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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낚시점주 - 해남 유명낚시 명재구 사장
2009년 02월 3802 813

‘우리동네 낚시점주’

 

 

 

 

해남 유명낚시 명재구 사장

 


 

 

로애락의 23년 추자도 뱃길

 

“열 길 물속보다 알 수 없는 건 낚시꾼 마음”

 

이영규 기자 yklee09@darakwon.cco.kr

 

 

▲ 황제호 앞에서 포즈를 취한 명재구 사장. 23년간 해남에서 추자도를 출조한 원정낚시의 산 증인이다.

 

해남군 해남읍 유명낚시 명재구 사장은 추자도를 찾는 낚시인들에겐 황제호 선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명 사장이 해남 땅끝에서 추자도행 낚싯배를 띄운 지 올해로 만 23년째. 추자도 원정낚시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해남 토박이 명재구(52)씨가 바다낚시와 인연을 맺게 된 곳은 뜻밖에 제주도였다.
초, 중, 고등학교를 모두 해남에서 나온 그는 고교 졸업과 동시에 양복 재단 기술을 배웠다. 해남에서 직물 도매상을 크게 했던 아버지와 양복점을 운영하던 작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해남과 진도에서 2년간 재단사로 일하던 그는 1980년 스물두 살 때 ‘제주도의 양복점에서 일해보라’는 지인의 제안을 받았다. 당시 제주도에는 일본인 관광객이 넘쳐날 때였다. 특히 재일교포들이 많이 와서 양복을 맞춰 입고 돌아갔다. 제주시 칠성동 보창라사에 취직한 그는 그때 바다낚시를 접했다. 업무가 끝난 오후와 휴일이면 어김없이 낚시터를 찾았다. 그때는 서부두방파제에서 투박한 EVA 찌에 갯지렁이만 달아 던져도 고기들이 앞다퉈 달려들었다고 한다.   
“양복 재단 솜씨가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일본인 단골들도 많이 생겼는데 하루는 교포 한 분이 릴낚싯대를 선물로 주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2호대 정도 되는 것 같아요. 투박한 국산 릴대만 만져보다 가벼운 일산 릴대를 만져보니 정말 좋더군요. 그 낚싯대로 벵에돔과 독가시치, 돌돔을 수없이 낚았어요.”

 

첫 직업은 양복 재단사, 제주도에서 바다낚시 배워   

 

3년 가량 제주도에 머물던 명 사장은 해남으로 넘어와 2년 간 양복점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지금의 시외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유명낚시를 개업했다.
“그때가 85년이죠. 해남읍에 낚시점이 세 곳 있었는데 바다낚시는 대부분 선상 원투낚시 위주였어요. 제주도에서 배운 찌낚시 기술을 이용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들더군요.”
해남에서 가장 먼저 낚시를 간 곳은 어란의 육지 갯바위였다. 해안초소나 레이더기지 밑이 최고의 포인트였는데 크릴을 사용한 찌낚시와 막장대낚시로 감성돔을 타작했다. 
“4월이면 완도와 해남의 내만 깊숙한 곳까지 알 밴 감성돔들이 몰려들죠. 굳이 배를 타고 나가지 않아도 대형 감성돔을 쉽게 낚을 수 있을 때입니다. 원동다리 밑에서 구멍찌낚시로 감성돔을 낚아내자 원투낚시를 하던 해남과 완도 사람들이 놀라워했죠.”
당시엔 광주와 목포 같은 도시에서도 크릴을 사용하는 낚시는 거의 하지 않았을 때다. 제주도와 부산, 대구의 일부 낚시인만 크릴을 사용했는데 1.2kg짜리 한 장에 1만원을 호가할 때이니 몰라서도 못썼지만 웬만큼 여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할 미끼였다.
당시 해남에선 크릴을 구할 수 없어 명 사장이 직접 여수까지 차를 몰고 가 크릴을 사왔다. 아이스박스에 담은 크릴이 녹을까 싶어 점심도 거른 채 해남으로 달려왔다고 한다.

