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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낚시 전도사 이갑철
2010년 04월 6959 989

P·E·O·P·L·E

 


 

경기낚시 전도사   이갑철

 


 

중학교부터 고학으로 연세대 입학, 파란만장 인생역정

 

“스포츠피싱 팀리그로 경기낚시 붐 조성하겠다”

 

서성모 기자 blog.naver.com/mofisher

 

한동안 침체해있던 경기낚시가 ‘스포츠피싱 팀리그’의 등장으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3월 7일 공주자연농원낚시터에서 열린 스포츠피싱 팀리그 한강·체리피시컵 개막전엔 전층낚시·바닥낚시 50개팀
150명이 모여 열전을 펼쳤다. 이 대회를 기획한 사람은 낚시방송인으로 잘 알려진이갑철(57, 李甲哲)씨다.

 

▲마이크를 들고 낚시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이갑철씨. 낚시방송인으로 잘 알려진 그는 구수한 언변과 재치 넘치는 진행으로 낚시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낚시방송의 인기 출연자인 이갑철씨는 스포츠피싱 팀리그 대회를 기획·조직했다. 그는 2000년대 초부터 내림낚시 보급과 경기낚시 붐 조성에 앞장서왔다. 연중 18회에 걸쳐 치러지는 매 경기는 FTV가 촬영 방영할 예정이고 이갑철씨가 해설자로 참여한다. “방송을 통해 경기낚시의 즐거움과 매력을 전하겠다”는 이갑철씨를 만났다.

 

스포츠피싱 팀리그란 어떤 대회인가? 
- FTV에서 2010년에 새롭게 시작하는 방송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일반 낚시 프로그램과는 차이가 있다. 드라마와 스포츠 중계의 차이라고나 할까. 나는 작년부터 경기낚시 붐 조성을 위해 이 대회를 준비해왔고 경기낚시 팀들을 섭외해왔다. 방송국 측엔 기획안을 통해 이 대회가 시청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프로그램이란 것을 설득해왔고 결국 정규 방송으로 편성된 것이다.

대회 운영과 진행은 어떻게 이뤄지나? 
- 전국에서 모인 3인 1팀의 50개 팀이 1년 동안 18회 경기를 갖게 된다. 참가 팀들은 내림낚시 팀도 있고 바닥낚시 팀도 있다. 바닥낚시 팀은 낚싯대 두 대를 펴고 낚시를 한다. 전후반 80분씩 경기를 치러서 총 마릿수로 순위를 가린다. 전반기와 하반기로 나눠 상위 4개 팀과 개인 랭킹 1~10위의 선수들이 각각 왕중왕전을 치르게 된다.

경기낚시는 예전에 비해 인기가 떨어졌다. 낚시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 경기낚시는 현재 침체에 빠져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예전에 경기낚시를 즐겼던 많은 낚시인들은 여전히 경기낚시에 대한 향수와 열정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들을 다시 경기낚시 무대로 불러들일 수 있는 이벤트만 제대로 준비한다면 충분히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본다. 2000년대 초 붐이 일었던 경기낚시는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열기가 식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너무 상금제 대회 위주로 집중되어 버린 게 문제였다. 대회에만 너무 집중하다보니까 일부 전문 낚시인들만 상금을 독식하고 그들만의 리그 식으로 전락해버렸다. 일반 클럽의 교류전이나 클럽 문화 정착에 노력을 쏟지 못한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스포츠피싱 팀리그에서는 클럽 자체가 부각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방송을 본 시청자들이 ‘아, 경기낚시 팀에서 활동하면 저런 재미가 있구나’ 느낄 수 있도록 진행할 것이다. 유명 낚시인이나 연예인이 참여토록 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생각이다.

전국에 활동하고 있는 경기낚시인들 수와 클럽 수는 어느 정도라고 보는가? 
- 내가 파악하고 있는 경기낚시 팀 수는 약 200개 정도 된다. 이 중에서 100개 클럽이 나름 활동을 하고 있는데 팀마다 5명씩 계산한다면 경기낚시인 수는 5천 명 정도 되지 않나 추산하고 있다.

