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장바구니 주문배송조회 고객센터
과월호신청
Home> 뉴스&칼럼 > 뉴스&피플
『실전 붕어대물낚시』 저자, 붕어연구소 차종환 소장
2011년 03월 4667 360

 

 

People

 

『실전 붕어대물낚시』 저자, 붕어연구소  차종환 소장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주먹세계에 뛰어든 파란만장 인생행로

 

“평생 원망했던 아버지, 이젠 당신의 뜻을 따르고 싶어”

 

| 서성모 기자 blog.naver.com/mofisher |

 

붕어낚시인 차종환(54). 그는 2000년대 초 우리나라에 대물낚시의 붐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다대편성, 참붕어미끼, 섬붕어 원정을 중부지방에 유행시켰다. 그의 등장으로 낚시인구가 집중된 수도권에서 대물낚시 붐이 일면서 대물낚시는 붕어낚시를 대표하는 장르로 격상했고 불황을 겪고 있던 조구업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었다.
우리 토종붕어의 연구와 보존에 대해 그가 쏟아 부은 애정과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붕어의 생태 연구를 위해 사비를 들여 붕어연구소를 설립하고 충주에 생태시험장을 만들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전국의 대물붕어 자원을 조사하기 위해 조직한 ‘전국대물실사팀’은 10년 넘게 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그가 쓴 『실전 붕어대물낚시』는 붕어낚시 입문자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붕어낚시 전문가들 사이에선 너무나 유명한 차종환씨는 일반 낚시인들에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낚시춘추 지면 외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방송 출연 제의도 사양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낚시인들은 오히려 더 궁금해 한다. 한때 주먹세계에 몸 담았던 낚시인, 대단한 재력가 등의 소문만 오갈 뿐이다. 그것은 낚시춘추 기자인 나도 마찬가지다. 98년부터 차종환씨와 인연을 맺어왔지만 ‘낚시인 차종환’ 이상은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낚시인 차종환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대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알면 알수록 차종환이란 사람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졌다. 아마 지면으로 또는 낚시터에서 차종환씨를 만났던 낚시인들 역시 같은 심정일 것이다. 차종환 소장님, 당신은 어떤 분이고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자신의 어탁 앞에 선 차종환씨. 어탁의 '선암'은 그의 호로서 무슨일이든 최고에 이르고 싶어 하는 그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고공낙하 중 추락, 생사의 갈림길에 서다

지난 1월 28일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병산리에 있는 차종환씨의 자택을 찾았다. 현관에서 기자를 맞는 차종환씨는 아직도 몸이 불편해 보였다. 그는 재작년 5월 국토해양부 주최 국제레저항공전에서 고공낙하 시범을 보이다가 낙하산 기능이상으로 추락하는 큰 사고를 당했다. 팔다리는 물론 척추, 어깨, 가슴까지 부서져 대수술을 세 차례 받았고 수술 후에도 혼수상태에 빠지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났다. 오는 3월에도 큰 수술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몸으로 또 스카이다이빙을 했다.
“며칠 전에 교육생들과 함께 태국으로 전지훈련을 다녀왔어요. 몸이 불편하긴 하지만 스카이다이빙은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서 낙하산만 메고 뛰어내리면 되니까 별 문제가 없어요.”
차종환씨가 스카이다이빙에 있어서 국내 최고의 베테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낚시인은 많지 않다. 낚시춘추가 창간 38주년을 맞았던 2009년 3월호를 본 낚시인이라면 알지 모른다. 당시 3월호 표지는 ‘낚시춘추 창간 축하’ 깃발을 들고 고공낙하하는 차종환씨의 플랫점프 사진이 장식했다. 차종환씨는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서울스카이다빙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스카이다이빙은 낚시와 함께 오랫동안 즐겨온 취미죠. 건강도 안 좋은데 또 고공낙하를 하는 내가 이해가 안 갈 겁니다. 하지만 나에게 스카이다이빙은 사명감 같은 게 됐어요. 이걸 좀 더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서재에서 노트북을 가져온 차종환씨가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육군소령 차동춘의 묘’였다.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부친의 묘소 앞에 차종환씨와 부인 홍현숙씨, 아들 재혁군이 서있었다.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소입니다.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늘 입버릇처럼 내게 군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나는 그것과는 다른 길을 걸었고 또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으니 큰 불효를 했죠. 나는 군인이 못됐지만 지금 군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요. 해병대와 공수부대의 스카이다이빙 교육을 직접 맡기도 했거든요. 얼마 전 소말리아 해적을 소탕한 UDT 이근 대위도 제게 교육을 받았어요. 현재 내가 교장으로 있는 서울스카이다이빙학교는 국내 유일의 고공낙하 교육기관인데 전현직 군인들이 교육생으로 있습니다.”
임종 전 부친은 차종환씨가 스카이다이빙학교를 만든 걸 알고는 기뻐했고 잘 하라는 당부를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스카이다이빙은 군인이 되라는 아버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따를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언제나 형에게 밀린 둘째 아들

