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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배스낚시의 神話 TOSHINARI NAMIKI
2009년 07월 4986 911

Interview

 

일본 배스낚시 神話

 

TOSHINARI NAMIKI

 

서성모 기자 blog.naver.com/mofisher

 

- 한국의 배서들에게…

 

“일본 프로들의 ‘스몰배싱’에 현혹되지 말라”

 

 

2005년 미국 F.L.W 제3전 시상식. 우승컵을 치켜든 작은 체구의 동양인이 울먹이고 있었다. 당시 36살의 나미키 토시나리다. 일본의 배스 토너먼트를 석권한 뒤 미국 땅을 밟은 지 10년 만에 우승컵을 안은 그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동영상은 인터넷을 통해 한국 배서들에게도 널리 퍼지면서 ‘각고의 노력 끝에 최고의 자리에 오른 배서’로 나미키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91년부터 94년까지 일본 배스토너먼트 동부리그에서 3년 연속 ‘앵글러오브더이어’에 올랐고(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94년엔 종합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95년 미국으로 건너가 97년에는 동양인 최초로 미국의 배스프로 챔피언 결정전 격인 배스마스터클래식(B.A.S.S. Master Classic) 출전권을 따냈다. 그리고 2005년 드디어 B.A.S.S와 쌍벽을 이루는 미국 최대의 배스 토너먼트 F.L.W에서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곤충학자를 꿈꾸던 소년 

 

지난 4월 19일, 장성호에서 바로 그 나미키 프로를 만났다. 낚시방송 촬영을 위해 한국을 찾은 나미키 프로는 동영상에서 본 대로 왜소한 체구였다. 그러나 활기에 넘쳤다. 비바람 속에서도 배스의 파이팅을 한껏 즐긴 그는 피곤한 기색 없이 인터뷰에 응했다.    
“나는 도쿄에 인접한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神奈川? 藤?市)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죠. 어렸을 때 장난감을 사본 기억은 별로 없어요. 나는 냇가나 산에서 쉽게 잡을 수 있는 곤충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소년 나미키는 늘 쾌활했고 친구들 사이에 장난꾸러기로 통했다. 곤충에 무척 흥미가 많아 어렸을 적 희망은 곤충학자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당시 인기를 끌었던 낚시만화 ‘쯔리키치 삼페이(낚시광 三平)’에서 곤충을 미끼로 물고기를 낚는 것을 보고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때부터 그는 낚시에 빠졌다. “낚시는 곤충채집과는 또 다른 세계였어요. 물속에 있는 미지의 물고기를 잡는 일은 너무도 즐겁고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붕어, 잉어를 낚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배스낚시에 빠지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가 보여준 루어였다. 친구가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루어였다. 그 야릇한 물고기 모양의 목각품에 흥미를 느꼈고 그것에 물고기가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는 짜릿함을 느꼈다. 그것은 생미끼를 사용해 물고기를 낚을 때는 다른 흥분이었다. 대학에서 수산업을 전공한 그는 졸업논문 주제로 배스를 선택할 만큼 배스낚시에 푹 빠져 있었다.
졸업을 앞둔 1990년, 그는 배스낚시를 직업으로 삼고 싶어 다이와정공에 입사했다. “회사에서 나의 낚시에 대한 경험과 열정을 높이 평가한 것 같았어요.” 당시 23살의 그는 릴 기획과에 근무했다. 당시 로드 기획과 과장이 현재 한국 다이와정공의 ‘아베코이치(安部孝一)’사장이다.
다이와정공 직원으로서 JB(일본배스협회, Japan Bass Association) 토너먼트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데뷔 초부터 놀라운 실력으로 토너먼트를 휩쓸기 시작했다. 당시 JB 배스토너먼트를 뛰고 있던 선수는 1000명이 넘었는데, 갓 데뷔한 햇병아리가 첫해에 JB 동부 지역 리그의 ‘앵글러오브더이어’에 오른다.

