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장바구니 주문배송조회 고객센터
과월호신청
Home> 뉴스&칼럼 > 뉴스&피플
‘우리동네 낚시점주-’‘서해 감성돔낚시의 산 증인’ 격포 변산낚시 이태영사장
2009년 05월 3670 858

우리동네 낚시점주

 

‘서해 감성돔낚시의 산 증인’  격포 변산낚시 이태영사장


 

“아직도 낚시 가면 손님보다 내가 더 설레요”  

 

 

이태영 사장은 격포 감성돔낚시의 산 증인이다.

87년 낚시점을 개업하여 격포지역 갯바위낚시터를 개발해 왔다.

위도의 감성돔을 최초로 알린 사람도 그였고

왕등도 돌돔 탐사를 최초로 성공시킨 사람도 그였다.

그러나 요즘 낚시인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른다.

그저 ‘사람 좋은 낚시점주’로만 아는 사람이 더 많다.

 

이영규 기자 yklee09@darakwon.co.kr

 


▲해맑은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는 이태영 사장. 출조 전날이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는 그는 격포 앞바다가 고향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한결 같다. 웃음을 살짝 물고 있는 표정하며 조곤조곤 가느다란 목소리하며… 유난히 하얘진 얼굴은 겨우내 출조를 나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11월에 마감하고 5월에야 다시 시작되는 서해 갯바위낚시 시즌 아닌가.
“긴 겨울 심심해서 어떻게 보내셨느냐”고 묻자 “그냥 집사람이랑 여행이나 다니며 푹 쉬었다”고 하고는 또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 사장은 평소에도 이처럼 말수가 적다. 그래서 그와 참으로 오랫동안 만났는데도 별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없다. 오늘 모처럼 한적한 낚시점에 마주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보는데 이태영 사장을 인터뷰한다기보다 내 스스로 추억여행을 떠나는 것 같았다.

 

격포에 찌낚시 유행시킨 주인공   

 

1956년생, 올해로 쉰넷인 이태영 사장은 2남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낚시점을 하기 전에 여러 장사를 했다. 결혼 직후인 82년에 아가방이라는 아기 옷가게를 부안읍내에 차렸다가 1년 만에 실패를 보고 이듬해에 독서실을 개업했지만 2년을 못 넘기고 문을 닫는다. 이후 월포 해안 간척지에서 양식장 사업을 해보려 했으나 그마저도 중도에 포기하고 이후 아버님과 함께 잠시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거듭된 사업 실패 속에서도 비교적 여유 있던 가정 형편 덕에 민물낚시는 꾸준히 다녔다고 부인 홍정민씨는 말한다. 
그러던 중 읍내에서 변산낚시를 운영하던 사람이 다른 사업을 해보겠다고 인천으로 떠나려 하자 이 사장이 그 낚시점을 인수했다. 그때가 87년 여름이다.
“낚시를 좋아했지만 사실 낚시점까지 운영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그 낚시점 위치가 희한했어요. 매형이 낚시점 건물 2층에서 병원을 했고 지하에서는 여동생이 다방을 하고 있었죠. 그러니 낚시점을 하면 얼굴을 매일 볼 수 있어 좋겠더라구요. 그래서 했죠.”
당시엔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였지만 낚시경기가 좋을 때여서 휴가철에 날밤을 새 장사를 하면 주체 못할 정도로 많은 돈이 주머니로 들어왔다. 이 사장이 감성돔 찌낚시에 몰입한 것도 그 즈음이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손님들 중에 감성돔 찌낚시를 잘 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제주도와 추자도에서 찌낚시를 배운 손님들이 제 가게를 통해서 감성돔낚시를 다녔어요. 90년대 중반부터는 서울에서는 천지회 회원들이 주로 내려왔고 군산의 감성돔낚시 1세대라 할 수 있는 김용선, 조재용, 배인진씨 등도 우리 가게를 찾았죠. 당시 군산보다 격포에 낚싯배가 많았고 여치기 여건도 좋았기 때문인데 노은여와 쌍여 등으로 함께 여치기를 다니며 찌낚시에 빠져들었죠.”

