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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낚시점주 - ‘에깅 전도사’ 거제 대구낚시 구봉진 사장
2009년 06월 3980 874

 

 

 

“붐은 일으켰지만 에깅으로 돈 번 것은 없어”

 

 

‘에깅 전도사’ 거제 대구낚시 구봉진 사장

 

 

구봉진(47) 사장은 2004년에 거제도 구조라리에 낚시점을 개업했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고 낚시점 경험도 없었다. 개업 전에 유명한 낚시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구봉진하면 전국적으로 알려진 ‘에깅 전도사’로 통한다.
아무도 오징어 따위에 관심이 없을 때 미친 듯이 에깅에 열광했던 그는 무늬오징어를 세상에 알린 일등공신이다.

 

김진현 기자 blog.naver.com/yasukkk


 

 ▲ “구조라에 오시면 맘 편하게 소주 한잔 해요.” 거제 대구낚시 구봉진 사장이 소주잔을 들고 밝게 웃고 있다.그는 2004년부터 박범수씨와 함께 남해동부에 에깅을 전파한 주인공이다.

 

“인터뷰요? 뭘 말입니까?”
“낚시점주 이야기인데요. 사장님은 재미있는 분이니까 그냥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시면 됩니다.”
“나? 재밌는 사람 아닌데…? 뭐 가까운데 와있다니 그냥 와서 소주나 한잔 해요.”
그렇게 멋쩍게 구봉진 사장과의 인터뷰 약속이 잡혔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낯설 정도로 가게 안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오늘은 가게가 말끔하군요.”
“아들 희민이가 지금 서울에 가있어요. 아내가 얼마 전부터 허리 통증이 심해 서울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어요. 혼자 낚싯배를 하면서 희민이를 돌보기 어려워 처제가 있는 서울로 보냈습니다.”
그동안 대구낚시를 꽤 여러 번 들렀지만 평소에 개인사를 잘 이야기하지 않으니 그런 사정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비오는 날 그와 소주잔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항상 잘 웃고 속편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개구쟁이 소년에 말썽꾸러기 학생   

 

가게 이름 때문에 그가 대구 출신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부산 범천동에서 태어나 성서초등학교와 동아중학교 그리고 동래상고(현재 부산정보관광고)를 졸업했다. 대구로 간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이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막내를 출산하다가 돌아가셨어요. 중2 땐 아버지마저 간암으로 돌아가셨죠. 졸지에 장남인 제가 가장이 됐어요. 부산에 계신 할머니가 우리를 보살피다가 고3 때 졸업하기 전에 삼촌이 계신 대구 집으로 들어가게 된 거죠.”
양친이 생존해 계실 땐 유복한 가정이었다. 아버지가 부산에서 철재공업사를 했고 어머니는 레스토랑 외에 가게를 몇 개 운영했다.
“아버지의 털털한 성격을 그대로 닮았다고 해요. 아버진 술을 좋아했고 멋쟁이로 기억합니다. 어릴 때 가끔 어머니 손에 붙들려 무도장으로 아버지를 찾아다닌 기억도 있어요. 어머니가 대신 생활력이 강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구봉진씨는 어릴 때부터 친구가 많았다. 낚시도 동네 친구들과 많이 다녔다고 한다.
“어릴 때는 아버지와 낚시를 갔었고 이후론 동네 형들과 어울려 붕어낚시를 다녔죠. 집(부산 동구)에서 구포(부산 북구)까지 가서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김해로 가서 대사리와 식만리의 수로로 다녔죠. 중학교 땐 송도의 혈청소와 용호동 이기대로 바다낚시를 다녔어요. 당시 부산 앞바다는 쥐치밭이었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만 좋아하는 그를 학교에서는 문제아로 찍었다. 고교 졸업을 앞두고 이사를 할 때 담임선생이 이사하는 사실을 믿어주지 않아 이삿짐센터의 트럭이 학교 운동장까지 들어와서 그를 데려갔다고 한다.