 

▲ 20년 전 결혼사진. 큰 딸 진경이가 열 살 되던 해에 늦깍이  ▲4년 전부터 출조길에 동행하고 있는 부인 유옥자씨.

결혼식을 올렸다.                                                                

 

구멍찌낚시 1세대로 남해서부 원도 개척

 

낚시점을 개업한 85년부터 90년 초까지 유명낚시의 가장 큰 고객은 부산 낚시꾼들이었다. 이때부터 명사장의 원도 출조 사업이 시작됐다.
“부산에서 일찌감치 원도 출조에 눈을 뜬 낚시점은 가야낚시와 범천낚시였어요. 그들은 관광버스를 대절해 진도까지 원정을 왔는데 주로 갔던 곳이 병풍도와 맹골도였지요. 막장대와 크릴만 갖고 감성돔을 타작했어요. 아무튼 감성돔낚시에 있어서만큼은 부산 낚시꾼들이 가장 빨랐고 또 부지런했지요.”
자신의 낚싯배가 없었던 명 사장은 땅끝 갈두항에 있던 9.7톤급 FRP선 토말호(선주 김선재)를 전용선으로 사용했다. 그 배를 서망항으로 이동시켜서 손님들을 태웠다.
“그때부터 남해서부에 전용 낚싯배를 이용한 원도 출조가 생겨났다고 보면 됩니다. 배는 해남에 있었지만 손님들의 요구에 따라 출항지를 이동해가며 출조를 다녔죠. 추자도 출조도 그때부터 시작했으니까 벌써 23년째군요. 횟수는 많지 않았지만 당시 만재도와 태도까지 다녔어요.”
유명낚시는 목포와 광주, 부산 등지에서 몰려온 낚시인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91년부터 도매상들을 통해 쯔리겐 구멍찌와 마루큐 집어제가 원활히 공급되면서 본격적인 찌낚시 열풍이 불게 됐다.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밀려드는 손님을 감당하지 못하자 출조 패턴도 이원화했다. 토말호로는 병풍도, 맹골도, 태도, 만재도, 사수도, 추자도 등지로 나서는 원도꾼들을 태우고, 해남과 진도 근해로 출조하는 꾼들은 ‘너배기’로 불리는 작업선으로 가이드했다. 해남 근해의 밀매도, 갈명도, 구자도, 보길도 옆 닭섬들은 이미 이 당시에 대부분 개발된 곳들이다.              

 

화진스타호 조난 사고 후 회의감 느끼기도

 