차종환씨는 1958년 서울시 영등포구 영일동에서 2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국가유공자 군인 집안이었다. 6.25 참전용사였던 아버지 차동춘씨는 30사단 대대장으로 복무했고 이모부 엄기표씨는 육군 소장으로 예편해 경남 하동에서 2선 국회의원을 지낸 유명 정치인이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군에서 예편하셨는데 물건이 흐트러져 있거나 돈을 낭비하는 걸 보지 못하셨어요. 기상과 식사시간은 엄격하게 지켜야 했고 화장실 휴지는 항상 몇 장씩 잘 포개서 사용하도록 했는데 이걸 어기면 크게 혼내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차종환은 어른 말을 잘 따르는 순둥이였다. 직업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자주 다녔는데 경기도 화전(지금의 수색)에서 사촌형에게 낚시를 배웠다. 당시 화전엔 둠벙이 많았는데 대나무 낚싯대에 수수깡찌를 달아 붕어를 낚았다. 학생 차종환은 영민하여 늘 상위권에 들었지만 아버지는 전교 1, 2위를 다퉜던 장남 차국환씨를 더 아꼈다. 그런 아버지의 편애는 어린 종환에게 상처를 주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낚시에 푹 빠졌어요. 솔직히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실컷 낚시만 하면서 사는 게 소원이었어요. 학교를 마친 후엔 버스를 타고 한강으로 가서 끄리를 잡고 주말엔 화성 화랑농장수로를 찾았습니다. 서점에 가보니까 낚시춘추가 있어서 그걸 사서 탐독했어요. 그러니 그게 어디 공부하는 중학생의 생활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성적이 떨어지니까 어머님이 낚싯대와 낚시잡지를 모두 불사르시더군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운동에 빠졌다. 체격이 좋고 운동신경이 뛰어난 그를 학교 유도부에서 데려갔다. 운동에 욕심이 생긴 그는 학교에서 유도를 배우고 따로 체육관을 찾아 십팔기, 태권도를 익혔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상처는 사춘기에 반항심으로 바뀌었다. 두 번 가출을 했고 그게 인생의 항로를 바꾸어 놓았다.
“형만 아끼는 아버지에 대해 많이 원망했어요. 형의 입학식이나 졸업식 때는 가시면서 제 학교 행사에는 한 번도 오시지 않았어요. 왜 나한테는 이렇게 대하실까?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어요.”
두 번의 가출 후 고등학생 차종환은 영등포에서 소문이 자자한 싸움꾼이 되어 있었다. 유도, 태권도, 십팔기의 유단자인 그를 상대할  ‘또래 주먹’은 없었다고 한다. 재수생활을 거쳐 대학에 진학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공부를 떠나 있었다. “수업은 거의 듣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건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비행기에서 고공점프를 하고 있는 차종환씨. 그는 스카이다이빙 분야에서 최고 베테랑으로 통한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뛰어든 주먹세계

