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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낚시점주 - 예산 예산낚시 김영선 사장
2009년 01월 3207 795

우리 동네 낚시점주

 

 

예산 예산낚시 김영선 사장

 

“그립네요. 장항선 역사 앞의 낚시꾼들, 30년 전 예당지의 그 맑은 물이…”

 

서성모 기자 mofish@darakwon.co.kr

 

충남 예산군 예산읍 예당저수지 근처에서 예산낚시를 운영하고 있는 김영선 사장(57).
1980년에 낚시점을 열었으니 올해로 30년째다. 낚시와 함께, 예당지와 함께 울고 웃었던 30년이다.

 

 ▲ 예당지의 조황 촬영을 위해 월척좌대 보트에 오른 김영선 사장(좌)이 좌대 밤낚시 조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11월 21일 첫눈이 내리던 날, 예산읍내의 가게 안에서 김영선 사장을 만났다. 나와 그와의 인연도 13년째에 이른다. 나는 낚시춘추에 입사한 뒤 첫 출장지가 예산이었고 그와 함께 삽교호로 첫 취재를 나섰었다. 당시 그의 가게는 지금의 상호가 아닌 코스모낚시였다.
부인 신정복씨가 막 담근 김장김치와 돼지고기를 내왔다. 소주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그에게 ‘우리동네 낚시점주’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는 ‘가게만 지켰을 뿐인데 굴곡 없이 살아온 나한테 들을 이야기가 뭐 있겠나’ 하면서 사양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이자 가장 많은 낚시인이 다녀가는 명낚시터 예당지와 떼려야 뗄 수 없었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사출기 공장에서 당한 사고가 인생 항로를 바꿔

 

1952년 김영선씨는 예산읍내에서 초등학교 선생이었던 아버지로부터 3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쉬운 것 없이 유복하게 자랐다고 한다. 예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군 제대 후엔 매형이 운영하는 공장에 취직한다. 플라스틱을 뽑는 사출기계를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손기술이 뛰어났던 그는 몇 개월 만에 숙련된 기술자가 되었다. 다른 공장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여기서 당한 불의의 사고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기계의 롤러에 그의 왼쪽 팔이 빨려 들어가는 큰 사고를 당해 2년 동안 수술과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던 것.
“제 꿈은 기술자였어요. 사실 공부는 특별히 잘 하지 못했어요. 공장에서 기계를 만지고 조작하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사고가 난 겁니다. 병원에선 팔을 잘라야 한다고 했는데 매형이 병신이 돼도 좋으니 팔만 붙여 달라고 사정을 했죠. 결국 팔을 붙이긴 붙였는데 2년간 치료를 하느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이 27세. 2년 동안 산산조각 난 뼈와 끊어진 근육을 잇는 수술을 8차례나 받았다. 다행히 다친 팔은 예전처럼 쓸 수 있게 됐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었다. 작지만 근육으로 탄탄했던 몸은 뼈만 남아 45kg이었다.
술로 한동안 세월을 보냈다. 그런 그를 보다 못한 친구들이 권유한 것이 바로 낚시점. 낚시를 좋아하니 예당지 옆에서 낚시점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중에 있던 돈과 친척에게 빌린 돈을 합쳐 200만원으로 예산역 맞은편에 5평 규모의 가게를 얻었다. 상호는 코스모낚시였다.
80년 문을 연 낚시점은 뜻밖에 술술 잘 풀려나갔다. 당시 낚시인들은 용산역에서 출발한 장항선을 타고 예산역에 내려 예당지로 떠났다. 역사 맞은편의 코스모낚시는 예당지행 버스를 타기 전에 으레 들러야 하는 곳이 됐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장항선 열차 도착하는 소리가 손님이 오는 소리’였다. 떡밥과 지렁이를 사기 위해 10m씩 줄을 서기도 했다. 불의의 사고로 바뀐 인생 여정이 큰 행운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는 낚시점을 연 지 6개월 만에 친구의 소개로 부인 신정복씨를 만났고 결혼하게 된다. 가게에 딸려 있는 쪽방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모든 게 순조로워서 불안할 정도였습니다. 하루 매출이 백만원을 넘어가는 날도 있었어요. 당시 읍내에서이백평 대지의 단독주택이 팔백만원이었으니까 대단한 수입이었죠. 쪽방에서 누워 있으면 누가 돈이라도 훔쳐가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잠을 깼습니다.”


