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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낚시점주 - 부산 88낚시 연규설 사장
2009년 03월 5515 856

 

부산 사상구 감전동 88낚시 연규설(51) 사장은 89년 낚시점을 개업해 20년간 출조점을 해왔다. 90년대부터 고흥·녹동·완도·추자로 줄기차게 원정 출조를 다녔다. 그동안 갈아치운 버스만 7대. 지금은 출조와 낚시용품 판매로 연매출 10억을 거두는 낚시점이 되었다.

 

김진현 기자 blog.naver.com/yasukkk

 

▲부산 88낚시 연규설 사장이 일곱 번째 구입한 출조버스 앞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부산에서 20년간 낚시인들을 원도로 가이드 해왔다. 


 

구정연휴에 고향 부산을 찾은 나는 감전동에 있는 88낚시를 찾았다. 그런데 입구에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가게 문 앞에 ‘점포임대’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불황에 88낚시마저도 문을 닫는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는데 카운터에 앉아있던 연규설 사장의 부인 박춘자씨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았다. 왜 점포를 내놓았냐고 묻자 박춘자씨가 말했다.
“오는 3월에 150평 매장으로 확장이전해요. 물건이 많아서 지금 매장으론 부족해서요.”
연규설 사장은 설 연휴 전날임에도 전화통화에 여념이 없었다. 준비한 밑밥의 양을 보니 연휴출조객의 숫자가 만만치 않은가보다. 낚시용품으로 꽉 찬 가게, 88낚시는 이른바 ‘잘나가는 낚시점’이다. 다들 불경기에 낚시점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난린데 승승장구하는 비결이 뭘까?
“20년간 낚시점을 하면서 한 번도 어렵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낚시점을 시작한 것을 후회한 적도 없고요. 제가 이 일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전 항상 즐겁게 일했습니다.”

 

“많은 사람과 어울려야 하는 팔자” 점쟁이의 말   

 

나는 연규설 사장이 당연히 부산 토박이일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충북 진천 출신이었다. 하지만 6살 때 부산으로 내려왔으니 부산 사람이나 다름없다.
“그 당시 충북에는 농사 외엔 먹고 살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고 해요. 제가 3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어머니 혼자 충북에서 4남2녀를 먹여 살리기엔 힘들었죠. 그때 부산은 중공업과 신발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자리가 많았어요.”
어린 연규설 가족의 부산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부산으로 내려와서 몇 해 지나지 않아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6남매의 막내인 연규설을 형과 누나들이 보살폈다. 그 덕에 가야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왔고 마산에 있는 공업고등학교를 야간으로 졸업했다.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새벽에 농산물 도매시장에서 일하고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형과 누나가 일찍 돈벌이를 시작해 큰 어려움 없이 자랐어요. 하지만 언제까지 의지하고 살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일을 했습니다.”
“낚시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동네 형들과 어울려 낙동강에 있는 수로로 붕어낚시를 다녔죠. 가족 중에 아무도 낚시를 하는 사람이 없는데 저 혼자 낚시를 했어요. 대나무를 잘라 낚싯대를 만들고 조잡한 스티로폼 찌를 달았는데도 붕어가 잘 낚였어요. 그때는 낙동강의 가지수로에 붕어가 많았는데 특히 명지와 맥도강 일대는 붕어가 넘쳐났던 것 같아요.”
자력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창원에 있는 효성에 입사해 기술직으로 근무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군대를 갔다 와서 책 외판원도 했고 다른 회사로 옮겨봤지만 직장에는 애착이 가지 않았다. 결국 고등학교를 다니며 했던 농산물 도매시장 일에 손을 댔다. 부인 박춘자씨도 그때 만났다.
“당시 아내는 사상에 있는 섬유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아내의 직장 선배가 제 단골손님이었죠. 그 선배가 아내를 소개했고 만나보니 놓치고 싶지 않더군요. 그래서 일찍 결혼했습니다. 그때가 스물네 살이죠.”
결혼 후 농산물 도매업을 계속했지만 쉬는 날 없이 일만 하는 것이 싫어져서 84년에 대형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출퇴근 버스를 운전했다. 부산의 금성사(지금 LG)와 대기업 신발 회사의 출퇴근 버스를 몰았다. 하지만 2년 남짓하다가 다시 도매시장으로 돌아왔다.
“장사가 적성에 맞았다기보다는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이 좋았어요. 다만 좀 더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 위해 직업을 바꿔봤지만 오래가지 못하더군요.”