명 사장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의 낚시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 흘러온 듯했다. 과연 그럴까? 그에게는 지금도 잊지 못할 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때가 2000년 겨울이었을 겁니다. 화진스타라는 낚시어선을 사서 추자도 출조에 나섰지요. 제 돈으로 구입한 첫 배였죠. 그런데 출조 1년 만에 사고가 났어요. 출항한 지 30분이 안 돼 어룡도 부근에서 스크루에 로프가 감겨버렸죠. 그래서 마침 소안도로 출조했던 조성스타호에 SOS를 쳤지요. 그런데 조성스타호로 견인하던 도중 사고가 터졌어요. 너무 서두르다보니 후미의 확인구 나사를 조이지 않고 그냥 출발한 겁니다. 5분 정도 달리는데 뒤쪽에서 ‘배가 가라앉는다’는 비명과 함께 순식간에 선실로 물이 차오는 게 아닙니까.” 
침수가 시작된 배는 순식간에 기울기 시작했고 낚싯배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야영짐과 낚시가방은 모조리 바다로 떨어졌고 조금만 더 늦으면 낚싯배와 낚시꾼 모두 수장될 순간이었다. 재빨리 조성스타호가 화진스타호의 옆으로 다가가 로프로 배를 고정시켜 배가 가라앉는 것을 막았고 낚시꾼들은 안전하게 조성스타호로 옮겨갔다. 
명 사장은 당시의 순간을 ‘전장에서 다리가 잘려나간 패잔병이 동료 병사의 부축을 받으며 귀환하는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조성스타호에 기우뚱 매달려 토말항으로 끌려오는 화진스타호, 소문을 듣고 토말항으로 몰려온 동네 주민들을 보자 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해 보이던지.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땅끝에서 낚시사업을 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그때 충격도 컸지만 자존심에도 큰 상처를 입어 이런 무모한 사업을 계속해야만 되나 하는 후회가 들더군요.”
그때의 기억 때문에 지금도 배 관리 하나는 철저히 하고 있다. “이번 겨울에도 천만원을 들여 배를 손봤지요. 3~4년 뒤에나 손봐도 될 부분인데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해서….”
추자도를 출조하면서 겪었던 마음고생이나 에피소드를 묻자 선뜻 ‘사람간의 불신’이라고 말했다.
“정원 문제가 늘 불씨가 됐습니다. 단체와 개인을 가리지 않고 예약 순서대로 손님을 받는데도 단체는 단체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저에게 불신이 있더군요. 단골만 골라 태운다는 것이지요. 민박집 중에도 왜 자기 집에 오는 낚시인만 태워주지 않았느냐고 불만을 얘기하는 곳들도 있었습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지면을 빌어 오해를 풀고 싶어요. 정원을 두세 명 오버해 벌금을 물을지언정 가급적 모두 태워가고 싶은 게 제 심정이라는 걸 알아주었으면 해요.”

 

▲ 철수하는 낚시꾼들을 태우고 해남을 향해 출항하고 있는 황제호.

 

명재구 사장과 나눈 일문일답

 

-언제까지 추자도를 뛸 생각인가?
“공무원 정년이 58세까지라고 하니 한 5년 정도만 더 배를 몰아볼 생각이다. 이제는 건강도 예전 같지 않아 피로를 쉽게 느낀다. 매일 같이 새벽 2시에 일어나 밤바다를 항해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이런 건강 변화를 눈치 챈 아내가 4년 전부터 배에 동승하고 있다. 4년 전에 해기사면허증도 땄는데 내 대신 로프도 묶어주고 잡일도 많이 거들어준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큰 도움이 되고 있다.” 

-23년간 원도를 뛰었으면 돈도 많이 벌었을 것 같다.
“전혀 못 벌었다고 하면 거짓말 아니겠나. 배로 번 돈으로 딸 시집보내고 아들도 서울에서 번듯한 직장을 다니고 있다. 하지만 배는 목돈은 되지만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크다. 정원의 1/3도 안 되는 인원을 싣고 손해를 보며 출조할 때도 있고, 배가 고장이라도 나면 수리비도 만만치 않다.”   

-부인과는 학교 선후배 사이로 알고 있다. 어떻게 만나게 됐나.
“해남이 땅은 넓지만 읍내는 좁다. 와이프가 내 학교 1년 선배였는데 졸업 후 읍내에서 자주 마주치다보니 자연스럽게 정이 들어버렸다. 내가 객지를 돌며 양복 재단사 일을 하다 보니 결혼식은 좀 살다가 했다. 큰 딸 진경이가 10살이 됐을 때에야 식을 올렸다.”

-추자도의 여러 섬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섬이 있다면?
“문여다. 해남에서 추자도로 들어가다 보면 항상 문여 옆을 지나게 된다. 문여 옆을 지나칠 때마다 오늘도 무사히 항해를 마쳤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또 내가 손님들과 함께 문여에 내려 야영낚시를 한 적도 많다. 낚시꾼들은 사자섬이나 푸랭이, 모여 등을 손꼽지만 내가 가장 즐겁게 낚시했던 시간, 추억 속의 조우들과 야영하며 끈끈한 정을 나눴던 문여가 지금도 나에게는 최고의 명당으로 남아있다.”   

 

 

▲ 진열장에 보관 중이던 쯔리켄사의 오래된 구멍찌들을 보여주고 있는 명재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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