차종환은 대학교 2학년 때 자퇴하고 군에 입대했는데 군 생활 중 사고를 친다. 제대를 3개월 앞두고 동기에게 수시로 폭력을 가했던 상관을 두들겨 팬 것이다. “내가 좋아하던 동기였는데 그 장교에게 맞는 걸 보는 순간 욱하는 심정에 때려버렸죠. 결국 영창에서 1년을 보내고 제대했습니다.”
부친이 그의 대학 자퇴 사실을 안 것은 그가 제대한 후였다. 아버지의 소개에 의해, 아니 강제로 이끌려 럭키금성(지금의 LG)에 취직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서 나를 설득하는 겁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우리 조직을 이끌 보스는 너밖에 없다고. 그래서 회사 생활을 2년 만에 정리하고 다시 건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주먹세계에 뛰어든 1985년은 사회적으로 많이 혼란스러웠고 권력이든 기업이든 폭력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 일을 맡을수록 이권이 늘어갔다.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분들이 저에게 와서 부탁을 하더군요. 차 선생님, 나라와 사회의 안정을 위해 꼭 해주실 일이 있습니다라고요. 그런 일에도 명분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10여 명이던 그의 조직은 순식간에 불어났고  조직이 커진 만큼 경찰에 쫓기는 일이 많아졌다. 1년에 두세 차례씩 수배령이 떨어졌고 그런 생활을 10년 가까이 하면서 지방으로 도망 다니는 일이 생활처럼 돼버렸다. 지방 도피가 좋은 면도 있었다. 낚시를 실컷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남·진도·고흥의 유명 저수지부터 남해·사천·진주, 의성·영천의 소류지까지 찾아다녔다. 차종환씨가 서울 사람이면서도 전국의 낚시터 정보에 밝은 이유도 당시의 낚시경험 때문이다. 강원도 소양호에선 깊은 골을 찾아 한 달 가까이 장박낚시를 했다. 94년 겨울 소양호에서 향어낚시 취재를 나온 낚시춘추의 故 양명윤 기자를 만났고 그것이 낚시춘추 지면에 등장하게 되는 인연이 되었다.

 

원남지 새우낚시로 중부지역에 다대편성 붐

93년부터 차종환씨는 사업가로 변모한다. 건설회사, 금융회사, 전자회사를 운영했고 하는 사업마다 성공했다. 대형 술집을 세 개나 운영할 때엔 한 달 수입이 1억5천만원에 이르렀다. “나는 일을 시작하면 빈틈없이 하는 스타일이었죠.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사업이 성공하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아버지와는 더욱 멀어졌다. 주먹세계에 뛰어든 차종환씨와는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가족과의 교류도 끊어졌다. 차종환씨는 번창하던 사업을 후배들에게 맡기고 낚시를 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생활이 안정이 되니까 외로워지더군요. 내가 마음을 둘 수 있는 곳은 낚시밖에 없었습니다.”
음성 원남지는 그가 자주 찾았던 단골터였다. 경북지방에서 익힌 새우낚시를 원남지에서 시도했는데 얼음이 막 녹기 시작한 해빙기에 4짜 붕어가 낚였다. “1996년도였어요. 당시 원남지는 터가 센 떡밥낚시터였어요. 새우를 써보면 어떨까 생각했죠. 매점에 새우가 있냐고 물었더니 매운탕에 쓸 것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그걸 얻어서 장군바위 포인트에서 밤을 샜는데 4짜 붕어가 올라오더군요.” 그 4짜 붕어들과 다대편성을 하는 차종환씨의 낚시모습이 원남지를 유명 대물터로 만들었다.
붕어낚시에 더욱 몰입하게 된 그는 2000년에 붕어연구소를 설립하게 된다. “붕어낚시는 하면 할수록 붕어의 생태에 대해 궁금한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군요. 어류학자들을 만나도 명쾌한 답을 주는 분들이 없었어요. 결국 직접 붕어 생태를 연구하기 위해 붕어연구소를 설립했죠.” 붕어를 관찰할 수 있는 대형 수족관과 비늘을 탐독할 수 있는 전자현미경 등을 들이고 전국의 대물붕어 자원을 조사하기 위해 전국대물실사팀을 만들었다. 실사팀원은 차종환씨가 낚시를 하면서 인연을 맺었던 낚시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연구소 벽면에 대형 화이트보드를 걸어두고 전국으로 흩어진 팀원들의 조황 속보를 메모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활동했는데 팀원들의 이름을 지면을 통해 꼭 밝히고 싶군요. 황광인 고문님을 비롯해서 강신문, 오성근, 성낙희, 권태일, 안해운, 김석현, 한기석, 배종환, 김재영, 김대환, 장기영, 박명중, 강상우, 박준섭, 윤성진, 정의석, 임현종, 김진우, 홍경필, 김석원, 강병오, 김길호, 김기용, 김기태씨가 당시 팀원들이었습니다.”