 

▲ 1980년 4월 예산역 맞은편에 개업한 코스모낚시. 현관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김영선 사장이다.

 

그는 낚시점 개업 후 5년간을 최고의 황금기로 꼽았다. 떡밥은 모두 만들어서 팔았다. 타이어만한 깻묵을 빻으면 80개의 떡밥이 나왔고 팔면 한 봉지에 200원이었다. 그 중 140원 정도가 수중에 떨어지는 순수익이었다.
3년 만에 가게를 넓혀 예산역사 옆으로 옮겼다. 집도 한 채 구입했지만 부모님에게 드리고 두 부부는 가게에 딸린 방에서 생활을 계속했다.
 “물건을 파는 사람은 가게에서 생활해야 해요. 그래야 물건을 관리하기가 수월하고 가게를 비우는 일이 없어야 손님도 들어오는 겁니다.”

 

자가용 개인 출조 늘어나면서 매출 타격

 

인터뷰 도중 손님이 찾아왔다. 예당지에서 교촌좌대를 운영했던 신문식(66)씨다. 그 역시 30년 넘게 좌대집을 운영하다가 팔아버리고 얼마 전 읍내로 들어왔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예당지로 옮겨졌다. 신문식씨는 “예당지는 원래 수초가 거의 없었습니다. 마름이 조금 자라 있을 뿐, 바닥이 훤히 보였고 고기는 너무 많아서 실에 밥풀을 묶어 던져도 덥석 받아먹었던 시절이 그때였어요.”하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당지 낚시는 크게 3번 정도 큰 변화를 맞는다. 첫 번째는 자가용 출조시대가 열렸던 80년대 말, 두 번째는 IMF가 터졌던 97년, 그리고 세 번째가 지금이라고 한다.
80년대 말로 들어서자 코스모낚시의 매출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장항선으로 출조했던 낚시인들은 마이카 시대를 맞아 자가용으로 출조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김영선 사장은 당시의 상황을 예당지와 비유했다. “그렇게 맑던 예당지의 물색이 조금씩 바뀌더군요. 바닥엔 앙금이 쌓이고 전에 없던 갈대 같은 게 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했죠. 아, 예당지가 뭔가 문제가 있구나. 어쨌든 90년대를 넘어서는 매출이 절반 정도로 줄었습니다. 그때 생각했어요. 돈은 역시 잘 들어올 때가 따로 있다는 것을.”
그러나 신문식씨는 예당지 최고의 전성기를 IMF가 터진 1997년부터 1998까지의 2년을 꼽았다. 의외였다. 그는 “80년대야 장사가 잘 됐지만 노지낚시가 잘 되니까 꼭 좌대를 이용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IMF가 터졌을 때는 평일에도 좌대가 비지 않을 정도로 낚시인들이 몰려들었어요. 머리를 식히러 왔다고는 하는데 다 직장을 잃은 실직자들이었죠.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퇴직금이며 벌어 놓은 돈들이 있어서 낚시를 여유 있게 다녔어요.”하고 말했다.
손님들이 밀려드니 낚시점도 여기저기 생겨났다. 예당지 길목인 신례원-홍성간 21번 국도변은 가장 상권 경쟁이 치열한 지역이었다. 코스모낚시도 21번 국도변으로 가게를 옮겼다. 역사 앞에서 장항선 손님을 독차지했던 시대는 지났다. 그 역시 다른 낚시점들과 치열하게 경쟁을 펼쳐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상호도 코스모낚시에서 예산낚시로 바꿨다.
그는 “예당지로 바로 갈 수 있는 신례원 홍성간 도로가 뚫리니까 예산읍내를 경유해 가는 낚시차량이 별로 없는 겁니다. 도태되지 않으려면 가게를 옮길 수밖에 없었죠. 이때부터 인터넷 붐이 일면서 낚시점끼리 조황 안내 경쟁이 치열해졌어요. 저수지엔 떡붕어가 늘어나면서 전층낚시라고 하는 못 보던 기법도 등장하고…. 단골손님들만 받아 바닥낚시만 했던 나로서는 이런 변화가 너무 급작스러워서 당황했습니다.”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 역시 다른 낚시점주처럼 디지털 카메라를 장만해 아침이면 조황 답사를 나섰다. 또 인터넷을 배워 붕어낚시 사이트에 사진을 올려 가게를 알렸다.
신문식씨는 김영선 사장을 가장 부지런했던 낚시점주로 기억한다. 그는 김 사장을 ‘누룽지 총무’라고 불렀다. 누룽지를 좋아했던 김 사장은 아침에 가장 먼저 답사를 마치고서는 아침식사가 끝날 시간에 들러서 누룽지부터 찾았다고 한다. 그의 부지런함 때문에 예산낚시점은 21번 국도변에서 가장 잘 나가는 낚시점이 됐다.
김영선 사장에게 다른 일을 할 생각은 없었냐고 물었다. 그가 고개를 젓는다. “직업이란 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언제라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한 번 낚시점을 닫고 다른 일을 해볼까 생각해본 적도 있는데 포기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예당지를 떠나서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 없더군요.”

