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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낚시유통의 巨人 피싱그룹 만어 안승근 회장
2009년 06월 3554 894

I·N·T·E·R·V·I·E·W

 

한국 낚시유통의 巨人

 

피싱그룹 만어  안승근 회장

 

 


 

 “요즘은 낚시업체 사장들도 골프만 치고 낚시 안 해요. 그러니 낚시 붐이 일겠어?”
“도매유통은 무너졌어요. 이젠 제조사와 소매점, 제조사와 소비자의 직거래시대…”
“인터넷은 너무 비인간적이야. 정(情)도 없고 질서도, 상도의(商道義)도 없고…”

 


 

 

허만갑 기자

 

남강변의 수로에서 붕어 떡밥낚시를 즐기는 안승근 회장. 최근엔 바다낚시는 자주 다니지 못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붕어낚시를 다니는 열렬꾼이다.

 

 

피싱그룹 만어 안승근(安承根, 71) 회장. 부산을 대표하는 한국 낚시유통의 거상(巨商)으로서 빠른 판단과 냉철한 사업가적 수완을 발휘해오면서도 신용과 의리를 평생 버리지 않은 낭만가로 알려져 있다. “만어에 가면 다 있다”는 말이 상징하듯 그는 낚시의 모든 것을 갖춘 세계제일의 낚시용품 백화점을 꿈꿔왔다. 지금도 만어의 아이템은 국내 최다·최신종을 자랑한다. 누구나 아는 만어낚시, 그러나 안승근 회장의 개인사는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언론과 인터뷰한 것은 99년 장남 안국모 사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줄 때 당시 ‘월간낚시’와 한 것이 유일하다. 나는 안승근 회장과의 인터뷰를, 그것도 낚시터에서 하고 싶었다. 그 장소가 낚시터라야 하는 이유는 제주 탐라무역 사옥 신축식에서 안 회장이 한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첫날 낚시를 마치고 여관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즐기는 안승근 회장(좌)과 주천환 선생.

 

“요즘은 낚시업계 사장들도 골프만 치고 낚시 안 해. 그런 판에 낚시 붐이 일겠어?”
안승근 회장은 낚시꾼이다. 매월 한두 번씩 붕어낚시를 다니고, 제주도를 수시로 드나들며 바다낚시를 즐겼음에도 ‘여름에 낚시점이 바쁘다보니 돌돔낚시를 못 배운 게 한’이라며 아쉬워하는 ‘꾼’이다. 나는 안 회장의 낚시단짝인 부산낚시연합회 주천환(78) 원로회의장께  “젊은 사람들이 각성하게끔 원로들이 여전히 필드에서 낚시를 즐기시는 열정적인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자”며 안승근 회장과의 동행출조를 주선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게 작년 가을인데 지난 4월 26일에야 두 분을 신록이 짙어가는 진주 남강변의 수로에서 만나 뵐 수 있었다.

 

공학도 출신이 낚시유통에 뛰어들기까지

 