 

국립 현충원에 안장된 부친의 묘소. 부인 홍현숙씨와 아들 재혁군이 서있다.  

 

 

토종붕어 연구 위해 붕어연구소·생태시험장 설립

차종환씨의 실전 경험은 낚시춘추의 연재 기사를 통해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2002년 말부터 낚시춘추에 연재한 ‘차종환의 대물낚시’는 중부지역 낚시인들에게 호남 원정낚시 붐을 일으켰다.
“1년 중 300일을 낚시터를 돌면서 연재기사에 들어갈 호황 현장을 찍고 테크닉을 연구했습니다. 하의도 월척사태가 기억나는군요. 하룻밤에 10마리 넘는 월척을 낚았는데 폭풍주의보가 내려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원고 마감이 임박한 상태여서 꼭 나와야 했어요. 결국 배를 통째로 빌렸지요.”
현지인도 모르는 이름 모를 소류지와 둠벙을 찾아 다니는 차종환씨와 전국대물실사팀원들의 모습은 특공대로 비유되기도 했다. 낚시인들 중엔 그런 차종환씨를 붕어연구소장 대신 ‘대장’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이 칭호를 좋아했다. 2004년에 그가 쓴 「실전 대물붕어낚시」는 대물낚시를 배우려는 낚시인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머리를 깎고 3개월간 연구소에 칩거하며 원고만 썼다.
같은 해에 붕어연구소 부설 충주생태시험장을 열었다. 전국에 있는 대물붕어 중 우람하고 잘 크는 종자들을 골라서 키우겠다는 포부였다. “갈수록 붕어 자원이 줄어드는 게 걱정이 됐고 늦기 전에 혈통이 좋은 우리 토종붕어들을 골라서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탄금호 연안에 만든 생태시험장은 여름 큰 비에 몇 차례 수해를 입고 4대강 정비사업으로 인해 보상도 못 받은 채 폐쇄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렇듯 낚시에 대한 열정이 넘쳐났던 차종환씨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온다. 2007년 형제처럼 지내던 조우 권영석씨를 낚시터에서 잃게 된 것이다. 밤낚시를 하던 권영석씨는 텐트 안에서 가스난로를 피우고 잠을 자다가 불귀의 객이 됐다. “너무 가슴이 아프고 슬펐어요. 내가 알려준 낚시터에서 낚시를 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어서 오랜 시간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은 분이었는데 낚시터에 가면 그 분 생각이 나니까 그렇게 열심히 다니던 낚시도 차츰 시들해지더군요.”

 

 

가족과 함께. 부인 홍현숙씨와 아들 재혁군.  