                                                                                             

95년 미국 무대 도전

 

1991년부터 94년까지 4년간 JB 토너먼트 6회 우승, 네 번의 연간 종합랭킹 1위, 91, 92, 93년 동부지역 리그 3년 연속 앵글러오브더이어, 94년 종합 챔피언… 90년대 초는 그야말로 나미키의 해였다.
당시 일본의 배스낚시시장은 절정을 구가했다. 토너먼트의 인기도 치솟았다. 나미키는 일본의 배스낚시 전성기를 이끄는 톱스타가 됐다. 그는 토너먼트에 집중하기 위해 2년 만에 회사를 나오게 된다. 전업배서의 길을 걷고자 결심한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죠. 프로배서가 되겠다면 부자의 연을 끊겠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나는 성공할 자신이 있었어요. 지금은 아버지가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나미키 프로는 토너먼트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포인트를 철저하게 연구 조사했다. 다른 선수들이 신경 쓰지 않는 포인트를 찾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것이 좁은 필드에서 많은 선수들이 경쟁을 벌이는 토너먼트에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하고 말했다.
그는 일본 무대에 만족하지 않고 1995년 미국으로 진출했다. 그의 미국 진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많다. 당시 일본 토너먼트는 ‘이마에’와 ‘나미키’의 양강구도였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명예를 버리고 미국으로 진출한 것이다.
“일본에서 그 후로도 챔피언을 계속할 자신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도전하고 싶었죠. 자금이 부족하긴 했어도 실은, 이미 1년간 토너먼트를 뛰어 모아놓은 돈이 있어서 가고 싶었습니다. 더구나 토너먼트에 공정하게 임하지 않는 선수도 있어서 이 이상 일본의 토너먼트에 참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예정보다 1년 빨리 미국행을 결정했습니다.”
나미끼 프로는 1995년 B.A.S.S. 지역 리그부터 참가했다. 하지만 미국의 배스토너먼트는 고난의 여정이었다. 우선 언어의 장벽에 부딪혔다. 더군다나 포인트 정보도 중요한데 말을 모르니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아예 집을 마련하지 않고 차에서 먹고 자면서 토너먼트 투어 일정을 소화했다.
그렇게 5년을 미국의 캠프장에서 먹고 자면서 토너먼트에 도전한 노력은 성적으로 드러났다. 그는 데뷔 첫 해에 종합 랭킹 10위에 올라 다음해 열리는 1부 리그 격인 B.A.S.S TOP 100 대회 출전권을 획득했다. 다음해엔 비자 발급의 문제로 1전을 결장하면서도 나머지 경기만으로 상위 입상을 거듭해 연간 종합 랭킹 25위로 시즌을 마감해 일본인 최초로 B.A.S.S. 마스터즈클래식 출전을 이뤄냈다.

 

12년의 미국 선수생활 정리하고 모국으로

 

미국에서 5년간 토너먼트 생활을 한 그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도미 직전 결혼해 미국 생활을 함께 한 부인과 결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잠시 토너먼트 생활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루어업체 O.S.P를 설립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무대를 F.L.W로 옮긴다. 그는 이곳에서 더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미국 낚시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5년에 F.L.W 앵글러오브더이어(Angler of the year)를 몇 포인트 차로 놓치고서 랭킹 2위에 올랐고, 미국의 배스 낚시사이트인 배스팬닷컴(Bass Fan.com)에서 주최하는 B.A.S.S.와 F.L.W의 상위 선수들만 모아 치르는 토너먼트인 카벨라스 톱건 챔피언십 2005(Cabelas Top-gun Championship 2005)에서 준우승을 했다. 경기 종료 직전까지 게임을 리드하다가 아깝게 역전패했다. TV를 통해 중계된 이 경기에서 나미키는 동양을 대표하는 프로배서로 확실히 자리매김한다.
그가 미국 토너먼트에서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배스가 있는 포인트라면 모든 기법을 총동원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잡아냅니다. 미국의 필드는 너무 넓고 또 낚시터의 컨디션 변화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배스의 기분을 빨리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배스가 확인된 포인트에서 낚을 수 있는 개체를 가능한 한 모두 잡아내는 것이 테크닉이고 미국 배서들과 경쟁해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미키 프로는 2006년에 미국의 토너먼트 선수 생활을 접고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미국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그곳이 내가 평생 머무를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본에 계신 부모님도 걱정이 되었고 여러 가지를 생각한 끝에 귀국을 했고 토너먼트 선수 생활도 정리했습니다.”
현재 루어 제조업체인 O.S.P를 운영하고 있으며 다이와 등 10여 개 조구업체의 스폰서를 받고 있다. 지금은 세계 각지의 배스를 만나러 다니고 있다. 1년 중 약 50일을 미국, 멕시코, 유럽 등 해외 배스투어에 나서고 있다.    