 

낚시점 안주인도 30년“이제 아내와 여행도 다니려고요”

 

그는 요즘의 예당지 분위기가 IMF 때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경기가 나빠지면 다른 곳은 몰라도 예당지는 오히려 손님들이 더 늘어난다고 한다. 예당지는 우리나라 실물경제의 바로미터인 셈인가. 그러나 지금은 IMF때와 다른 면이 있다고 말한다.
“IMF때는 그래도 다들 돈이 있어서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여유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그때처럼 경기가 안 좋은데다 사람들이 저축해둔 돈도 없는 겁니다. 얼굴에 그림자들이 많아요.”
낚시터도 변화를 맞고 있다. 요즘 늘어나기 시작한 배스 때문에 걱정이라고 했다. 90년대 말에 떡붕어가 대거 늘어나면서 낚시터가 바뀌었듯이 지금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 그는 누구보다도 예당지 환경보호에 대해 관심이 많다. 낚시점 옆엔 가건물을 지어 예산군자연환경보존회 사무실을 만들었다.
“30년 전의 예당지는 맑고 깨끗했던 토종붕어 천국이었어요. 지금 예당지가 이렇게 변하고 있는 것은 저수지로 손님을 계속 보냈던 제 책임도 있는 겁니다. 예당지가 있어 아이들도 키웠고 돈도 벌었습니다. 이제 예당지에 제가 뭔가를 해야 될 것 같아요. 환경보호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예전의 낚시터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김영선 사장의 말이다.


 

▲ 김영선. 신정복씨 부부. 김영선 사장은 30년간 낚시점 안주인으로 아내를 고생만 시킨 것 같아 늘 미안하다고 밝혔다.

 

1남1녀를 둔 그는 지난 12월 13일 큰 아들을 장가보냈다. 둘째 딸마저 시집을 보내면 이제 홀가분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에게 언제까지 낚시점을 할 거냐고 물었더니 ‘앞으로 계속’이라고 답한다. 예당지를 바라보고 낚시점을 하면서,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과 맺은 인연도 다 낚시를 통해서였다. 예당지 곁을 떠나면 노년으로 접어든 그가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는 부인에게 미안할 뿐이라고 말했다.
“개업하고 얼마 안 있어 결혼을 했으니까 아내도 낚시점주 생활을 30년 한 겁니다. 나 못지않게 가게에서 고생했는데 잘 해준 게 없어 많이 미안해요. 휴일에 나는 가끔 놀러 갔어도 아내는 그렇지 못했거든요. 자식들도 다 컸으니까 이제 틈틈이 아내와 여행을 다니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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