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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스낚시의 역사를 생중계해온 사나이 이은석
2010년 09월 2974 762

People     

TV 오락프로그램에 강호동과 유재석이 있다면 낚시계엔 MC 이은석이 있다. (사)한국스포츠피싱협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이은석씨는 협회가 주최하는 대회의 사회자로 더 유명하다. 자칫 딱딱한 분위기가 되기 쉬운 배스토너먼트 시상식장을 위트 넘치는 진행으로부드럽게 요리하는 이은석.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배스단체인 한국배스연맹을 만든 배스낚시 1세대로서 한국 배스낚시의 역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는 낚싯대 대신 왜 마이크를 들었나? 

 

 ▲ 저울을 보면서 선수들의 계량 결과를 중계하고 있다.

 

한국스포츠피싱협회(KSA)의 이은석(51) 사무국장은 우리나라에서 첫 배스토너먼트가 열린 95년부터 지금까지 15년 동안 배스낚시대회 사회를 도맡아왔다. 매년 협회 주최 30~40개 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이은석 사무국장은 배스낚시인들 사이에 유재석, 강호동 만큼 유명하다. 지난 6월 20일 ‘2010 안동호국제배스낚시대회’가 열린 안동호 주진광장에서 이은석씨를 만났다.

 

언제나 멋진 말솜씨에 감탄하곤 한다. 혹시 연예인 출신은 아니신가? 
- 어릴 때 꿈이 아나운서이긴 했지만 연예인과 관련된 활동을 한 적은 없다. 멋진 말솜씨란 건 과찬이다. 그냥 행사장을 즐겁게 만들고 싶을 뿐이다.
언제부터 낚시대회 사회를 맡게 되었나? 
- 우리나라 첫 배스단체인 한국배스연맹이 95년 봄에 창립되었고 정규전을 치르기 전 남한강 양평 대심리 지역에서 시범경기를 치렀는데 그때부터 대회 진행을 맡게 됐다. 다들 게임만 뛰려고 하지 대회 진행엔 관심이 없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가 맡게 되었다. 이제는 매년 30~40개의 토너먼트 사회를 맡게 됐는데 배스낚시대회 외에도 붕어낚시대회, 바다낚시대회에서도 사회자로 초청받곤 한다. 대략 600여 개 대회 사회를 맡지 않았나 싶다.
600여 회라니 대단하다. 진행을 포기하고 낚시를 하고픈 생각은 안 들었나? 
- 이상하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다(웃음). 아마도 대회 진행이 나와 잘 맞는 것 같다. 방송국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던 어릴 적 꿈을 낚시대회를 통해 이루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마이크를 들지 않을 때는 누구보다 더 열심히 낚시를 한다.
낚시대회 사회가 다른 행사 사회와는 무엇이 다른가? 
- 다른 행사를 진행해보지 않아 모르겠다. 낚시대회는 낚시인의 행사이기 때문에 그들의 정서에 맞는 멘트와 진행을 해야 한다고 본다. 단순히 웃기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특히 배스토너먼트는 1년간 치러지는 대회이기 때문에 토너먼트에 대한 지식과 참가 선수들의 면면을 모두 꿰고 있어야 하고 갤러리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을 대신 질문해 줄 수 있는 식견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낚시대회 전문 사회자가 필요한 것이다.

 

아나운서를 꿈꾸던 ‘막둥이 구봉서’

 