조구업체들은 경기낚시 시장이 작다고 생각하고 있다. 
- 방송 모니터를 해보면 20~30대 낚시인들이 경기낚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과거 자연호소와 친숙했던 우리 세대와 달리 이들은 인터넷이나 게임을 즐긴다. 낚시 역시 단시간 안에 재미를 느끼고 싶어 한다. 지금 루어낚시가 젊은 층에게 호응을 얻듯 스포츠적인 면이 가미된 경기낚시도 20~30대 낚시인들의 지지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좌) 한국국제낚시박람회에서 내림낚시 강연을 하고 있는 이갑철씨. 1990년대 말부터 내림낚시 보급에 앞장서왔다.
우) 코미디언 이봉원씨와 함께 출연한 ‘이봉원의 낚시천하’ 촬영 중. 좌로부터 이갑철, 코미디언 이봉원, 연극배우 양승원.

 

스스로 학비 벌어 중학교 가려고 무작정 상경

 

이갑철씨는 1954년 충남 논산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인근 마을 외갓집에 맡겨져 어린 시절을 외할머니 밑에서 보냈다. 영리하고 활달한 성격이었던 그는 초등학교에서 1등을 줄곧 놓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고 전교 회장을 하는 등 리더십이 뛰어났다. 그러나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진학을 포기한 상태였는데 담임선생이 “너는 꼭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응시원서를 직접 갖다 주었고 그는 가족 몰래 양촌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시험 성적은 전교 2등. 성적표를 받아 돌아왔지만 외삼촌은 성적표를 박박 찢어버렸다.
“외할머니와 외삼촌 둘이서 농사일을 해왔기 때문에 외삼촌은 내가 학교에 가지 않고 일손을 도와주길 바랐어요.”
이갑철씨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중학교에 진학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논산역에서 기차를 티고 혼자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 사는 이모집에 머물면서 신문배달과 식당 접시닦이를 하며 모은 돈으로 이듬해 관악구 봉천동의 보인중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학업은 1년 만에 중단해야 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시학원 총무로 일하면서 중등 검정고시를 통과한 뒤 당시 명문으로 꼽히던 서울고등학교에 합격했다. 하지만 역시 생활고 때문에 중도 포기. 또다시 고달픈 입시학원 총무 생활의 시작이었다. 강의실의 칠판 지우개를 털고 연탄불을 갈면서 고등검정고시와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당시 제 한 끼 식사는 거의 라면이었어요. 918원하던 라면 한 박스에 라면이 50개 들어있는데 한 달 중 라면만으로 20일을 버틴 적도 있었어요. 나머지 열흘은 이모 집을 찾아 끼니를 때웠어요. 그런 처지가 서글프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배고픔만큼은 참기 힘들더군요.”

 

연세대 행정학과 중퇴하고 뛰어든 사업,
극과 극의 부침

 

고등검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곧바로 대학 입시를 보았다. 그리고 수재들만 들어가던 연세대 행정학과에 합격했다. 정규 코스를 밟자면 6년이 걸려야 할 기간인데 남들보다 1년 빠른 5년 만에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교 2학년 때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는데 군 제대 후엔 또다시 등록금을 마련하는 게 문제였다. 고민하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취직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전북 익산에 있는 전자회사에 입사한 그는 전자제품 부품을 일본에서 구매하는 무역 업무를 맡았다. 직장을 다니면서 전주 우석대 행정학과에 다시 입학해서 4년간의 공부를 비로소 모두 마쳤다.
대학 졸업 후 직장을 그만두고 수산물 무역업을 시작했다. 일본에 김, 미역 등의 건어물을 수출하고 홍콩에서 김발을 수입해와 국내에 파는 사업이었다. 사업은 매우 순조로웠고 82년엔 부인 채소현씨와 만나 가정을 꾸렸다. 
일본과의 수산물 무역에서 돈을 번 그는 ‘빠찡꼬’라 부르는 성인오락기 수입에 손을 댔다. 당시 빠찡꼬는 합법적 사업이었다.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성인오락기를 공급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하루 매출이 8천만원에 이를 때도 있었다. 이갑철씨의 당시 나이 31세.

 

◀인터뷰를 위해 부인 채소현씨와 함께 본사를 방문한 이갑철씨.

 

“내 인생에서 가장 승승장구하던 때였죠. 통장에 돈이 차곡차곡 쌓여갔어요. 서울에 큰 주택을 구입하고 외제 승용차를 굴렸습니다. 그러나 성인오락기 사업은 아쉽게도 오래 할 수는 없었어요. 대대적인 단속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당시 한창 경기가 살아나던 건설회사를 차려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경기도 안산에 건설회사를 차렸다. 68억 자본금의 큰 회사였다. 이번에도 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로운 듯했다. 강원도 동해시 590세대 아파트 공사를 따낸 것이다. 하지만 1년 만에 부도를 맞았고 그동안 모았던 재산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너무 한순간에 모든 게 무너지니까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오히려 태연해지더군요. 한동안 멍하니 천정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갑철씨의 말이다.