“아내를 만난 대구는 나의 두 번째 고향”

대구에 가서 삼촌이 운영하는 대한전선 대리점 일을 도왔다. 5년 정도 착실하게 모은 돈으로 87년에 삼촌의 가게를 인수했다. 하지만 이듬해에 망했다. “이상하죠? 내 것이 된 이후엔 악착같이 못했어요.” 그 후 경양식집이 유행해서 해봤고 편의점도 유행해서 해봤지만 모두 망했다. 92년에 시작한 휴대폰 사업은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아이템이었지만 그것마저 실패했다. 당시 ‘카드깡’이 유행했는데 ‘불법은 하지 않겠다’고 고집 부리다가 망한 것이다.
그는 악착같지 못한 성격 때문에 항상 성공의 문턱에서 미끄러졌다.
“군대에 갔더라면 악착같은 근성을 익혔을까요?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여동생 둘뿐이었으니 군대가 면제됐죠.” 
사업은 줄줄이 망했지만 대구에서도 친구들은 여전히 많았다. 친구들과 레스토랑을 찾았다가 그곳에서 일하던 부인 최정인(41)씨를 만났다.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한 미모의 최정인씨에게 구봉진씨는 첫눈에 반했다.
“고백할 방법을 찾다가 다음날 용기를 내어 혼자 찾아갔죠. 양주 한 병을 시켜놓고는 결국 용기를 내지 못해 양주병도 따지 못하고 테이블에 돈만 두고 나왔어요. 저는 술을 좋아하지만 양주는 못 마셔요. 그렇게 비슷한 행동을 두어 번 하다가 그녀의 관심을 샀고 결국 연락을 주고받다 몇 개월 만에 신혼살림을 꾸렸습니다. 그때 나이 서른이었어요.”
결혼은 했지만 여전히 사업은 풀리지 않았다. 갑갑한 마음에 시작한 것이 낚시다. 대구 근교에서 붕어낚시와 배스낚시를 즐겼다. 하지만 완전히 빠져버린 것은 청산도 바다낚시를 가서 30cm 감성돔 두 마리를 낚고 나서였다.
그 후 10년을 낚시만 하며 백수 생활을 했다. 추자도, 거문도를 제집처럼 드나들고 통영, 거제, 고성에서 한 달씩 장박낚시를 했다. 돈이 없으면 낚시가게에서 임시 가이드 노릇도 했다. 그때 얻은 별명이 ‘구프로’다. 당시 부인 최정인씨는 대구에서 경양식집을 계속 운영하고 있었다. 식당 운영도 신통치 않았다. “무심한 저를 많이 원망했죠. 하루는 아내가 말하더군요. 도대체 나에 대해 아는 게 뭐냐고….”             

 

 ▲ 구봉진씨가 5월 12일 부인 최정인(41)씨가 퇴원한 후에 희민(5)이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보내왔다.

 

16만원으로 시작한 낚시점

 

구조라에서 밴쿠버호 선장 윤경남씨를 만난 게 그 무렵이다. 윤경남씨는 손님 대기용 응접실 하나를 두고 낚싯배 영업을 하고 있었다. 구조라가 맘에 들었던 구봉진씨는 낚시나 마음껏 할 심산으로 윤경남씨에게 “이 대기실에서 출조방이나 하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윤씨는 그러라고 했다.
구봉진씨는 대구로 올라가서 아내에게 낚시점을 한다며 20만원을 받아 내려왔다. 차비를 빼니 16만원이 남았다. “인수비용이 어딨어요. 다음 달 월세 10만원과 당장 쓸 돈이었죠.”
가게는 구했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다행히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해 루어존 강민성 사장이 낚시용품 300만원 어치를 넣어 주었다. 부산에서 핸드폰 대리점을 하는 동생이 진열장을 보내왔다. 크릴을 넣어둘 냉장고는 대구에서 대학교수를 하는 한 손님이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보내줘서 해결했다. 미끼와 밑밥은 외상이었다.
그렇게 해도 낚시점 구색이 갖춰질리 없었다. 물론 낚시점이 당장 잘 될 리도 없었다. 윤경남씨의 낚싯배도 잘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갑자기 윤씨가 대출금을 갚지 못해 낚싯배를 팔아야 할 일이 생겼고 그때 구봉진씨는 낚싯배를 하기로 결심하고 어렵게 5000만원을 대출해서 낚싯배를 인수했다. 2004년 봄이다. 윤씨의 부탁으로 배 이름은 바꾸지 않았다.