이은석씨는 1960년 인천시 중구 주안동에서 삼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금은방을 크게 운영한 부모님 덕에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자랐다. 천성적으로 순한 성격에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그는 어릴 적 ‘빨간 구두 아가씨’를 멋지게 부르곤 해 인기를 독차지했다. 친척들은 그가 코미디언 구봉서를 닮았다고 해서 ‘막둥이 구봉서’라고 불렀다. 
이러한 연예인 기질은 학창시절에도 그대로 발휘되어 소풍 때 오락부장을 늘 도맡다시피 했다. 남보원의 원맨쇼를 곧잘 흉내 내어 친구들을 웃겼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통기타를 들고 이장희와 어니언스의 노래를 불렀다. 공부는 중상위에 머물렀지만 타고난 통솔력 때문에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반장을 했다.  
낚시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접했다. 부모님이 세놓은 건물 1층에 낚시점이 들어온 것이다. 경기 시흥 도창지 시조회를 따라가서 떡밥낚시를 배웠다. “어머니는 제가 낚시하는 걸 좋아하셨어요. 낚시점 사장님은 월세가 밀리면 로얄낚싯대를 대신 주곤 했는데 어머니는 그걸 받아서 절 주셨죠.”
고등학교 때 TV 장학퀴즈를 보고 아나운서의 꿈을 키웠다. “차인태씨가 사회를 봤는데 온 국민이 지켜보는  프로그램을 사회자 한 사람이 컨트롤해서 웃고 울게 만든다는 것이 너무나 멋있어 보였어요.” 그러나 신문방송 쪽 대학에 진학하려던 그의 꿈은 사업을 이어받으라는 아버지의 뜻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결국 아나운서의 꿈을 접고 경기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끼는 감출 수 없었다. 경기대 교내방송국에서 3년간 아나운서를 맡아 학술제와 방송제를 진행하기도 했다.

 

인천프로캐스팅클럽을 만들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루어낚시를 다녔다. 박현재 선생이 운영하던 서울릴낚시회의 출조 버스에 올라 남한강, 섬진강, 경호강을 다니며 쏘가리낚시를 즐겼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캠퍼스 커플이었던 박경희씨와 결혼을 하고 제과점을 차렸다. 아버지 소유의 건물에 세를 내어 연 것인데 버스정류장 앞이어서 장사가 잘 됐고 돈도 꽤 벌었다. 3년 후인 87년 제과점을 접고 프로카센타란 카인테리어샵을 열었다. 당시 마이카 붐이 절정을 이루던 해여서 이 사업 역시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로웠다.
그때 서울 남대문낚시에 낚시용품을 사러 갔다가 전우용, 박형준씨를 만나게 된다. 젊은 루어낚시인들은 금세 친해졌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낚시회가 프로카센타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인천프로캐스팅클럽. 인천 최초의 루어낚시클럽이었다. 이은석씨를 비롯해 전우용, 박형준, 김명철, 홍재방, 김선환씨 등이 회원으로 활동했고 강화도의 하리지, 항포지 등으로 배스낚시를 주로 다녔다. 인천프로캐스팅클럽이 창립된 91년은 이은석씨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배스낚시클럽과 교류를 갖고 배스낚시단체 창립과 배스토너먼트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에 세계낚시센터란 루어낚시점이 문을 열었다고 해서 찾아가봤는데 그곳에서 임호기 실장과 박충기씨를 만났습니다. 박충기씨는 낚시점 맞은편에서 금성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더군요. 배스낚시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사람들이 만나니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다른 클럽들과도 교류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배스토너먼트를 치러낼 수 있을까?”

 