“떡밥낚시의 고수로 유명하신 두 분이 맞붙으면 누가 이깁니까?”
물가의 편안함이 첫 질문을 스스럼없게 만들었다.
“안 회장이 부지런해서 항상 나보다 많이 낚아요. 30분마다 변화를 주는데 나는 게을러서 그리 못해요.”
주 선생의 말씀에, 안승근 회장이 손사래를 치며 겸양의 사를 표할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주 선생님도 떡밥의 달인이지만, 마릿수로 하자면 나도 누구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죠.”
앗, 낚시꾼 특유의 큰소리? 안승근 회장 옆에 쪼그리고 앉아 무슨 채비를 쓰는지, 떡밥을 어떻게 섞는지 지켜보았다. 2.5칸대에 저푼찌, 전형적인 ‘부산채비’다. 채비는 깔끔하고 손놀림은 매끄럽다. 떡밥을 바늘에 달면서 조곤조곤 말씀하신다.   
“떡밥낚시는 집어력이 말해주니까 빨리 달아서 던지는 속도가 중요해요. 봐요. 요렇게 따르르 말아서 바늘에 탁 걸어서 사르르 당기면 걸리잖아. 그대로, 앞치기로 던져 넣으면 되죠.” 의태어를 풍부하게 사용하신다. “우리는 월척 욕심 없어요. 그저 찌가 쪼옥 올라오면 따가닥! 채는 바로 그 맛이지.”
안승근 회장의 고향은 경남 함안군 산인면이다. 부친 안점호씨는 토지개량공사 수리조합장에다 정미소를 운영하셨다. 비교적 넉넉한 집안의 4남4녀 중 장남이었다. 64년에 부산 동아대 화학과를 졸업했고 페인트 회사에 들어갔는데 직장생활은 맞지 않았나보다. 곧 나와서 페인트 대리점을 차렸다. 장사는 잘 됐지만 연쇄부도 사태로 도산했다. 그 후 전문분야인 도장기술을 이용해 식탁 등 가구를 만들어 팔았다. 그때부터 안 회장은 제조보다 영업에 재능을 발휘했다. 김해와 대구까지 진출해서 가구방문영업을 했는데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다가 친구의 권유를 받고 부산에서 최초로 광고·생활정보지 사업을 시작한다. ‘동아광고사’란 상호를 내걸고 꽤 크게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아이템은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었으나 너무 앞섰다.
전세에서 월세방으로 옮기고 실의에 잠겨 지내던 어느 날, 지인을 따라 대나무낚싯대 공장에 놀러간 것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낚시꾼이었던 그는 대나무낚싯대의 신비감에 도취되었다. 당시 대나무낚싯대는 칠 건조기간이 길어서 완성되는데 한 달이나 걸렸다. ‘건조기간만 앞당기면 돈을 벌 수 있겠다’고 말했더니 그 낚싯대 공장 사장이 ‘그럼 당신이 한번 인수해서 해보라’고 제안했다. 인수할 돈이 없다고 하자 당시 50만원(지금으로 치면 약 1억5천만원)이던 공장을 20만원 받고 내주며 30만원은 차차 갚으라고 했다. 그 사장의 예감은 적중했다. 안승근 신임사장은 공정을 한 달에서 일주일로 단축시켰다. 당연히 가격도 내릴 수 있었다. 값싸고 질 좋은 그의 낚싯대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것이 당시 부산을 휩쓸었던 ‘동양작(東洋作)’이다.
그런데 2년 후인 1971년, 글라스로드가 출현한다. 당시 부산낚시회 회원이었던 소아과의사 백영기씨가 병원 5층에 낚싯대 공장을 차리고 ‘엔젤’이란 브랜드로 최초의 국산 글라스로드를 생산한 것이다. “딱 들어보는 순간 아하, 대나무낚싯대는 이제 끝났구나 싶더군요.” 안승근 회장은 판단이 빨랐다. 그 길로 낚싯대 공장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낚시용품 유통업으로 전환했다. ‘오리엔탈 낚싯대 부산대리점’을 운영하다가 수입용품까지 취급하는 도매점으로 발전했고 80년 남포동으로 이전하면서 ‘만어낚시’라는 상호를 달았다. 엔젤 낚싯대는 2년 후 백영기 박사가 서울로 가면서 친구인 박도원(은성사 박보국 회장의 부친)씨에게 공장을 넘겨 지금의 (주)은성사가 되었다.


 

▲안승근 회장의 토종붕어용 떡밥낚시 채비.                              ▲ 집어가 되자 연신 붕어가 올라왔다. 

예민한 찌맞춤을 위해 편납을 쓰고 있다.                                 안 회장의 낚아내는 속도가 경기낚시 선수들 못지않았다.
  