 

“개인이 바다출조용 버스를 산 건 내가 전국 1호”

 

21살에 바다낚시를 시작했다. 가덕도와 통영 근교로 낚시를 다녔다. 30년 전 경남 근교에는 감성돔이 넘쳐났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부산에 원정낚시 붐이 일었는데 낚시꾼 연규설도 거기에 동참한다.
“고흥·녹동 출조에 따라갔죠. 나로도가 주 무대였습니다. 부산 대연동 못골낚시 앞에 40명이 넘는 낚시꾼이 모이곤 했어요. 버스에 그 많은 짐과 인원을 싣고 전라도로 달렸죠. 그때 제 눈에는 낚시꾼들을 통솔하는 낚시점 사장의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더라고요. 무질서한 낚시꾼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 대단한 카리스마가 느껴졌죠.”
원정출조를 다니면서 그는 낚시점을 차릴 꿈을 꾸었다. 하지만 80년대 말 부산에는 이미 서면 보수낚시, 주례 포인트낚시, 범천낚시, 가야낚시 등 대형 출조점이 여러 개 있었다. 충무동 만어낚시, 남포동 대우낚시, 은파낚시 등 대형 낚시도매점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낚시점을 차려서 될까? 특별한 사업 아이템이 있던 것도 아니고 농산물 도매업만 해도 살림을 꾸려나가기에는 충분했기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부인에게 “낚시점 사장이 부러워서 낚시점을 하고 싶다. 많은 사람을 대하는 것은 자신 있다”고 말했고 뜻밖에 부인은 순순히 낚시점 개업을 허락했다.
그러나 부인 박춘자씨도 갈등이 컸다. 낚시점을 열어 놓고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점을 보러갔는데 점쟁이가 ‘남편 뒤에 사람이 많아 괜찮다’고 하더란다. “도와주는 사람도 많고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면 성공한다”는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되더라고.
89년 가을에 지금 매장에서 50m쯤 오른쪽에 레코드점과 낚시점을 겸한 가게를 열었다. 
“그때는 레코드점과 낚시점을 겸업하는 것이 유행이었죠. 출조 인원이 대부분 근로자라 평일 출조는 생각지도 못하는 시절이었기에 평일에도 뭔가 팔 게 있어야 했어요.”
당시로는 거액인 5000만원을 털어 가게 전세금을 내고 구형 버스 한 대를 구입했다. 전세버스를 쓰지 않고 1200만원을 들여 45인승 버스를 산 것이다.
“아마 바다낚시 출조만 하기위해 버스를 구입한 것은 전국에서 처음일 겁니다. 그러나 초반에는 출조로 벌어들이는 돈보다 레코드 판매 수익이 더 많았어요. 예나 지금이나 출조는 큰돈이 되지 않아요. 감성돔을 원투낚시로 낚던 시절이라 밑밥이 많이 팔리지도 않았고 낚시용품 가격이라고 해봐야 10만원이면 상당히 고가이던 시절이에요. 남는 건 오로지 교통비와 지렁이값이었죠.”
그러다가 93년에 LP보다 비싼 CD가 나오면서 레코드점 운영이 기로에 선다.
“레코드와 테이프는 500~1000원에 들여왔지만 CD는 6000~7000원에 들여와야 했어요. 또 CD플레이어 등 기반 시설을 전부 교체해야 했어요. 레코드점을 이어가려면 버스라도 팔아치워야 할 판이었죠. 그래도 잘나가는 레코드 판매를 포기하기는 아깝고 낚시점에만 매달리자니 수입이 줄어들겠고…, 내 인생 최대의 고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낚시점을 하기 위해 시작한 레코드 판매라 낚시를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결국 레코드 판매는 접었죠.”
연 사장은 심기일전하여 원정출조에 더 힘을 쏟았다. 인기가 높은 고흥·녹동권을 포기하고 대신 완도권을 팠다. 완도는 멀어서 그만큼 수익은 적었지만 당시 완도까지 나가는 출조점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경쟁을 피할 수 있었다. 봄가을에는 청산도, 모도, 덕우도로 나가고 겨울에는 여서도와 사수도로 들어갔다.
“완도로 원정을 가는 길은 쉽지 않았어요. 완도에 낚싯배도 없었지만 부산에서 완도까지 가는 길이 너무 험했죠. 진주부터 순천까지 편도 1차선에다 순천~완도 구간은 지금 생각해도 혀를 내두를 꼬부랑길이었어요. 지금은 4시간이면 주파하는 거리를 오밤중에 달려도 6시간이 넘게 걸렸죠. 그 고생길에 낙이라면 출조길에 들르는 식당이었어요. 순천 진달래식당, 과역 기사식당의 음식이 어찌나 맛있던지. 웃긴 얘기지만 밥을 먹으러 가는 낚시인도 더러 있었어요.”              