 

거제 내도에서 첫 무늬오징어 포획

 

갯바위 손님을 받아 영업을 했지만 수입은 시원찮았다. 대출금 갚기에도 빠듯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에깅이다.
“낚시잡지를 통해 알게 된 에깅이 흥미로웠어요. 당시 서해와 남해, 삼천포 등지에서 갑오징어가 낚였지만 무늬오징어는 낚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2004년 8월에 한조무역 박범수 사장이 통영 두모낚시 이정운 사장과 매물도 선상에서 무늬오징어를 낚았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때 제가 박범수 사장에게 거제도에서도 해보자고 먼저 연락했죠.”
에깅 전파에 적극적으로 나서던 박범수 사장은 흔쾌히 응했다. 하지만 낚시꾼들의 관심을 끌려면 갯바위나 방파제에서 무늬오징어가 낚여야 했다. 비싼 뱃삯 주고 오징어를 낚으려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구사장은 자료부터 뒤졌다. 하지만 자료가 없었다. “이미 제주도에선 에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을 뒤지면 적어도 참고할 자료가 나올 줄 알았죠. 그런데 검색해보니 단 한 건도 나오지 않더군요.” 결국 일본에 있던 사촌동생에게 에깅 기초교본과 잡지, DVD를 구해달라고 해서 독학을 시작했다. 일본어에 능통한 부인이 해석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부인이 낚시용어를 모르는지라 웬만한 전문서적 번역보다 힘들어했다고 한다. 결국 기본만 익히고 그림과 동영상을 참고해 무작정 갯바위와 방파제로 다닐 수밖에 없었다.
“손님들을 갯바위에 내려주고 나는 다시 항으로 나와 방파제나 갯바위로 다녔어요. 그렇게 더디게 움직이다 보니 2004년엔 전혀 소득 없이 보냈고 이듬해 6~7월까지 헛되이 보내다가 8월에 마침내 오징어를 낚았습니다.”
박범수 사장과 거제 내도 갯바위에 내려 낚시했는데 아무런 어신도 없이 에기에 걸려나온 것이 먹물을 쏘는 걸 보고서야 무늬오징어인 줄 알았다고 한다.
“딱 일 년 만에 무늬오징어를 낚은 거죠. 괴상한 생명체를 낚은 듯한 감동이 들더군요.”

에깅에 힘쓴 한 명으로 남았으면…

무늬오징어 에깅은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2006년엔 구봉진씨를 중심으로 루어낚시 동호회 밴쿠버가 결성되었다. 2006년은 에깅의 해였다. 본격적인 무늬오징어 탐사에 나섰고 루어로  농어, 양태, 광어 등을 낚기도 했다. 9~10월에 여기저기서 폭발적인 조황을 보였다. 각 낚시언론에서 구봉진씨와 박범수씨를 취재했고 밴쿠버 클럽도 유명해졌다. 하지만 구봉진 사장의 영광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다음해인 2007년엔 7월부터 일찍 무늬오징어가 터졌고 지역이 광범위해졌다. 여수, 남해, 부산, 울산, 울진, 임원, 속초에서도 낚였다. 무늬오징어는 더 이상 거제도만의 대상어가 아니었고 너무 잘 낚이는 탓에 ‘에깅은 별다른 테크닉 없이 즐길 수 있는 낚시’가 되어버렸다. 밴쿠버 회원들도 그때부터는 더 이상 구 사장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소원대로 에깅은 전국으로 퍼져나갔지만 기대했던 장사는 안 되더군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 꼴이 됐죠. 에기와 장비는 인터넷쇼핑몰과 대형 매장이 다 소화했고 구조라로 용품을 사러 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에깅을 배우기 위해 구조라로 오던 사람들의 발길도 끊기더군요.”
구봉진씨는 또 쓴맛을 본 셈이다. 실제로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이 변했고 그 변화에 맞추기엔 구조라는 너무 작고 외딴 곳이었다.
“에깅의 문을 연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덕분에 유명해졌는 걸요. 그저 에깅 보급에 힘쓴 한 명으로 기억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쇼핑몰이나 다양한 장르의 루어낚시를 빨리 시작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기도 해요. 그래서 올해는 참돔지깅은 물론 다양한 루어낚시를 함께 해볼 생각입니다. 에깅에 대한 데이터와 테크닉도 꾸준히 축적해 나가면서 말이죠.”
인터뷰가 끝날 때쯤 그의 전화가 울렸다. 날이 슬슬 개니 갯바위 출조문의 전화가 한통씩 오기 시작했다. 낚시점의 하루는 또 반복된다.  

 

▲ 2007년 9월 거제로 무늬오징어 탐사를 나섰던 쯔찌하라 신야(가운데, 다이와 필드스탭), 민병진(우)씨와 함께한 기념사진. 구봉진씨가 가이드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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