 

 

조구업체 후원금만 연간 수 억 원

 

일본에는 토너먼트만 전문적으로 뛰는 직업 선수들이 있는가?
_ 토너먼트 상금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프로선수는 없다. 내가 활동했던 90년대 초반엔 한 번의 토너먼트 우승상금이 20만~100만엔이었다. 지금은 2~3배 정도 상금액이 올랐을 것이다. 나는 JB시절, 연간 50만~200만엔의 상금을 거머쥐었지만 계속 치러지는 토너먼트 참가비와 교통비, 장비 구입, 연습 등을 하는데 다 썼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2005년에 2300만엔 정도의 상금을 획득했지만, 1년 동안에 경비가 500만엔 들었다.

현재 여러 조구업체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다. 액수로 따진다면 어느 정도인가?
_ 현재 나의 공식 직함은 O.S.P 대표 겸 다이와 필드테스터다. 그밖에 선라인, 피나, 게리야마모토, 혼덱스, 후지공업 등 10개 정도의 조구업체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지원 방법이 다양하다. 연간 일정액을 받기도 하고 제품 생산에 참여해서 로열티를 받기도 한다. 로열티가 관련되므로 해마다 크게 차이는 나지만 한해 수천만엔 이상이다.

 

한 해 수입은 어느 정도인가?
_ 스폰서를 통해 후원받는 금액과 내가 운영하는 O.S.P의 매출 이익을 합한 것이라 보면 맞겠다. 수입은 줄 수도 있고 늘어날 수도 있다. 구체적인 금액은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연간 1억엔에는 다다를 것 같다.

 

당신을 ‘머신건캐스트(Machinegun Cast)’라고 부르는데 누가 붙여준 이름인가?
_ 일본의 배스낚시 잡지 ‘Rod & Reel’의 기자가 붙여준 닉네임이다. 97년 프로와 아마가 함께 출전하는 B.A.S.S 토너먼트에서 당시 나와 동승한 아마추어 선수가 나의 캐스팅 모습을 보고 ‘빠르고 정확하기가 마치 머신건(기관총) 같다’면서 혀를 내눌렀다는데 그 얘기를 전해들은 기자가 기사에 ‘머신건’이라는 닉네임을 처음 사용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루어 3가지만 말해 달라.
_ 첫째 크랭크베이트, 둘째 러버지그, 셋째 스피너베이트다. 스피너베이트와 저크베이트는 사용 빈도가 거의 비슷하지만 스피너베이트를 조금 더 많이 사용한다.

 

한국 낚시인들의 낚시를 지켜볼 기회가 많았는데, 느낀 점은?
_ 한국의 낚시인들은 매우 열정적이다. 그래서인지 정보 습득도 빠르고 유행에 민감한 듯하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전파된 상품이나 기법도 많지만 지금은 거꾸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되어 유행하고 있는 사례도 있다. 한국의 전우용 프로가 개발한 카이젤리그는 지금 일본 배스낚시인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낚시인들은 인격적으로도 친절하다. 나도 정말 신세를 지고 있다. 항상 고맙다.

 

한국의 배스낚시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_ 너무 웜 위주의 낚시를 한다고 느꼈다. 나도 웜을 사용하지만 특정한 장소에 있는 배스를 노릴 때 쓴다. 워킹낚시라고 해서 반드시 웜을 써야 한다는 것은 고정관념이다. 하드베이트를 활용해 넓은 범위의 포인트를 탐색하고 입질을 유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리고 루어의 크기에 대해 말하고 싶다. 한국에선 3~4인치 웜을 많이 쓰던데 더 큰 5~6인치를 자주 사용해 보길 바란다. 작은 루어는 배스가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정확히 배스가 있는 포인트에 던져 넣어야 하고 그에 맞는 액션이 뒤따라야 한다. 배스의 눈앞에 루어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큰 루어는 그렇지 않다. 루어 크기 자체로 어필할 수 있다. 배스가 오히려 루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와 공격한다. 일본에서 이렇게 작은 크기의 루어를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토너먼트 배서들이고 배스의 사이즈도 작고 먹이도 작은 필드에서만이다. 스몰 베이트보다 어느 정도 크기를 가진 루어를 사용하는 편이 빨리 배스를 낚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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