 

낚시방송이 인생을 바꿔놓아

 

조금 남은 재산으로 부인이 작은 레스토랑을 열었고 살림을 이끌어갔다. 이갑철씨는 그 뒤로 낚시만 다녔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다시 무엇을 해보겠다는 엄두가 쉽게 나지 않았다. 부인 역시 그런 그를 이해해주었다. 그렇게 10년이란 세월을 보내던 그는 대만·중국낚시용품을 수입하고 있던 UP무스타드의 김종성 사장을 만나 타이완식 외대속공낚시, 즉 내림낚시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뒤 UP평가팀장이 된 그는 전국을 돌면서 내림낚시를 알리는데 앞장섰다. 
“한 대만을 가지고 쏙 들어가는 찌놀림을 잡아낼 때의 쾌감은 정말 짜릿했습니다. 그리고 이 낚시는 정확한 챔질타이밍이 따라줘야 하기 때문에 실력이 없으면 붕어를 잡을 수 없는 기법이었어요. 대만에선 이 기법을 갖고 경기낚시를 해서 상당한 인기를 끈다고 해서 우리나라에 도입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2000년은 경기낚시 붐이 막 일기 시작한 해였다. 낚시단체마다 앞 다퉈 경기낚시대회를 개최했고 조구업체들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경기낚시클럽을 조직하고 전국적인 모임을 만드는 데 힘쓴 이갑철씨는 이때부터 경기낚시의 전도사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2002년엔 FTV가 개국했다. 여기서 그는 ‘로얄컵 피싱시리즈’라는 프로그램 진행을 맡으면서 낚시방송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 뒤 고정출연한 ‘낚시서바이벌’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낚시서바이벌은 출연자들이 낚시로 승부를 벌여 진 사람들이 벌칙을 받는 내용의 프로그램. 시청률 1, 2위를 다투는 인기 프로그램이 됐다. “당시 다른 프로그램은 낚시 현장을 스케치하는 식이었는데 너무 천편일률적이었어요. 낚시방송에도 예능 프로그램처럼 재미와 정보를 함께 전달하는 코너가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승부를 벌이는 식의 내용을 담았는데 호응을 얻은 겁니다.”
그 뒤 그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낚시서바이벌식의 오락성 프로그램이 많았다. 이갑철씨의 개그맨 뺨치는 언변과 재치가 빛을 발했다. 그로부터 8년간 ‘낚시동창생’, ‘낚시의 기술’, ‘더챌린저’, ‘피싱투데이’ 등 600여 회에 이르는 낚시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낚시인 중 한 사람이 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쁜 낚시인이 되었다. 한 달의 스케줄은? 
- 대부분 방송 촬영에 할애되어 있다. 지금 출연하고 있는 ‘못 말리는 챌린저’는 한 달에 3편 제작을 한다. 또 한 주간의 조황 소식을 알려주는 피싱투데이에 고정패널로 나가고 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 집에 들어갈 정도로 빡빡한 일정이다. 그밖에 각종 낚시대회의 사회자로, 낚시 강연회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연 수입은 어느 정도인가? 
- 정확히 계산은 안 해봤지만 1억 정도 된다. 방송 출연료 외에도 조구업체 광고 모델료, 각종 낚시대회의 사회를 보면서 받는 출연료나 강연료를 모두 합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연봉 2억의 직업 낚시인이 되고 싶다. 
언변이 대단하다. 방송진행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는가? 
- 말을 잘 하려면 상식이 풍부하고 재치가 있어야 한다. 재치는 타고나는 것이지만 상식과 어휘력은 공부를 해야 한다. 나는 평소에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신문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어휘력은 책을 읽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칭찬을 하면 좋아한다. 낚시인들은 칭찬에 인색한 듯하다. 낚시대회 사회를 보거나 방송을 할 때도 늘 상대방에게 칭찬을 해줄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게 진심이라면 낚시인 누구나 좋아하게 된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 4대강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싶다. 4대강은 정비사업이 끝나면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힘들 것이다. 훼손되기 전에 4대강을 찾아 낚시인의 눈으로 조명해보는 것이다. 강의 발원지부터 최하류까지 낚시를 하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 사실 강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낚시인이 아니겠는가. 4대강을 다큐멘터리로 담을 수 있는 방송 역시 낚시방송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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