 

▲격포항을 산책중인 이태영씨 부부.                                 ▲낚시춘추를 펼쳐보는 이태영씨 부부.

                                                                                  22년 간 낚시춘추 모니터로 활동하면서 그가 개발한

                                                                                  포인트들은 고스란히 책에 담겨 독자들에게 전달됐다.

 

안마도, 왕등도 원정출조의 원조

 

90년대 초 부안의 바다낚시 전문점은 이태영 사장의 변산낚시와 만복당낚시, 격포에 있던 변산레져 세 곳이 3파전을 벌일 때였다. 다른 두 곳은 우럭 배낚시 손님이 많았지만 유독 변산낚시는 찌낚시 손님의 비율이 높았다. 이태영씨 자체가 찌낚시라는 신기법에 푹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90년 7월이었죠. 위도를 비롯해 격포 근해 섬에서 감성돔터가 많이 개발되었고 그러자 멀리 떨어진 왕등도는 어떨까 하는 게 관심거리였죠. 이미 원투낚시로는 감성돔이 낚이고 있었지만 찌낚시터로서는 큰 조명을 받지못했습니다. 그때 낚시춘추와 경쟁관계에 있던 잡지사의 모 기자가 상왕등도로 탐사대를 이끌고 들어갔는데 감성돔을 잡지 못했어요. 그래서 왕등도엔 감성돔이 없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변산레저 김준수 사장과 함께 탐사대를 구성해 왕등도로 들어갔는데 그때 낚시춘추의 김중기 기자가 동행했어요. 무려 20톤짜리 유람선을 빌려 2시간을 항해하여 하왕등도에 들어가 2박3일 동안 야영을 했죠. 감성돔은 물론 우럭과 농어를 실컷 낚아갔고 나왔고 35cm 돌돔도 2마리나 낚았어요. 왕등도에서 낚시로 걸어낸 최초의 돌돔이었습니다.”
이후 격포에 갯바위낚시 전용선이 등장한 것도 이태영 사장의 영향이 컸다. 93년 격포 어부 강원형씨가 이태영씨 가게의 갯바위 손님들을 보고 녹동에서 4.5톤짜리 낚싯배를 사온 것이 전용선의 시초다. 이태영씨는 그 배로 위도와 왕등도, 안마도까지 원정출조에 나섰다. 격포에 본격적인 찌낚시 붐이 일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다. 
             
“배 사면 돈 벌 수 있었지만 후배들 생각에 접어”

 

13년간 부안읍내에 있던 변산낚시는 2000년 2월에 지금의 격포항 입구로 이전한다. 부안에서 격포를 잇는 외곽도로가 뚫리자 낚시인들이 부안을 들르지 않고 격포로 바로 들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4~5년 전부터 나타났고 사실 매장 이전은 좀 늦은 감이 있었다.  
“왜 더 일찍 매장을 옮기지 않았냐구요? 당시 격포에서 출조점을 시작한 사람 중엔 제가 손님을 건네주던 후배들이 많았죠. 그때까지도 우리 가게에 들러 미끼와 밑밥을 산 낚시인들을 제가 격포까지 인솔하거나 현지배로 연결해주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격포로 들어간다는 소문이 나자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어요.”
당시 변산낚시와 이태영 사장의 지명도는 대단했다. 만약 변산낚시가 격포로 이전한다면 초창기 격포의 몇몇 낚시점은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다. 그는 낚싯배도 하지 않았다. 만약 초창기부터 직접 배를 사서 부렸다면 지금쯤 빌딩 몇 채는 샀을 것이라는 게 주변 낚시인들의 얘기다. 
“출조점은 배를 직접 운영하지 않으면 큰 돈을 벌기 어려워요. 그것을 알아도 배까지 욕심나지는 않더라구요. 안전에 대한 우려도 있었고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돈을 벌고 싶지는 않더군요. 또 그동안 내 손님들을 받아서 먹고사는 선장들의 영역까지 침범하고 싶지 않았지요.”
요즘 같은 경쟁시대에는 다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런 마음가짐이 22년 동안 이태영 사장이 큰 소리 한 번 안 듣고 낚시점을 운영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싶다.