세계낚시센터는 곧 수도권 배스클럽들의 사교장이 되었다. 인천프로캐스팅클럽을 비롯해 세계낚시센터의 B&B, 청량리 반도낚시의 팀프로배스, 수원을 중심으로 활동한 나인배스, 플라이낚시와 배스낚시를 병행했던 조은친구들 회원들이 자주 만나면서 친분을 쌓았는데 B&B에서 활동하던 KSA 신승식 경기위원장도 여기서 만났다. 94년엔 7개 클럽이 강화 항포지에서 합동 교류전을 갖기도 했다. 교류전 개최와 함께 배스단체의 창설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그때 우리 머리엔 오로지 배스낚시 생각뿐이었어요. 배스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야 한다는 생각에 밤샘 회의를 밥 먹듯 했습니다.”
94년 말에 남한강 양평 대심리에서 배스클럽들이 모여 국내 첫 보트낚시대회를 열었고 이듬해 봄에 토너먼트 시범대회를 남한강 양평 병산리에서 치렀다. 30여 명의 배스 낚시인들이 보트에 올라 게임에 참가했다. “시범 경기이긴 하지만 우리가 만든 경기 규정에 따라 치른 최초의 토너먼트인 셈이죠. 만약 토너먼트 원년 멤버를 꼽는다면 이때 시범경기에 참가한 30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범경기를 마치고 우리나라 첫 배스단체의 이름을 지었다. 한국배스연맹(Korea Bass Federation). 첫 대회는 4월 전곡호에서 치러졌다. 화물차로 무대를 만들고 음료수 플라스틱 박스로 단상을 만들었다. 화로스포츠가 상품을 내놓았다. 2인 1조의 38척 고무보트가 전곡호를 수놓았는데 B&B의 안현철씨가 우리나라 첫 배스토너먼트의 우승을 차지했다. 시상식을 진행한 이은석씨는 당시 감격에 겨워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미국과 일본의 토너먼트 비디오를 보고 부러워했던 우리가 드디어 배스토너먼트를 치러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우리나라 배스낚시의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하시고 있는 겁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여성 참가자들 위한 즉석 이벤트를 벌이고 있는 이은석씨. 딱딱할 수 있는 대회 분위기를 위트 넘치는 진행으로 부드럽게 이끌어간다.

 

더 큰 카메라 앞에서 배스토너먼트 중계하고 싶어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무엇인가? 
- 95년 전곡호에서 열린 첫 배스토너먼트가 가장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98년 KBF 토너먼트에서 장판선 프로가 최초로 10,000g을 돌파했을 때와 2007년에 이상우 프로가 국내 최고 기록인 12,800g을 기록했을 때도 잊을 수 없다. 배스낚시도 프로야구처럼 기록의 스포츠다. 대기록이 세워졌을 때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한 달에 치러지는 토너먼트가 3~4개씩 되는데 이 대회를 모두 쫓아다니다 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지 않은가? 
- 95년 배스토너먼트 사회를 맡게 되면서 그 뒤 모든 토너먼트는 내가 진행을 하게 됐다. 사업에 대한 흥미도 잃어서 카인테리어샵은 접고 세를 주어서 임대료로 생활해왔다. 사회를 보는 데 대한 보수는 거의 없다. 2003년 KSA 토너먼트부터 차량 유지비를 지원 받고 있는 정도다. 좋아서 한 일이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고 불만도 없다. 
대회 진행에 있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무엇인가? 
- 계량과 시상이다. 선수들과 갤러리들은 계량 결과에 가장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계량 결과를 실시간으로 알려주어 흥미를 유발시켜줘야 한다. 시상식은 대회를 포장하는 것과 같다. 시상식이 훌륭하게 치러져야 대회가 제대로 치러진 것이다. 시상식은 스폰서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데 스폰서가 어느 정도의 지원을 했는지 어떤 상품을 홍보하고 있는지 드러나도록 노력한다. 시간이 걸려도 시상 절차를 모두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게 스폰서에 대한 예의라고 본다. 일본의 어느 토너먼트에선 시상식을 3시간에 걸쳐 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언제까지 사회를 맡을 것인가? 
- 사회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홈런타자는 못 된다. 대신 번트나 희생플라이를 쳐서 팀의 승리를 돕는 팀 플레이어라 할 수 있다. 체력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 토너먼트 사회를 맡아 배스낚시 발전에 일조하고 싶다. 배스토너먼트는 다른 낚시 장르와 달리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많다. 그래서 미국에선 인기 높은 스포츠로 각광받고 있고 스포츠 전문채널인 ESPN에서 생중계를 한다. 미국의 배스단체인 B.A.S.S의 창시자 레리 스콧은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시상식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대회를 진행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도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배스토너먼트를 진행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 시상식에서 입상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은석씨. 그는 15년간 배스토너먼트 진행을 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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