 

 

임종 앞둔 아버지, “종환아, 미안하다”

 

아버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는데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후회한 적은 없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못했던 것은 죄스럽고 안타깝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20여 일간 제가 직접 간병을 하게 됐어요. 직접 목욕을 시켜드리고 밥을 떠서 입에 넣어드렸는데 저한테 미안하다는 말씀을 계속 하시더군요. 속으로 생각했죠. 그 말씀을 왜 이제야 하셨냐고.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뒤엔 몇 십 년 쌓아왔던 원망이 정말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겁니다. 그리고 장례식장을 찾은 아버지의 후배분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직접 들으면서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6.25 때 포천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후송되면서도 여섯 번의 산악전투를 직접 치르셨다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예편 후에도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전장을 찾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군인이셨죠.  
아버님의 뜻대로 군인이 되었으면 어땠을까요?
내 마음 한 구석엔 늘 군인이 된 내 모습이 자리 잡고 있어요. 내가 군인이 됐으면 나라를 위해 열심히 복무했을 겁니다. 또 전쟁이 나면 아버지처럼 누구보다도 더 앞장서서 전장에 나섰을 거예요.
형님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으셨다고 했는데 형님하고는 잘 지내시나요?
아버지가 형님을 많이 아끼셔서 상처를 입긴 했지만 형님은 그런 나를 토닥이려 늘 애쓰셨어요. 형님은 지금 LG전자 상무이사로 계시죠. 카타르 두바이에서 열린 아시안 스카이다이빙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했을 때는 우리 팀의 항공비와 체재비를 전부 지원해주기도 했습니다. 저한테는 늘 미안한 감정을 갖고 계셨는데 자신도 힘들었을 겁니다.       
평소 공개하지 않았던 개인사가 이 인터뷰를 통해 알려지게 됐는데 괜찮습니까?
이미 많은 낚시인들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잖아요(웃음). 내가 유명한 주먹이었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물어보시는 분도 계시긴 한데 그럴 때는 적절하게 궁금해 하는 부분만 말해줍니다. 처음부터 그런 선입견을 갖고 대하는 분들이 있기도 하지만 함께 낚시를 다니다 보면 금방 잊어버리게 돼요. 낚시꾼이야 낚시로 다 통하는 거잖아요. 
필드스탭 제안이나 방송출연 제안을 받은 적은 없습니까?
일전에 필드스탭 제안을 받은 적이 있는데 거절을 했죠. 낚시는 좋아서 하는 취미일 뿐인데 조구업체 일에 얽매이는 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방송출연 제안도 많이 받긴 했지만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TV에 내 얼굴이 비치는 게 솔직히 부담스러워요.
차 소장님의 인생에서 낚시는 어떤 의미입니까? 
나에게 낚시는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그런 것이죠. 낚시터에 앉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또 넓어져요. 남들은 낚시를 하면 아무 생각도 안 난다고 하지만 난 조금 달라요.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가 됩니다. 만약 내가 낚시를 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불행했을지도 모릅니다. 낚시터에 앉아서 뒤를 돌아봤기 때문에 하고 있던 일에 도를 넘지 않았어요. 주먹세계에선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인생의 마지막을 불행하게 보내는 경우가 많거든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우선 건강을 되찾아야죠. 그리고 부지런히 낚시도 다니고 서울스카이다이빙학교도 열심히 운영할 겁니다. 머잖아 서울스카이다이빙학교는 군이나 관에서도 할 수 없는 고공낙하 훈련소 역할을 할 겁니다. 적진에 투입하는 고공낙하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해요. 공수부대와 같은 특수부대, 국가정보원 같이 나라의 안보를 책임지는 분들이라면 스카이다이빙은 한 번은 그리고 제대로 익혀야 할 훈련과정입니다. 그리고 가정을 위해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인터뷰가 끝난 뒤 차종환씨와 한층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테이블엔 맥주캔 6개와 소주 2병이 비어 있었다. 사나이다운 이면의 여린 감성을 평소에도 어렴풋이 느껴왔기에 그가 가감 없이 털어놓는 이야기들이 더 깊게 울렸다. 차종환 소장님, 빨리 건강을 되찾아서 열심히 하늘을 날고 물가에서도 멋진 모습을 계속 보여주십시오. 파이팅!   



※ 낚시광장의 낚시춘추 및 Angler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 침해(무단 복제, 전송, 배포 등) 시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