“욕심을 버리면 모든 일이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91년 9월 격포 신방파제 옆 갯바위에서 감성돔을 낚아 올린 이태영 사장. 90년대 초반에 격포 근해는 물론 위도와 왕등도, 군산의 흑도까지 원정낚시를 다녔다.

 

-22년간 낚시점으로 얼마나 벌었습니까?
돈 얘기가 나오자 부부가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솔직히 돈을 못 벌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벌만큼 벌었지만 관리를 제대로 못해 대부분 까먹었습니다.”
96년에 부인 홍정민씨가 차렸던 돌솥밥집이 IMF때 망했다. 그맘때 이서면에서 유리공장을 하던 형님을 돕기 위해 보증을 선 것이 잘못돼 6억원을 날렸다. 그 외에도 어려움을 호소하는 지인들에게 빌려줬다가 지금껏 받지 못한 돈도 꽤 된다고 한다.
“부안이 시골이다보니 호형호제하는 사이에서 거절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어요.”
그 말에 부인 홍정민씨가 쏘아붙인다. 

“이 기자도 잘 아시죠, 애기 아빠 성격을. 남들은 사람 좋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네라고들 말하지만 어쩔 땐 세상을 너무 순진하게만 사는 것 같아 속상할 때도 많았죠. 순수한 우리 빚은 없었고 모두가 보증선 빚들인데 이제는 거의 다 해결돼가고 있어요. 차라리 그 돈으로 배를 샀더라면 지금쯤 큰 부자가 됐지 않을까 싶네요.”
부부는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큰 딸은 전북대 사범대를 나와 임용고시를 준비 중이고 아들은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다. 큰 딸 하늘은 어릴 적부터 좌심실중격결손증이라는 희귀 심장병을 앓았는데 다행히 지금은 건강을 되찾았다.
“새벽 손님들을 내보내기 위해 새벽 3시에 부안에서 격포로 출근했다가 다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부안으로 돌아오던 중고등학교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부인 홍정민씨가 회상한다. 
-앞으로 낚시점은 언제까지 할 계획입니까?
이태영 사장이 부인을 흘깃 본 뒤에 말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할 게 뭐 있나요. 내가 낚시를 좋아하니까 이 직업만큼 좋은 직업도 없어요. 남들은 매일 나가는 바다가 지겹지도 않느냐고 하는데 배 타고 10분 거리의 여치기를 나가도 출조 전날부터 마음이 설레고 잠을 설친답니다. 제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죠.”
부인 홍정민씨가 ‘으이그~’ 하는 표정으로 웃는다. 이태영씨가 29살 되던 해 중학교 동창 집에 놀러갔다가 그 집 처제에게 한눈에 반했다. 그 처제가 홍정민씨다.
“당시 제 언니가 ‘태영씨 주머니에는 항상 돈다발이 들어있다’고 해서 혹해 결혼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돈은 골재를 취급하던 아버지 대신 받아오는 결제대금이었지 뭐에요.”
부부는 모처럼 옛 생각에 잠겨 깔깔대며 이런저런 추억담들을 얘기한다. 천생연분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돈도 벌 만큼 벌어봤고 원하지 않게 남들에게 기부(?)도 많이 했지만 전주에 집도 한 채 사놨고 애들도 모두 대학 보냈으니 더 이상 큰 욕심 없어요. 욕심을 버리니까 세상 모든 일이 행복하게만 느껴집디다.”   



※ 낚시광장의 낚시춘추 및 Angler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 침해(무단 복제, 전송, 배포 등) 시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