 

“낚시장사엔 미늘이 있어요. 박히면 잘 안 빠져”

 

-그때 낚싯대 공장을 팔고 딴 일을 하실 수도 있었는데 왜 낚시유통에 뛰어드셨죠?
“낚시업에 일단 발을 들이면 못 떠나는 것 같아요. 낚시에는 미늘이 있어서 박히면 안 빠진다는 말도 있잖아요. 소자본으로 할 수 있고 매력도 있는데다 특히 취향이 낚시 쪽으로 맞으면 발 빼기 어렵죠.”
안승근 회장은 대학시절 김해수로에 따라가서 붕어낚시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때가 초봄인데 풀밭에 앉아 있으니 생기한 풀냄새가 감도는 게 아~ 이 맛에 다들 낚시를 하는구나 싶더군.”
(낚시를 시작한 지 1시간쯤 지나자 입질이 연달아 오기 시작했다. 떡밥에 집어가 이뤄진 듯했다. 바닥에는 청태가 있었지만 안승근 회장의 극히 가벼운 채비는 청태 위에 살짝 얹혔고, 이내 멋진 찌올림에 이어 때끌때글한 7~8치 붕어들이 속속 올라왔다. 현장화보로 따로 만들어도 될 만한 풍경이었다.)

-만어가 낚시점으로 급성장한 시기는 언제입니까?
“급성장이라기보다… 오히려 고비가 많았어요. 낚시유통 시작하고 10년간 굉장히 어려웠어요. 당시엔 조구업체들이 영세하니까 도매상들이 선금을 주면 그 돈으로 자재 사서 만들어 넘기는 식이었어요. 대구 만경사, 부산의 항도낚시, 신진낚시 등 큰 낚시점들이 미리 돈을 주고 다 땡겨버리면 정작 봄이 와서 나는 팔 물건을 구하지 못해 발을 굴렀죠. 그렇게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 나니까 80년대부터 경제가 무섭게 살아나더군요. 그때 낚시, 등산, 야외활동이 급속히 늘었고 그런 흐름에 얹혀서 자연히 성장하게 된 것이죠.”
-오늘날 만어낚시는 이렇게 컸는데 왜 그때 큰 낚시점들은 다 사라졌을까요?
“돈이 없어도 나는 젊었으니까 많은 아이템에 관심을 쏟으며 새로운 제품을 찾고자 했지만 그분들은 연로하다보니 그러지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시간이 가면서 역전된 것이겠지.”
-만어가 마루큐사의 한국총판으로서 일제 떡밥 수입의 첨병 역할을 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나는 지금껏 수많은 일본 낚시용품을 수입했지만 한국에 이미 있던 제품의 경쟁제품을 들여온 적은 없습니다. 모두 당시 우리나라에 없던 물건을 가지고 들어와 새 시장을 형성했죠. 오히려 그로 인해 국산품에도 새로운 아이템이 추가되었다고 봅니다. 낚싯바늘도 그랬고, 구멍찌도 그랬고, 바다집어제도 그랬죠.”

(지금 붕어낚시용 바늘의 대명사로 쓰이는 ‘우미다나고’, 즉 망상어바늘을 한국에 처음 보급한 이는 안승근 회장이다. 우미다나고는 최초의 니켈도금 바늘이었다. 원래 낚싯바늘은 자줏빛이었는데 거기에 니켈을 도금해서 은침으로 만든다. “일본에서 그 바늘이 나오자마자 4, 5, 7호를 입수해서 당시 한보조침의 탁주용 사장(미래조구 대표)에게 넘겨 그대로 만들어보라고 한 것이 공전의 히트를 쳤다”고 한다.)
 

▲“좀 많이 잡았을 때 찍지.” 둘째날 아침 촬영을 위해 살림망을 들어봐 달라고 하자 겸연쩍게 웃고 있는 안승근 회장.