 

 ▲ 88낚시를 함께 꾸려나가고 있는 연규설씨 가족. 큰 딸 승희(좌)씨와 막내 승미씨 그리고 부인 박춘자씨.

 

“출조점이 좌초하는 원인은 도박”

 

그가 출조점을 운영하면서 지킨 원칙은 안전운행이었다. 직접 버스를 운전했기에 무리한 출조는 애초에 시도하지 않았다. 20년 동안 버스를 운전하면서 한 건의 접촉사고도 내지 않았다. 20년 동안 출조점을 유지한 비결은 그밖에도 많다.
“90년대 중반 마이카 시대가 열렸을 때와 2000년대에 인터넷 동호회 출조가 붐을 일으켰을 때 많은 출조점이 타격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낚시인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죠. 당시 출조점이 문을 닫는 이유는 거의 도박 때문이었어요. 출조만 해서는 큰 수익이 나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도박하우스로 판을 벌이는 곳이 많았죠.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하지만 액수가 커지면 낚시인들은 출조를 하지 않고 도박에만 열을 올리죠. 가게 분위기가 도박판으로 바뀌면 새로운 손님이 찾아오지 않고 그 순간 폐업은 결정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저도 가게에서 손님들이 도박을 하는 것을 봐주다가 파출소에서 아침을 맞은 적이 몇 번 있었어요. 덕분에 도박을 허용해선 안 되겠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죠. 낚시인은 기상이 나쁘거나 출조를 하지 못할 때 낚시점을 찾습니다. 그때 손님을 잘 맞아야 합니다. 가게에 대한 첫인상이 좋으면 당장 물건을 구입하지 않더라도 출조 손님이 될 수 있고 나중에라도 물건을 구입하죠. 인터넷 쇼핑몰이 발달한 지금도 그 점은 마찬가집니다.”
연 사장이 2008년 세무서에 신고한 매출액은 10억을 넘는다. 그 중 출조 매출은 약 1억 정도다. 출조만으로 1억을 버는 낚시점은 거의 없다. 4년 전 시작한 인터넷 쇼핑몰 매출이 5억 정도 되고 4억은 매장 판매 수익이다. 88낚시가 부산 번화가에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감전동 농산물 도매시장 뒷골목에 있어서 찾아가기도 어렵고 가게 규모도 40평이 되지 않는다.
“한때 인터넷쇼핑몰 붐이 일어 너도나도 쇼핑몰 사업을 시작했다가 망하는 낚시점도 많았어요. 저도 4년 전에 쇼핑몰에 손을 댔지만 제대로 관리하려면 생각보다 인력이 많이 들더군요. 또 지금은 치열한 가격경쟁 시대라 이것저것에 손을 대다간 손해 보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틈새시장은 있어요. 새로운 낚시가 들어오고 수요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확신이 설 때는 본전에 팔더라도 투자를 합니다. 올해는 루어용 소형릴이 히트를 칠 것 같아 많은 양을 확보해두었는데 없어서 못 팔정도로 재미를 보았죠. 하지만 하나 더 팔려고 손해를 보면서까지는 팔지 않습니다. 그런 미끼상품을 뿌리면 자신도 손해를 입고 다른 낚시점에도 피해를 주게 되죠. 유통을 하면서도 기본가격을 지킨다는 것이 제 원칙입니다.”
연 사장은 두 딸 승희(28), 승미(26)를 모두 낚시점에서 일하게 했다. 승희씨는 아버지의 권유로 회사를 관두고 상품관리를 하고 있고 승미씨는 대학에서 배운 컴퓨터 디자인 능력을 발휘해 쇼핑몰을 관리하고 있다. 손님 응대와 출조스케줄 관리는 부인 박춘자씨가 한다. 그밖에 출조와 매장 관리를 하는 직원 두 명이 있다. 그러니 연규설씨 가족은 늘 함께 있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니까 토닥거릴 때도 많지만 낚시점이 우리 가족을 늘 묶어주니 그게 가장 좋습니다.” 연 사장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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