 처음에 ‘붕어는 낚시꾼과 잘 놀라고 태어난 친구와 같으니까 함께 놀았으면 살생하지 말라’고 하셨다. 한 박사님을 뵌 뒤로는 내가 그동안 붕어를 소홀히 대하지  았나 반성했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 내가 출연한 ‘월척특급’은 대물낚시 붐 조성에 큰 역할을 했다. 대물낚시는 IMF 이후 고전하던 조구업체가 불황을 타개할 수 있었던 효자 상품이 됐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우리나라 낚시문화 발전과 낚시산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역할을 맡고 싶다. 지난 2년간 전국을 돌면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과 낚시문화를 소개하는 ‘낚시예찬 붕어愛’를 진행해왔다. 자연을 대상으로 풍류를 즐기는 우리 전통붕어낚시는 레저 이상의 멋과 즐거움이 있다. 한중일 세 나라는 모두 낚시를 즐기며 제각기 국민 정서에 맞게 발전시키고 있다. 일본은 떡붕어낚시를 우리나라에 전파해 알리지  았는가. 중국은 요즘 양어장낚시 위주에서 탈피해 자연지를 찾는 낚시 인구가 늘고 있다고 하니 기회가 닿는다면 우리나라의 전통붕어낚시를 중국에 알리는 역할을 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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