라인 쇼핑몰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만어낚시는 이 새로운 경쟁자들에게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우리도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쇼핑몰이 없어선 안 됩니다. 손님들이 매번 와서 물건을 살펴볼 수도 없고, 소매점도 인터넷으로 물건 주문하는 시대니까…. 도매시스템은 다 무너졌습니다. 매장을 넓힌 것도 소매점 시대에 맞추기 위해섭니다. 만어의 경쟁력이라면 일단 아이템이 많다는 것, 그리고 질 좋은 제품을 정확한 가격에 판매하는 것이죠. 우리 쇼핑몰의 상품 아이템이 전국에서 가장 많습니다. 어찌 보면 내 욕심이죠. 남포동 시절에도 부산에 쓸 사람이라곤 없는 트롤링 장비까지 갖다놓았으니까요.”
-소비자 입장에선 인터넷을 통해 더 싼 값에 물건을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신세대 소비자들은 유용하게 활용하겠지만 정상적 오프라인으로 파는 것과는 제품의 질에 차이가 있을 수 있죠. 인터넷은 품질경쟁, 서비스경쟁보다 가격경쟁으로 승부하니까 정상 제품으로는 타사의 제품을 압도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중국에서든 한국에서든 미리 낮은 가격을 책정해놓고 그 가격대로 만들어달라고 공장에 주문하지요. 유통마진을 높여놓고 만드니 물건의 질이 좋기란 어렵지요. 문제는 인터넷에선 소비자들이 그 질의 차이를 알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잘 안 팔리지 않습니까?
“정상 제품으로 이윤을 남기려면 가격이 비싸니까 잘 안 팔리죠. 장사가 이익 창출이 목적이고 어쨌든 싸면 좋지만, 중국제품 가져와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가격을 바꿔가며… 아이고, 그런 장사는 차마 못하겠어요.”
-앞으로 낚시시장의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낚시가 침체되는 추세에 있습니다. 어자원이 고갈되고 젊은 층이 자연에 몸을 담고 밖에 나가 활동하기를 꺼립니다. 또 가족단위 휴가가 늘면서 여성이 휴가지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낚시시장에 어려움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낚시는 동호인 층이 넓고 나이와 장소에 구애 없이 즐길 수 있는 레저입니다. 이런저런 사업을 해봤지만 낚시만큼 한 우물을 팔 만한 안정적인 시장도 드물어요. 일본을 봐도 몇 세대를 이어오면서 쉽게 낚시를 포기하는 업체는 없더군요.”
-아들 안국모 사장에게 모든 경영을 맡겼지만 그래도 직접 챙기시는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요?
“고객 이미지 부분, 거래처에 대한 만어의 이미지 부분은 제가 직접 챙깁니다. 나머지는 모두 다 맡깁니다.”
-회장님의 사업에 관한 신조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신용이죠. 믿을 수 있는 사람, 약속을 했으면 꼭 이행하는 회사, 그게 제 신조입니다.”

이야기는 여관으로 옮겨져 밤늦도록 이어졌다. 안승근 회장과 주천환 선생이 나누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한국낚시의 역사였다. 70년대 낚시계의 뒷얘기, 릴이 처음 등장했을 때 에피소드, 그런 야사들을 언젠가 정리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다시 수로로 나가서 원 없이 강붕어의 손맛을 즐겼다. 철수길에 안 회장이 내게 넌지시 말했다.
“이 수로는 책에 내지 말아요. 우리 두 늙은이 손맛터인데 책에 나가면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오잖아.” 그래서 두 분이 붕어를 낚으며 웃고 즐기시던 한적한 수로의 위치를 굳이 밝히지 않는다.

 

 


 

 

피싱그룹 만어 주요 연혁

 

1971년 부산 충무동 오리엔탈 낚싯대 부산경남 대리점
1980년부산 남포동 만어낚시로 상호 변경
1990년 일본 (주)마루큐-한국총대리점 계약 체결
1999년 9월 남포동4가에 ‘피싱랜드 만어’로 확장 개업
2001년 국내 조구유통업체 최초 마케팅 도입
CI작업 전개 OXIEN, Incron 브랜드 창출
2003년12월 피싱그룹 만어 홈페이지 www.manuh.co.kr OPEN
2004년 X-mesis 브랜드 창출
2004년 7월 15일 피싱그룹 만어 동래점 오픈(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600평)
2008년9월 5일 피싱그룹 만어 사상점 오픈(남포동에서 모라동으로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450평 신축건물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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